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매년 겪는 추위이지만 매서운 추위로 옷깃을 여밀 때마다 이렇게 추웠었나 싶습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인터뷰를 전해드릴 텐데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부산부터 서울까지, 긴 여정을 매일 40km 이상 걸어 지난달 말, 국토대장정을 마친 전요셉 목사님을 만나 인터뷰를 나누었습니다.
전요셉 목사님 가정과는 유독 따뜻하고 찬란했던 이번 가을부터 연락을 하며 인터뷰를 준비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요셉 목사님이 11월 초, 가을의 끝자락부터 11월 말 눈이 펑펑 내리고 매서운 추위가 시작된 겨울의 초입부에 국토대장정 챌린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비케이가 만난 사람들, 사랑이네
목사님, 사모님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전요셉 목사: 네, 안녕하세요. 저는 청주 오산교회라는 작은 시골 교회를 섬기고 있는 전요셉 목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상아 사모: 안녕하세요. 저는 오산교회에서 전요셉 목사 부인인 사모 이상아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요즘 시골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젊은 목사님들이 흔하지 않은데요. 어떻게 목회를 꿈꾸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 다른 장래희망은 없으셨나요?
-전요셉 목사: 어릴 적에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요, 목회자이신 조부모님, 특히 제 신앙의 뿌리이신 할머니 최복리 전도사님을 보며 청렴한 목회자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교회로 찾아올 때면, 언제나 할머니는 자신의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돈을 거저 주시고, 밥이나 음식을 대접하시고, 어떻게든 할머니가 하실 수 있는 최선의 환대를 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자란 저는 ‘종교인은 말과 행실이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과 ‘나도 저런 종교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어요. 우리 할머니 같은 ‘예수쟁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나는 목사가 되어야지.’가 아니라,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어'라는 마음을 품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살면서 다른 꿈은 품어본 적이 없어요.
청렴한 목회자가 되고 싶다고 하셨는데 목회자 앞에 붙일 수 있는 형용사가 굉장히 많잖아요. 설교 말씀을 잘 전하는 목회자, 똑똑한 목회자, 친절한 목회자, 따뜻한 목회자 등 수식할 만한 다른 형용사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청렴한’이라는 형용사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전요셉 목사: 어렸을 때부터 영향받았던 할머니의 모습, 신앙 서적에서 만난 존경하고 닮고 싶은 롤모델들, 그분들의 공통점이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올곧게 살아간다는 점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저에게 영향을 주셨던 분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을 많이 가져서 저도 그분들처럼 ‘청렴한’ 삶을 살고 싶었어요. 제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이상아 사모: 저는 남편의 청렴한 목회를 지지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전공한 음악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을 운영하여 생활비를 벌기도 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지냈어요.
신혼 초반에는 조금 힘들기도 했어요. 결혼 초기에는 남편이 교회에서 사례비를 아예 받지 않았고, 시간이 꽤 지난 후에 사례비로 50만 원을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사례비로 받은 50만 원을 다시 교회에 헌금으로 내더라고요.
남편의 모습을 보며 제 마음이 힘들거나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남편이 꿈꾸는 ‘청렴한 목회자’의 길을 계속 지지하고 싶어요. 남편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두 분의 끈끈한 사랑과 서로를 향한 응원과 신뢰가 참 보기 좋습니다. 두 분의 인연은 언제 시작되셨나요?
-이상아 사모: 목사님과는 오산교회에서 두 살 때 만났어요. 목사님은 유치원 때 제 첫사랑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요셉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이렇게 들어주셨어요.
사실 학창 시절엔, 교회 어른들께서 “너희 커서 결혼해야지” 하시며 놀리실 때마다 서로 서먹해지곤 했는데요,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고 함께 학생부 사역을 하며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어요. 그 이후로 6년을 교제했고, 유치원 때 제가 기도했던 대로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네요.
유치원 때 첫사랑과의 결혼, 영화 같은 이야기네요. 영화 같은 사랑을 하신 두 분에게는 아주 사랑스러운 따님, 사랑이가 있으시죠. 그런데 사랑이가 근육병을 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진단을 받으셨나요?
-이상아 사모: 작년 5월, 사랑이가 폐렴에 걸려 입원을 했을 때 제가 둘째를 임신 중이었어요. 그 당시 임신한 몸으로 간호했던 게 너무 힘들었는지, 둘째를 하늘나라에 보내게 됐어요. 그래서 마음도 몸도 정말 힘들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의사 선생님이 사랑이의 간 수치가 너무 높아서 정밀 검사를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후에 충북대학교 병원으로 전원을 하게 됐는데, 충북대 병원에서 근육병인 것 같다고 서울대병원으로 전원을 권유하셨어요. 저는 며칠 정도 서울대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면 완치가 되는 병일 거라고 생각해서 서울대병원에 가는 날 입원 준비를 다 해갔는데 단순한 병이 아니라고, 근육병이라고 유전자 검사를 더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남편은 그 자리에서 의사선생님이 매우 당황하실 정도로 오열을 했어요.
저는 당시에 우리 사랑이는 반드시 나을건데, 괜찮아질건데, 저는 그렇게 믿고 있는데, 속절없이 무너지는 남편을 보고 또 화를 냈어요. 남편은 이미 근육병의 다양한 질환에 대해서 증상과 예후와 생존율 등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저는 사랑이처럼 어린 아이때 부터 진행된 근육병의 증상과 예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하고, 오히려 정말 무지해서 남편을 타박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던거죠.
그날 이후로 남편이 매일 밤, 병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울었어요. 매일매일 병에 대해서 알아가며 힘들어하길래, 그만하라고, 알아보지 말라고, 멈추라고, 오히려 화를 냈어요. 병에 대해서 알고 좌절하는게 무섭고, 어차피 우리 사랑이는 치료받을 거니까, 나을 수 있으니까, 사랑이에게 밝은 에너지를 주고, 사랑이를 케어하는데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저는 오히려 병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랑이를 돌보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증상들이 자꾸 나타나니까 알 수밖에 없는 거예요.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마음속에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어요.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런 생각들이 휘몰아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결국 올해 1월, 유전자 검사 결과로 듀센근이영양증 판정을 받았고, 저는 그 날 무너졌어요. 그동안 저도 근육병에 대해 찾아보며 특히 듀센근이영양증이 매우 절망적인 질환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확진 판정을 받자 남편은 오히려 그날 안도했어요. 남편은 대부분의 근육병이 예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최근에 유전자치료제가 개발되었고 앞으로도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는 질환인 듀센이기를 바랐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사랑이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증상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이상아 사모: 요즘은 사랑이가 저에게 이런 말들을 자주 해요.
“엄마, 다리를 땅에 닿으면 뼈가 너무 아파서 힘들어요.”
“엄마,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요.”
스테로이드제를 먹으니까 철분이 부족해져서 머리가 어지럽다고 요즘 많이 말하고요.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 점프하며 뛰어노는데 사랑이는 못하니까, 그게 내심 부러운지, 뛰지 못하는 발로 자꾸 점프를 보여주려고 해요. 까치발 증상이 있기도 하고, 밤사이 다리에 경련이 나서 자다가 너무 아파하며 일어날 때도 많아요.
최근에 목사님께서 사랑이의 치료비 모금을 위한 국토대장정 챌린지를 마치셨는데요, 챌린지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전요셉목사: 국내에는 사랑이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가 없고, 최근 미국에서 개발된 유전자 치료제가 있는데 이 비용이 330만 달러(한화로 약 46억 원)에요. 사랑이를 치료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빠로서 무엇이든 해야 했어요. 사랑이가 1차 검사에서 ‘듀센근이영양증’을 진단 받았을때, 앞서서 아내가 말한 것처럼 저는 오열할 수밖에 없었어요. 구역질이 나는데 참느라 정말 힘들더라고요. ‘절망’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병에 관한 대부분의 케이스를 찾아봤는데, 예후가 다 안 좋더라고요. 근육이 점점 사라지며, 10대 무렵에는 못 걷게 되고, 20대에는 자가 호흡을 못해 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하고, 30대에는 심정지나 호흡곤란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무서운 난치병이에요.
그러나 최종적으로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땐 오히려 감사했어요. 어차피 근육병이라면, 치료제 개발이라도 활발해서 치료의 가능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듀센 영양증 치료제 개발하는 회사들, 대학교들, 연구진들에게 모두 메일을 보내고, 국제 전화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미국에서 이 질병을 완화할 수 있는 유전자 치료제가 개발되고 정식 승인을 받아서 미국에서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국토대장정을 나서기 약 2주 전 칠레의 한 어머니의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죠. 사랑이와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칠레에서 국토대장정을 하여 53억 원 이상의 후원금을 모금했고 곧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갈 계획이라는 기사였습니다.
치료제를 반드시 구한다는 마음뿐이었기에 기사를 보고 국토대장정 챌린지를 바로 실행에 옮겼어요. 처음에 제가 국토대장정 챌린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저를 정말 아끼는 친구는 혹여 제가 실망할까봐 “너, 정말 46억이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해? 아니잖아.” 하고 말하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며 망설일 시간이 없었어요. 작은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저희 가정에 46억 원에 달하는 치료비는 천문학적인 금액처럼 느껴졌고, 미국에서 개발된 유전자 치료제는 죽은 근육 세포는 살릴 수 없고, 근육 세포가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을 때 받아야 치료의 효과가 고무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랑이의 근육 세포가 하나라도 더 소실되기 전에 치료를 받아야만 해요.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어요.
주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만류했지만, 저는 포기가 안되더라고요. 제 목숨보다 귀한 제 딸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싶었어요. 저는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사랑이가 앓고 있는 병이 제게 옮겨졌으면 좋겠어요. 저는 평생 누워있어도 되고, 단명해도 좋으니까, 우리 딸 사랑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신나게 뛰놀며, 건강하게 사는 걸 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고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국토대장정 챌린지를 해서 제 몸이 소진되거나 힘든 건 걱정할 게 전혀 아니고 혹시나 46억 원이 모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어요.
저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어요. 만약 기적적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면, 저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치료비가 모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을 수 있어요. 사랑이를 치료받게 해야겠다는 생각, 지금 그 생각밖에 없어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국토대장정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전요셉 목사: 사실 고단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죠. 발가락 끝에 물집이 생겨 바늘로 찌르는듯한 통증이 한동안 걸을 때마다 있었고, 3주 차부터는 왼쪽 발목 위 인대에 염증이 생겨 걸을 때마다 발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한 밤중에 한 줌의 빛조차 비추지 않는 야산을 타기도 했었고, 황량한 국도를 걸으며 식당이나 편의점이 없어 하루 종일 멈추지 못하고 걷는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단 한 번도 고단하거나 힘들다고 생각이 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물집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발가락에 통증이 무뎌지도록 일부러 땅에 발가락을 차면서 걸었고, 발목이 끊어지는 듯한 작열감이 있어도 다리를 질질 끌면서까지 목적지에 끝내 이르렀습니다. 야산을 타다 상처를 입어 멈추지 않고 흐르는 피를 계속 마시며 길을 걸었고, 하루 종일 걸어 무릎이 붓는 날에도 그저 묵묵히 걸어갔을 뿐입니다.
이렇게까지 완주에만 집중한 이유는 단 하나, 국토대장정을 하는 이유가 오직 사랑이를 치료받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쉬면 낫습니다. 그러니 어떤 고통과 역경을 만나도 완주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사랑이만 치료할 수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가 강하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강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저를 지지하고 응원하며 온정을 보내주는 소중한 가족들, 지인들, 그리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소중한 인연들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사람이 홀로 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절실히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직접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전해드려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하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요즘 두 분께 가장 힘과 위로가 되는 것이 있나요?
-전요셉 목사: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이에요. 제가 목사니까 또 목사 입장에서, 신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그 말씀을 보면 ‘문제가 있는데 눈 가리고 그냥 걱정하지 마’ 이런 뜻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한 당사자인 바울이 소망이 다 끊겼어요. 사형 선고를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자기가 계획한 플랜 A, B 모두 물거품이 되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이제 곧 죽게 생겼는데 할 수 있는 거라곤, 염려하는 것 밖에 없죠. 하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저, 염려 안 하는 거 도와주세요.”
이 말씀이 저에게 매우 큰 공감과 위로가 됩니다.
국토대장정을 걸으면서 진정 힘들었던 것은 사실 고단한 몸이 아니라 낙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최종 목적지에 가까이 갈수록 '아, 이제 끝나는구나'가 아니라 '아직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대로 끝나면 안 되는데...'라는 두려운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마음에 잠식된 채 멈춰 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사랑이의 치료를 향한 길을 열어달라고, 사랑이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크게 더해달라고요.
-이상아 사모: 저는 요즘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시며, 저희 가정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함께 해주시는 분들이 너무 위로가 되고 그분들께 정말 감사드려요. 사랑이를 보며 좌절하면 안 되는데 아픈 아이를 케어하다 보니 힘들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저희랑 함께해 주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엄청난 위로를 받고 있어요.
저는 이제껏 교회 사모로서 교인분들을 섬기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너무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그동안 너무 잘못 생각했었다는 것을 요즘에 깨달아요.
그저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된다는 걸 이제서야 배웠어요.
힘든 사람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사랑은 이렇게 주고 받는 것이더라고요.
📝Epilogue
저는 마냥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큰 질환을 앓는 걸 볼 때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예쁘고 천사같은 아이들이 도대체 왜 아픈 걸까요. 왜 어른도 겪기 힘든 아픔을 겪어야만 할까요.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살아생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의 아픔과 어려움에 함께 눈물을 흘리고,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을 기꺼이 나누어주고, 타인의 평안을 온 마음으로 간절히 바란다는 것, 그 또한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아요.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세상살이에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내 것을 친히 나누어주는 것,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일 겁니다.
살아가다보면 우리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일들이 말도 안 되게 일어나지만, 어쩌면 우리는 그보다 더 말도 안되는 위로로, 더욱 말도 안되는 사랑으로, 더더욱 말도 안되는 기적으로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세상을 밝은 빛으로,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더욱 말도 안되는 위로와 사랑과 기적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 끝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나 홀로 매서운 추위와 차디찬 눈보라를 맞는다면, 우리는 금방 쓰러지고 말 거예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벅차도록 무거워 앞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이내 주저앉아 버릴 테지요.
그러나 내 옆에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그 이상이 나와 함께 한다면 서로의 따뜻한 온기로 매서운 추위도, 차디찬 눈보라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겁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로의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거에요. 인생은 그렇게 함께 나아가는 것이겠죠. 전요셉 목사에게 인생의 '본보기'가 되었던 최복리 전도사님처럼 말입니다.
국내에는 '듀센 근이영양증'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가 없으며 미국 내에서 이 질환을 완화할 수 있는 유전자 치료제가 개발되었지만 46억 원의 큰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요셉 목사는 얼마전 진행한 국토대장정 챌린지에서 약 17억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이 모금액도 엄청난 금액이지만, 아직 사랑이의 치료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의 작은 호의가 누군가에겐 ‘나는 당신 편이에요’라는 말로 들린 적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해서 평범하지만, 평범한 우리도 선의의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아주 짧은 순간 위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작은 나눔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위로하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만한 세상으로, 그리하여 기꺼이 함께 웃으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구독자님이 사랑이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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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전요셉 목사와 이상아 사모와 인터뷰를 나누던 중, 사랑이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이 이름의 의미는 '많은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널리 전하라'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사랑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나 자신이 받은 사랑을 많은 이들에게 나누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그려봅니다.
✍🏻이번 주 문장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따스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서로에게 상냥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 아닐까.
<최소한의 선의>
내가 외로움으로 풀이 죽거나 슬픔으로 강퍅해지지 않은 건 타인이 보여준 ‘조건 없는 호의’ 덕분이다. 내가 예전보다 튼튼한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면 그건 모두 타인이 내게 건넨 크고 작은 선물과 편지, 애정 덕분이다.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
온 마음을 다해 살아온 당신아 또 좋아질거라 믿어야 한다. 좋아지고 좋아지면서 결국 다 좋아질거라 믿어야 한다. 지금은 많이 아픈 것 같지만 잠시뿐일 거라고 오늘처럼 힘겨운 날들을 지나 보내야만 더욱 단단한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거쳐야만 하는 시련이라고. 그렇게 기뻐질 내일을 믿어야 한다.
<행복할거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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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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