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월요일 #8] 백팩 하나, 캐리어 두 개

2026.06.07 | 조회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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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에 무거운 캐리어를 쥐고 앞서 걷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분명 두 사람의 여행인데, 짐은 1 더하기 1인 2가 아니라 5쯤은 되어 보인다. 바퀴가 유럽 돌길을 구르며 내는 묵직한 소리를 들으며 낯선 유럽의 거리를 걷다 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짐이 없었던 2015년 네덜란드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에게 흐로닝언(Groningen)의 낡은 기숙사는 최소한의 물건으로 충만했던 첫 독립 공간이었다.

나는 본래 물건을 관리하는 데 있어 꽤 단호한 편이다. 같은 기능이나 목적을 가졌다면 굳이 중복해서 소유하지 않고, 쓰임이 다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정리를 해버린다. 관심이 없는 물건은 애초에 들이지도 않는다. 스스로 까탈스럽기보다는 무던하고 둔감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없으면 없는 대로 유연하게 상황에 맞추어 잘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도 유일하게 예민해지는 지점이 있다면,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이나 감당하기 벅찬 양의 짐이 내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 부모님 품을 떠나 온전한 내 공간을 가졌던 건 스물다섯 살 청춘, 네덜란드 북부의 작고 활기찬 대학 도시 흐로닝언으로 교환학생을 떠났을 때였다. 내가 머물던 학생 기숙사는 복도식 건물에 작은 방들이 마주 보고, 주방과 남녀 공용 샤워실을 층마다 공유하는 소박한 구조였다. 입주를 마치고 마주한 내 방에는 낡은 철제 책상과 군대 관물대처럼 생긴 빨간색 철제 옷장, 그리고 미리 신청해 둔 새하얀 침구 세트가 전부였다. 다른 교환학생들은 서둘러 이케아로 달려가 작은 선반을 사고 화려한 그릇을 채워 넣으며 방을 예쁘게 꾸몄지만, 나는 오히려 그 텅 빈 여백이 좋았다. 옷걸이에 걸지 못한 옷들은 차곡차곡 개어 방구석에 쌓아두었다. 날씨에 맞지 않는 옷과 잘 쓰지 않는 물건은 캐리어에 넣어두고, 지급받은 하얀 이불에 의지해 매일 평화롭게 잠을 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미니멀리즘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깨닫는 사건이 있었다. 누군가 내 생활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리던 나였지만, 기숙사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밤 옆방 이탈리아 친구 엠마누엘레의 기습 방문을 막지는 못했다. "네 방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너무 궁금하다"라며 같은 층 친구들이 성화를 부려댔다. 술에 취해 양쪽 볼이 붉어진 채,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외국인 친구들이 우르르 내 방으로 밀고 들어오려 했다. 나는 내 공간을 공유하는 것이 싫어 온몸으로 막아섰지만, 술 취한 청춘들이 합심한 힘과 오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내 방문이 열리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30초간 깊은 정적이 휩싸였다.

옆방 친구 엠마누엘레가 머쓱한 듯 볼거리가 전혀 없는 내 방을 쓱 둘러보고는, 이내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성현, 아무리 그래도 작은 선반이나 화분이라도 하나 두는 게 어때? 여긴 마치... 옛날 정신병원 독방 같잖아." 다른 친구들 역시 웃으며 방 꾸미기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무 장식 없는 방벽과 덩그러니 놓인 붉은 관물대가 그들에게는 꽤나 생경한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의 비워내는 성향은 여행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학기 중 친해진 이탈리아 친구 루카를 비롯해 기숙사 친구들과 체코 프라하로 3박 4일 여행을 떠나던 날이었다. 공항 체크인 카운터 앞, 루카가 실소를 터뜨리며 내게 물었다. "성현, 네 캐리어는 어딨어? 짐은?" 나는 평소 학교에 다닐 때 늘 어깨에 메고 다니던 백팩 하나를 툭 치며 대답했다. "응? 내 짐 여기 다 있는데." 루카는 혀를 내두르며 나를 진정한 '상남자(Real Guy)'라 놀려댔다. 당시 루카의 거대한 짐과 나의 단출한 가방을 나란히 찍어둔 사진은 아직도 내 휴대폰 갤러리에 남아 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백팩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홀로 유럽 곳곳을 누볐다. 샤워할 때 양말과 속옷을 손빨래해 호스텔 침대 머리맡에 걸어두면 습도 조절도 되고 짐도 줄일 수 있었다. 불필요한 옷가지로 가방을 채우는 대신, 나는 두 눈과 코, 그리고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어 낯선 도시의 경험을 담아냈다.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볍던 시절이었다.

지금 이탈리아의 거리를 걸으며, 나는 다시 그렇게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상상해 본다. 앞서 걷는 아내에게 넌지시 "우리도 이제 짐을 줄이고 백팩 하나로 다녀볼까?" 묻자, 아내는 눈을 흘기며 답한다. "그건 학생 때 혼자 여행할 때나 가능하지. 우린 이제 둘이잖아. 눈치 챙겨."

맞는 말이다. 양손 가득 캐리어를 끌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짐을 내게 맡긴 것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다. 즐거워하는 그녀의 표정 속에서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단출한 백팩 하나로 충분했던 청년은 이제 이곳에 없다. 대신 그 자리에, 누군가와 함께 걷는 삶의 묵직한 무게를 기꺼이 짊어지는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때의 유럽과 지금의 유럽이 다르게 다가오듯,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내 인생도 참 많이 깊어지고 달라졌다.

추신: 혼자 하는 백팩 여행을 좋아하시나요? 제 지인 중 한 명은 타지에서는 더 외롭다며 절대 혼자 여행하지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혼자 여행을 다니며 홀로 모든 것을 정하고 느끼던 그 순간이 참 소중했습니다. 여러분은 혼자 하는 여행과 함께하는 여행 중 무엇을 더 선호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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