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빌 하이츠는 브리스틀에서도 손꼽히는 주거 지역이다. 정원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고, 창문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웃들은 길에서 마주치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의사와 변호사, 그리고 대대로 학문과 전문직에 종사해 온 가문들이 이곳에 산다. 집들은 크기도 비슷하고, 외관도 비슷하며, 하나같이 세심한 손길로 관리되고 있다.
처음 이 동네를 찾은 사람이라면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적어도 이곳에서는 끔찍한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작가 리사 주얼은 바로 그 믿음에서 소설 『엿보는 마을』 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러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믿음을 무너뜨린다.
소설의 배경인 멜빌 하이츠와 같은 동네, 즉 영국의 교외(suburb)는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영국 중산층이 꿈꾸고, 설계하고, 현실로 만들어 온 하나의 이상향이다. 번잡한 도시의 소음과 가난, 범죄와 혼란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곳. 깨끗하고 안전하며,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 영국의 교외는 오랫동안 성공과 안정, 그리고 ‘좋은 삶’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모든 이상향에는 그림자가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왜 수많은 영국 소설과 스릴러가 이런 교외를 배경으로 삼는지, 또 왜 그토록 자주 평온한 거리 뒤에 숨겨진 불안과 비밀을 파헤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교외라는 꿈의 탄생
19세기 초의 런던은 거대한 혼돈의 도시였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장 굴뚝에서는 끊임없이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하수 시설은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했다. 좁은 골목에는 빈곤과 질병이 뒤엉켜 있었고, 도시 전체는 소음과 매연 속에서 숨 가쁘게 움직였다.
이런 런던에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조금씩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일은 하되, 도시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꿈이었다.
처음에는 마차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의 마을들이 선택됐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철도망이 급속히 확장되면서 그 꿈은 더욱 현실이 됐다. 이제 사람들은 직장은 런던에 두고도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 수 있게 됐다.
영국의 교외는 그렇게 태어났다.
처음에는 상인과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계층이 도심을 떠나 교외에 정착했다. 이후 철도가 촘촘하게 연결되면서 사무직 노동자와 하위 중산층도 차례로 그 흐름에 합류했다. 교외는 단순한 주거지라기보다 새로운 생활방식의 상징이 되어갔다.
교외가 제공한 것은 단지 넓은 집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도시가 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깨끗한 공기, 작은 정원, 조용한 거리,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사는 이웃들.
도시는 노동의 공간이었고, 교외는 삶의 공간이었다.
남성들은 아침이면 기차를 타고 도시로 향해 일했고, 저녁이면 다시 교외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더 이상 단순히 잠을 자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쟁과 소음, 위험과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주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영국 중산층은 이러한 이상을 한 단어로 표현했다.
바로 ‘홈(Home)’ 이다.
한국어의 ‘집’과 비슷해 보이지만,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홈은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가족, 안정, 품위, 사생활, 그리고 사회적 성공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좋은 집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편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가치관은 교외의 건축 양식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빅토리아 시대의 교외에는 일종의 주택 서열이 존재했다.
가장 흔한 형태는 테라스 하우스(terraced house) 였다. 여러 채의 집이 벽을 맞대고 길게 이어지는 구조로, 각 가구가 독립된 집을 소유하지만 양옆 이웃과 벽을 공유했다.
그보다 한 단계 위에는 세미디태치드(semi-detached) 하우스가 있었다. 두 채의 집만 하나의 벽을 나누는 구조로, 더 넓은 공간과 사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산층의 성공을 상징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위치에는 디태치드(detached) 하우스, 즉 완전히 독립된 단독주택이 있었다. 사방이 이웃과 떨어져 있는 이 집은 많은 영국 중산층이 꿈꾸던 최종 목적지였다.
그래서 영국에서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어떤 집에 사는지는 곧 자신이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사람들은 집의 크기와 정원, 외관과 위치를 통해 서로의 배경과 지위를 읽어냈다.
영국의 교외는 단순히 도시 밖에 지어진 주택단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질서와 안정, 그리고 중산층의 이상이 벽돌과 정원으로 구현된 하나의 사회적 풍경이었다.
영국에서 일반적인 테라스 하우스의 모습. 출처: Dai O'Nysius, CC BY-SA 3.0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는 동네
하지만 영국의 교외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모순이 숨어 있었다.
사람들은 교외로 이주하면서 평온과 사생활을 원했다. 도시의 소음과 혼란에서 벗어나 조용한 삶을 꿈꿨다. 그러나 정작 교외가 만들어낸 것은 완전한 고독이 아니라, 서로를 끊임없이 의식하는 공동체였다.
거리를 따라 비슷한 집들이 늘어서 있고, 비슷한 직업과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 이러한 균질함은 안정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감시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누구의 정원이 가장 잘 가꿔져 있는지.
누구의 집 앞에 새 차가 들어왔는지.
어느 집의 불이 평소보다 늦게 꺼졌는지.
새로 이사 온 사람은 누구인지.
교외에서는 이런 정보들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유된다.
집 안은 사적인 공간이지만, 집 밖의 삶은 늘 이웃들의 시선 안에 놓여 있다. 그래서 교외의 프라이버시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절반쯤만 허락된 것이었다.
영국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문화를 흔히 ‘체면 유지(keeping up appearances)’ 라는 말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 삶이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이다. 집은 단정해야 하고, 정원은 잘 관리돼야 하며, 가족은 안정적이고 성공적으로 보여야 한다. 이웃들과 비교해 지나치게 뒤처져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도 안 된다.
영국 교외는 오랫동안 이러한 미묘한 균형 위에서 유지돼 왔다.
이 문화를 가장 유명하게 풍자한 작품이 BBC 시트콤 『Keeping Up Appearances』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방영된 이 작품의 주인공 하이어신스 버킷(Hyacinth Bucket)은 교외 중산층의 체면 의식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인 Bucket을 평범한 영어 발음인 ‘버킷’이 아니라, 더 우아하고 상류층처럼 들리는 ‘부케(Bouquet)’라고 불러야 한다고 고집한다. 언제나 품위 있어 보이고 싶어 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조금이라도 더 높게 보이게 만들기 위해 애쓴다.
영국 시청자들이 이 캐릭터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녀가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자신의 이웃을 떠올렸고, 때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웃음의 대상은 하이어신스였지만, 사실 그 웃음 속에는 교외 문화 전체에 대한 은근한 자조가 담겨 있었다.
리사 주얼의 『엿보는 마을』 속 멜빌 하이츠 역시 바로 이런 세계 위에 세워져 있다.
이웃들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서로를 관찰한다. 누가 이사 왔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떤 가족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들은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새로 이사 온 톰 피츠윌리엄이 등장하는 순간, 동네 전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쏠린다.
그는 잘생겼고, 성공했고, 학교의 교장(super head)이라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을 가졌다. 교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처럼 보인다.
체면과 평판을 중시하는 동네에서, 가장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리사 주얼은 바로 그 순간 독자에게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만약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는 거리에서 가장 끔찍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어떨까.
영국 교외 스릴러의 많은 이야기들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다.
『Keeping Up Appearances』 의 등장 인물들. 가운에 중앙에 앉아 있는 여성이 주인공 하이어신스 버킷을 연기한 영국 배우 패트리샤 라우틀리지(Patricia Routledge)다. 출처: [1] from blogspot.co.uk., Fair use
영국 문학이 사랑한 공간
하지만 영국 문학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완벽해 보이는 집과 단정한 거리, 예의 바른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반드시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18세기 말, 『오트란토 성(The Castle of Otranto)』을 발표한 호러스 월폴(Horace Walpole) 이후 영국 문학은 수백 년 동안 하나의 질문을 반복해 왔다. 겉으로 보이는 질서와 아름다움 아래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는가.
이것은 영국 고딕 문학의 가장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다.
고딕 소설 속에는 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이 보는 세계와 보지 못하는 세계. 화려한 저택과 점잖은 신사, 아름다운 정원과 정돈된 일상 뒤에는 종종 감춰진 비밀과 억압된 욕망,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어둠이 숨어 있다.
어쩌면 영국 고딕이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영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품위와 절제, 그리고 체면을 중요하게 여겨 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갈등을 공개적으로 표출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괜찮은 것처럼 행동하는 문화. 영국 작가들은 오래전부터 그 단정한 표면 아래 무엇이 눌려 있고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 관심은 수많은 고전 속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제인 에어( Jane Eyre ) 』에서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는 로체스터의 저택 쏜필드 홀(Thornfield Hall) 다락방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비밀을 숨겨 두었다. 점잖고 품위 있어 보이는 집 안에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미친 아내가 존재한다.
『레베카( Rebecca ) 』에서 다프네 듀 모리에(Daphne du Maurier) 맨덜리 저택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비밀로 만든다. 아름답고 우아한 공간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표면의 품위와 내면의 어둠.
영국 소설은 이 구도를 수없이 반복해 왔다.
다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무대가 바뀌었다.
예전의 고딕 소설이 성(城)이나 대저택을 배경으로 했다면, 현대 작가들은 그 무대를 교외의 주택가로 옮겨 놓았다. 귀족의 성 대신 세미디태치드 하우스가, 가문의 비밀 대신 평범한 가정의 비밀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문학 연구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흔히 ‘서버번 고딕(Suburban Gothic)’ 이라고 부른다.
잘 가꿔진 정원. 반짝이는 창문. 예의 바른 이웃들.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정폭력과 거짓말, 억압된 욕망, 무너져가는 관계, 그리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 비밀이 존재한다.
교외가 완벽한 삶의 상징일수록, 그 완벽함이 무너질 때의 충격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 서버번 고딕은 단순히 범죄를 다루는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영국 사회가 오랫동안 믿어온 이상 자체를 해부하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투 업 투 다운(two-up two-down)’ 테라스 하우스의 구조도. 위층에 방 두 개, 아래층에 방 두 개가 배치되어 있으며, 뒤편에는 작은 마당(yard)과 실외 화장실이 마련돼 있다. 출처: By MjolnirPants - Drawn in AutoCAD civil 2016, Public Domain
리사 주얼 역시 이 전통 위에 서 있는 작가다.
『엿보는 마을』뿐 아니라 그녀의 많은 작품은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야기는 대개 안전하고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독자는 한 겹씩 표면을 벗겨내며 그 아래 숨어 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리사 주얼이 반복해서 같은 공간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녀는 여러 인터뷰에서 집과 가족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이 낯선 곳이 아니라 바로 그 공간에서 발견될 때 공포는 더욱 커진다. 그리고 그 위험이 오랫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독자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결국 『엿보는 마을』이 무서운 이유는 연쇄살인범 때문만이 아니다.
그 소설은 독자에게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곳은 정말 안전한가.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가.
영국 고딕 문학은 250년 넘게 같은 질문을 던져 왔다. 리사 주얼은 단지 그 질문을 현대의 교외 주택가로 옮겨왔을 뿐이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들
- 우리는 어떤 삶을 이상적이라고 여기는가. 그리고 그 이상에 가까워지려 할 때, 우리는 무엇을 감추게 되는가. 완벽해 보이려는 욕망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숨기게 만드는 역설을 당신의 삶 속에서 본 적이 있는가.
- 영국의 교외 테라스 하우스와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살며 서로를 의식하는 구조는 닮아 있다. 당신이 사는 공동체에서 '체면 유지'의 문화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가, 아니면 진짜 관계를 막는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Blur – 'Charmless Man' (1995) 블러의 데이먼 알반은 브릿팝 시대에 영국 중산층 문화를 가장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러나 가장 냉소적으로 포착한 음악가다. 이 곡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 매력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지만, 그 표면 아래는 공허하다. 그 모습이 소설 속 톰 피츠윌리엄의 이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다음화 예고
멜빌 하이츠의 주민들이 톰 피츠윌리엄을 처음 만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저 사람은 뭔가 다르다고.
그는 단순한 교장이 아니다. 영국 언론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으로는 ‘슈퍼헤드(Superhead)’ 다. 위기에 빠진 학교를 되살리는 스타 교장. 성적이 바닥을 치는 학교에 부임해 짧은 시간 안에 학업 성취도를 끌어올리고, 무너진 학교 문화를 재건하며,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사람이다.
교육 당국은 그를 원하고, 학부모들은 그를 신뢰하며, 이웃들은 그를 존경한다. 그는 어디서든 자신감이 넘치고,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영국 사회가 열광하는 이 슈퍼헤드(Superhead) 라는 존재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3화에서는 영국 교육 시스템의 역사를 따라가며 그 답을 찾아본다.
19세기, 이턴 칼리지(Eton College) 와 해로 스쿨(Harrow School) 같은 명문 사립학교가 지배층을 재생산하던 시대부터 시작해, 1944년 교육법 이후 등장한 그래머 스쿨(Grammar School) 체제, 그리고 1980~90년대를 거치며 교육이 성과와 경쟁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까지.
그 흐름 속에서 영국 사회는 점차 한 가지 새로운 영웅상을 만들어냈다.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침체된 조직을 단기간에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 평범한 관리자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을 가진 카리스마적 지도자.
바로 슈퍼헤드(Superhead) 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왜 영국 사회는 이토록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원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이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엇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걸까.
『엿보는 마을』 속 톰 피츠윌리엄은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는 친절하고, 유능하며, 성공적이다.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독자에게 불편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은 정말 안전한 사람일까. 혹은 모두가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는 사람일까.
영국 교육의 역사와 사회는 이미 여러 차례 그 질문과 마주해 왔다.
다음화에서는 바로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