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떤 사실을 몇 초 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대로 살아가는 데에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몇 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압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정말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비슷한 상황이 찾아오면 다시 예전처럼 행동합니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같은 말을 하고
미루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또 미루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룹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왜 또 이러는 것일까."
저는 이 질문 속에 우리가 변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착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해하면 곧바로 행동도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책을 읽고 깊이 공감했을 때
누군가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
오래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이미 상당히 변한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로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분명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삶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만큼 빠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새로운 답을 이해했지만
우리의 행동은 오랫동안 반복해온 방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 이후에도 한동안 이전의 삶을 계속 살아갑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의지가 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심하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다른 장면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이 끝난 뒤에야 깨닫습니다.
아, 또 예전처럼 했구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행동하는 도중에 알아차립니다.
지금 내가 또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구나.
그리고
반복이 쌓이면 어느 순간 행동하기 전에 알아차리게 됩니다.
잠깐, 이번에는 다르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작은 시간차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차리는 순간이 행동 뒤에서 행동 중으로
다시 행동 앞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이렇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상황에서 이전보다 조금 빨리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견이 반복될수록 선택할 수 있는 틈이 생깁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반응했다면
이제는 잠깐 멈춥니다.
예전에는 실패하고 나서 후회했다면
이제는 실패하는 중간에 방향을 바꾸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중요한 일을 계속 미뤘다면
어느 날은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중요한 일을 먼저 합니다.
큰 변화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을 실제로 바꾸는 것은
이런 작은 순간들인지도 모릅니다.
생각이 행동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반복이 필요합니다.
한 번 이해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생각을 여러 번 떠올리고
다시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고
실패한 뒤에 또 생각하고
다음번에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생각은 처음 들었을 때보다
열 번째 떠올렸을 때 더 큰 힘을 갖습니다.
문장은 같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머리로 이해했던 말이
경험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것이 됩니다.
이 때문에 좋은 생각을 반복해서 듣는 일을
가볍게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말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그 생각이 내 선택을 바꾸고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떤 말은 이미 알고 있지만
아직 살아보지 못한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원칙은 설명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꺼내 쓰지 못하는 원칙일 수도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집니다.
같은 실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단정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러지?에서 예전보다 조금 빨리 알아차리고 있는가?
같은 상황에서 한 번이라도 다른 선택을 해본 적이 있는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 행동으로 내려오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변화의 속도를 억지로 빠르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던 변화를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물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깨달음만 수집하면서 행동을 미루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새로운 책을 읽고
좋은 강의를 듣고
훌륭한 문장을 기록하면서
정작 자신의 선택은 한 번도 바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금 불편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해했다고 해서 아직 내 것이 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생각을 만났다는 것과 그 생각대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단계입니다.
깨달음은 출발점이지 완성된 변화가 아닙니다.
그 생각이 내 것이 되려면 현실 속에서 여러 번 시험해봐야 합니다.
실패도 해보고
다시 시도해보고
익숙한 반응을 멈춰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야 생각은 문장에서 빠져나와 행동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뜻밖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상황에서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예전 같으면 포기했을 자리에서 조금 더 해봅니다.
예전 같으면 피했을 일을 먼저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알게 됩니다.
내가 조금 달라졌구나.
그 변화는 그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몇 달 전 처음 그 사실을 이해했던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변화가 시작된 날과 변화가 보이는 날을 자주 같은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무 빨리 자신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생각이 삶이 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해하고
잊어버리고
실패하고
다시 떠올리고
조금 다르게 선택하는 시간이 쌓여야 합니다.
어쩌면 성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답을 계속 발견하는 일이라기보다
이미 발견한 답이 자신의 행동 속으로 충분히 내려올 때까지 살아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변화는 이해한 날 시작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날이 훨씬 뒤에 올 뿐입니다.
-정수필 소장
정각(正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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