친하다는 말은 가끔 냉혹할 때가 있는데, 사람마다 조건이 달라 쌍방이 아닐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 경우엔 통속적인 친함과 그렇지 않은 친함이 있다. 앞의 것은 가끔 연락할 수 있는 사이, 후자는 연락 전 내가 망설이느냐 아니냐로 꽤 가혹하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업무를 제외하면 나에게 후자인 친한 인간은 0명이다. 이 말이 타인을 서운하게 하는 걸 알고 있지만 나는 늘 망설인다.
전자와 후자 사이에서 가끔 1번 쪽, 가끔 2번 쪽으로 기우는 인물들이 있는데, 2번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고 해도 안심하지 못한다. 가끔 나를 저렇게 몰랐나 싶은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나를 아무도 모른다. 이 복잡한 감정의 층위를 설명한 적도 그럴 자신도 없다. 설명했을 때 오독이 돌아온다면 더 큰 실망을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어를 잃고 친분을 잃고 자취를 감추며 서운함을 굳이 사고 있다.
애석하게도 당신은 내가 아니다. 가끔 나도 내가 아니다. 내 모든 서사를 알 수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 문을 닫은 것은 당신이 아니며 나도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일지 모른다. 언제 물을 마시고 싶을지 모르며, 언제 눕고 싶을지, 죽고 싶을지 모르는 것이다.
서운하다는 감정이 드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공존이 아니라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 그 기대는 통속의 감정에 매번 쓸려 내려갔고 나를 함구하게 한다. 대체 왜 이렇게들 나를 깎아문드려 일반의 범위에 넣으려고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손가락, 털, 발끝 같은 끝에서 자라나는 감정들이 속으로 치고 들어올 때, 표출할 방법이 없고 표출한다 해도 이해시킬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이 일반적인 삶이고 일반의 삶이 훌륭하다면 나는 일반의 삶을 포기한다.
인간이 되지 못한 인간이 계속 혼자 살아야 한다면,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돌보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런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고양하거나 망치는 법만 배워왔다. 그것은 시간을 삭제하는 방법이지, 사용하거나 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느리게 죽어간다. 이 길 끝에는 죽음이 있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오독하다가 끝에 다다를 것이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mingostar
어쩌면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죠. 친함을 고민하는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사람들과도 그러하겠지만, 아주 가깝다고 여겨지는 (물리적인) 아내와 자녀들과의 사이에서도 힘들어하는 요즘입니다. 수종철님의 이번 글에도 공감이 많이 됩니다.
돌아온 수요일의 이종철. 수종철입니다
물리적으로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제 고민은 덜어지는 게 아니라 더 깊어졌을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