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대학의 문을 부순 사람들

세계 최초의 방통대가 영국에서 탄생한 이유

2026.06.13 | 조회 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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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971년 1월의 어느 새벽, 영국 곳곳의 집집마다 텔레비전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시계는 아직 오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화면 속에 펼쳐진 것은 드라마도, 아침 뉴스도 아니었다. 강의실 대신 스튜디오가 나타났고, 교수는 칠판 앞에 서서 조용히 강의를 시작했다.

텔레비전 앞에는 저마다 다른 삶의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졸린 눈을 비비는 이도 있었고, 어린아이를 무릎에 안은 채 귀를 기울이는 어머니도 있었다. 밤새 공장에서 일하고 막 귀가한 노동자는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고 수업을 들었다. 그들이 텔레비전을 켠 이유는 유희도, 세상 소식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배움을 위해서였다.

그날은 영국 개방대학(Open University)의 첫 수업이 전파를 탄 날이었다. 대학 교육을 누구에게나 열어주겠다는 새로운 실험의 시작이었다. 당초 학교 측은 2만 명 정도가 등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 등록자는 2만 5천 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었다. 집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대학 강의를 듣는다는 것, 나이와 직업, 형편에 상관없이 배움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절하고도 특별한 희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대학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1960년대 영국의 대학이 어떤 곳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학은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교육의 길로 여겨지지만, 당시의 현실은 달랐다. 1960년대 초 영국에서 대학에 진학한 고등학교 졸업생은 전체의 8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머지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은 대학의 문턱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서, 생계를 위해 곧바로 일을 시작해야 해서, 나이가 많아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기회를 얻지 못해서, 혹은 어린 시절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서였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대학으로 향하는 문이 그들에게는 열려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시절, 스코틀랜드의 한 탄광촌에서 자란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 리(Jennie Lee)였다.

광부의 딸로 태어난 제니 리는 공부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섰다. 에든버러대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이 되었고, 훗날 웨일스 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어나이린 베번(Aneurin Bevan)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의 삶은 교육이 한 사람의 운명을 얼마나 멀리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래서 제니 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대학에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그들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녀가 바라본 영국에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 전쟁을 겪고 돌아온 퇴역군인, 어린 시절 학교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들은 대학 캠퍼스에 없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만큼은 누구보다 컸다. 그리고 제니 리는 그 갈증을 외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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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리. 출처: not credited(Life time: not applicable) - Original publication: 30/3/1929 Illustrated London NewsImmediate source: Illustrated London News Digital Archive, subscription or UKlibrary card required, Public Domain

 

원격으로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의 꿈

 

개방대학의 역사는 한 정치인의 상상에서 시작됐다.

1963년 9월, 노동당 대표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은 글래스고에서 열린 연설에서 처음으로 ‘원격 대학(University of the Air)’이라는 구상을 세상에 내놓았다. 대학 강의가 캠퍼스의 강의실에만 머물 필요는 없다는 발상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배움이 사람들을 찾아가게 하자는 생각, 지식이 담장을 넘어 가정의 거실까지 스며들게 하자는 꿈이었다.

당시는 텔레비전이 영국 가정에 빠르게 보급되던 시기였다. 윌슨은 새로운 기술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듬해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자, 윌슨은 제니 리를 초대 예술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그녀에게 맡겼다. 세계 최초의 원격대학을 만드는 일. 탄광촌의 광부 딸로 태어나 교육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바꾼 여성이 이제는 수만 명의 삶을 바꿀 교육기관을 설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꿈은 시작부터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기존 대학들은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정규 입학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학 교육을 제공한다는 발상은 학문의 수준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학은 선별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믿음이 여전히 강했다.

냉소는 학계 밖에서도 이어졌다. BBC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 한 간부는 이 계획을 두고 “1930년대의 우울한 사회주의 안개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온 역사적 화석”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일부 교수들은 유망한 대학원생들에게 조용히 충고했다. 오픈 유니버시티에는 가지 말라고. 미래가 없는 기관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제니 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프로젝트가 시작된 순간부터 단 하나의 원칙을 고집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교육의 수준을 낮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오픈 유니버시티가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차선책’으로 남는다면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다른 대학보다 열등한 교육을 제공하는 임시방편적인 대학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픈 유니버시티의 목적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배움의 문은 넓게 열되, 학문의 기준은 결코 낮추지 않는다. 오픈 유니버시티를 관통하는 정신은 바로 그 문장 속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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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윌슨이 원격 대학(University of Air)에 대한 구상을 발표한 1963년 연설 (연설 보기 링크)

 

TV 속의 교수들

 

1969년 4월 23일, 개방대학 마침내 왕실 칙허장을 받았다. 수년간의 논쟁과 회의, 그리고 수많은 회의적인 시선을 견뎌낸 끝에 대학으로서의 공식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리고 1971년 1월, 역사와 과학, 수학, 사회과학, 기술 분야의 첫 강좌들이 일제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 대학에는 캠퍼스의 종탑도, 학생들로 붐비는 강의동도 없었다.

대신 배움은 학생들의 집을 찾아갔다.

먼저 인쇄된 교재가 우편으로 배달됐다. 학생들은 책상 위에 교재를 펼치고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정해진 시간에는 BBC가 제작한 강의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방송됐다. 그리고 전국 곳곳에 배치된 튜터들이 지역 학습센터에서 학생들을 만나 질문을 받고 토론을 이끌었다. 종이 위의 글, 전파를 타고 흐르는 강의,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 이 세 가지가 겹겹이 연결되며 개방대학만의 독특한 교육 방식이 만들어졌다.

특히 새벽 시간대에 편성된 텔레비전 강의는 영국 사회의 특별한 풍경이 되었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아침, 학자들은 스튜디오의 칠판 앞에 서서 강의를 시작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설명하기도 했고, 중세 건축의 역사를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별과 행성의 움직임을 풀어내기도 했다. 1970년대 특유의 화려한 넥타이와 넓은 칼라 셔츠 차림의 교수들이 화면 속에서 열정적으로 수업을 이어가는 모습은 당시 영국인들에게 낯설면서도 매력적인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그 강의를 만났다.

누군가는 출근 전 이른 아침에 텔레비전을 켰고, 누군가는 하루 일을 마친 뒤 늦은 밤까지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방송 시간을 놓친 사람들은 비디오에 녹화해 두었다가 주말에 몰아서 시청했다.

그렇게 영국 곳곳의 평범한 집들이 작은 강의실이 되었다.

탄광에서 일한 뒤 졸업 논문을 쓰는 광부가 있었고, 야간 근무를 마친 뒤 학위를 준비하는 간호사가 있었다. 세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수학 문제집을 펼쳤다. 낮에는 직장인이고 부모였으며 노동자였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다시 학생이 되었다.

개방대학이 가장 먼저 손을 내민 이들 가운데에는 장애인도 있었다.

신체적 제약 때문에 캠퍼스를 오갈 수 없었던 사람들,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만성 질환으로 정규 대학 생활이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개방대학은 처음으로 열린 대학의 문이었다. 교육은 더 이상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사람들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그 문은 교도소 담장 안까지 이어졌다. 수감자들 역시 개방대학 과정을 수강할 수 있었다. 자유를 잃은 사람들에게도 배움만큼은 닫히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쩌면 개방대학의 가장 큰 혁신은 텔레비전 강의나 우편 교재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생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들, 대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에게도 "당신 역시 학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한 것이야말로 이 대학의 진정한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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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대학에 수여된 왕실칙허. 출처: Daniel Weinbren - http://www.open.ac.uk/blogs/History-of-the-OU/?p=2689, CC BY-SA 4.0

 

입학 자격이 없는 것이 자격인 대학

 

개방대학의 가장 혁명적인 원칙은 의외로 단순했다.

입학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괜찮았다. 나이가 많아도 상관없었다. 성적표를 제출할 필요도, 추천서를 받아올 필요도, 면접관 앞에서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개방대학은 스스로를 "사람에게, 장소에, 방법에, 그리고 아이디어에 열려 있는 대학(Open to people, places, methods and ideas)"이라고 선언했다.

그곳에서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대학은 오랫동안 누군가를 선발하는 기관이었다. 문을 열기보다 문을 지키는 일에 익숙했다. 누가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대학의 역할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개방대학은 정반대의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은 능력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이 질문은 기존 대학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입학시험도, 학력 요건도 없이 학생들을 받아들였는데도 수준 높은 교육이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선발 과정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자랑해 온 엄격한 입시 제도는 과연 필수적인 것이었을까.

개방대학은 단순히 새로운 대학이 아니었다.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존재였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할 실험이라고 말했다. 학문적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결국 ‘2류 대학’으로 남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우려는 하나씩 빗나가기 시작했다.

개방대학의 학위는 다른 대학의 학위와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았고, 졸업생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했다. 취업률과 사회적 성취 역시 전통적인 대학 출신들과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장과 가정, 삶의 책임을 병행하며 학업을 완주한 이들의 끈기와 실무 경험은 많은 곳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입학할 때는 아무런 자격을 요구받지 않았지만, 졸업할 때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성취를 증명해야 했다.

개방대학은 사람들을 시험해서 선발하지 않았다. 대신 교육의 기회를 먼저 내어주고,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하게 했다.

어쩌면 개방대학이 뒤집으려 했던 것은 입시 제도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잠재력은 처음부터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만났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믿음. 그 믿음이야말로 개방대학이 세상에 남긴 가장 근본적인 유산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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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개방대학교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 출처: The Open University - https://www.open.ac.uk/library/digital-archive/image/image:c4e84d132f9a3eda4b1610ce1157f7255b5db7e1, Fair use

 

한국에 닿은 개방대학의 씨앗 

 

개방대학의 성공은 곧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캠퍼스에 가지 않아도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발상은 세계 각국의 교육자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대학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학문의 수준은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여러 나라가 영국의 실험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방대학의 모델은 국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한국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1972년,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이 문을 열었다. 영국 개방대학이 첫 학생을 받은 지 불과 1년여, 정식 개교 기준으로도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처음에는 2년제 과정으로 출발했지만, 1982년 서울대학교에서 독립하며 4년제 국립대학으로 성장했다. 오늘날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약 9만 명이 넘는 학생이 공부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연결이다.

스코틀랜드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한 소녀가 있었다. 교육의 기회를 얻어 자신의 삶을 바꾼 그 소녀는 훗날 모든 사람에게 대학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그 꿈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대학을 탄생시켰다.

개방대학이 남긴 유산은 한 대학의 성공에 그치지 않았다.

인도의 인디라 간디 국립개방대학교, 중국의 중국개방대학, 일본의 방송대학, 그리고 한국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이름과 제도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 모두는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배움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개방대학은 그 질문에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대학은 특정한 나이의 사람들만을 위한 곳도,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곳도 아니라는 것. 배움은 캠퍼스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닿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1년 새벽, 영국의 평범한 가정집에서 시작된 텔레비전 강의는 그렇게 세계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가 온라인 강의와 원격 수업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된 것 역시 어쩌면 그때 뿌려진 작은 씨앗 덕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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