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5일, 영국 켄트주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제106대 대주교 취임식이 열렸다. 세라 멀랠리(Sarah Mullally)가 그 자리에 섰다. 영국 성공회 15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최고 성직자의 자리에 오른 순간이었다. 전 세계 언론이 이 장면을 보도했고, 많은 이들이 “마침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그 ‘마침내’라는 말은, 단지 현재의 성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쌓여온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시도와 저항을 함께 불러낸다.
그 대성당의 돌바닥 아래에는 수백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왕들의 즉위와 몰락, 종교개혁의 격랑, 그리고 신앙을 둘러싼 수많은 갈등과 타협이 그 안에 스며 있다. 겉으로는 고요한 공간이지만, 그 아래에는 한때 불타올랐던 질문과 두려움, 그리고 결단의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세월 중 어딘가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묻혀 있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불태워진 남자.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의 이야기다.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은 영국 잉글랜드 켄트주 캔터베리에 있는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심지이다. 597년 성 아우구스티누스 또는 어거스틴이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여 영국 성공회의 본산이 될 대성당을 건설했다. 이 교회는 1067년과 1174년에 두 차례나 불에 타 그때마다 재건되었다. 그 후에도 종교개혁 시기인 1538년 헨리 8세에 의해, 1942년에는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출처: By Hans Musil - Picture taken and postprocessed by Hans Musil., CC BY-SA 4.0
“영어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범죄였던 시대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을 자국어로 읽는 일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심지어 개인의 신앙을 깊이 있게 만드는 기본적인 행위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6세기 영국을 들여다보면, 그 익숙한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그때의 ‘읽기’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때로는 생명을 담보로 한 선택이었다.
중세 말과 근세 초의 영국 사회에서 성경은 라틴어로만 존재하는 신성한 텍스트였다. 라틴어는 일반 민중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고, 자연스럽게 성경의 해석 권한은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집중됐다. 신의 말씀은 존재했지만, 그것은 ‘직접 읽는 진리’가 아니라 ‘들려주는 진리’였다. 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낭독되는 말씀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질서를 제도적으로 굳힌 것이 1408년 제정된 ‘옥스퍼드 헌법’이다. 이는 교회의 허가 없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거나 읽는 행위를 금지한 법으로, 이를 어길 경우 이단으로 간주되어 중형, 심지어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신앙의 언어를 통제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규율이 아니라, 지식과 해석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 억압의 무게는 기록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1519년, 한 여성과 여섯 명의 남성이 자녀들에게 영어로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화형당했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오늘날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기도의 문장이었지만, 당시에는 금기를 어긴 위험한 지식이었다. 그 불길은 단순히 사람을 태운 것이 아니라, ‘말씀을 스스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이 시대의 영국에서 언어는 곧 권력이었다.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은 특정 계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보고였고,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이들만이 신의 뜻을 해석할 수 있었다. 반대로, 영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순간, 그 권력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누구나 읽고, 질문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교회는 질서를 유지하려 했고, 그 질서는 ‘해석의 독점’을 기반으로 유지되었다. 반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던 이들은 신의 말씀이 특정 언어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충돌의 한가운데에는, 그 질서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들이 있었다.
중세 영국에서 제작된 라틴어 필사 성경, Lyghfield 성경. 인쇄술 이전에 손으로 쓰고 장식한 성경 사본 중 하나다. 출처: https://www.dreweatts.com/auctions/lot-details/?saleId=14109&lotId=81, Public Domain
케임브리지 출신의 언어 천재, 불가능한 꿈을 꾸다
16세기 초 영국, 지식과 신앙이 여전히 분리되어 있던 시대에 한 인물이 등장한다. 윌리엄 틴들. 그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었다. 언어를 통해 세계를 해부하듯 이해하던, 드문 종류의 학자였다.
틴들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당시 케임브리지는 유럽 대륙에서 불어오는 새로운 사상, 특히 종교개혁의 초기 흐름이 조용히 스며들던 공간이었다. 그는 그 변화의 공기를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한 인물이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비롯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 단순히 여러 언어를 아는 수준을 넘어, 성경 원문을 직접 읽고 비교하며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점에서 틴들은 기존 성직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해석을 전달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해석의 근원을 직접 다루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틴들의 시선은 학문적 성취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지식이 특정 계층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문제로 보았다. 그의 꿈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면서도 급진적이었다.
“밭을 가는 소년이라도 성경을 이해하게 하겠다.”
이 말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당시 사회 질서를 정면으로 흔드는 선언이었다.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권한은 곧 권력이었고, 그 권력을 평민에게 나누겠다는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틴들의 초상화. 출처: Public Domain
틴들은 이를 제도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그는 런던으로 향해 커스버트 턴스털 주교를 찾아갔다. 공식적인 번역 허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교회는 여전히 성경을 통제된 언어 안에 두고자 했고, 틴들의 시도는 그 틀을 벗어난 것이었다.
허가가 막히자 그는 길을 바꿨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곧 망명으로 이어졌다.
1524년, 틴들은 영국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당시 독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곳으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확산되고 있었다. 틴들은 이곳에서 런던 상인들의 비밀스러운 지원을 받아 번역 작업을 이어갔다. 국가와 교회가 금지한 일을 국경 밖에서 계속한 것이다.
그의 신약성경은 1525년 쾰른에서 처음 인쇄되기 시작했지만, 당국의 압력으로 중단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인쇄소를 옮겨 보름스에서 결국 완성본을 출판한다. 활판 인쇄술이 막 확산되던 시대였고, 책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틴들은 그 흐름을 이용했다.
완성된 성경은 1526년부터 영국으로 은밀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항구를 통해, 상인의 짐 속에 섞여, 때로는 옷감과 함께 말려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금지된 텍스트였다. 곧바로 금서로 지정됐고, 발견되는 즉시 압수되어 불태워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금지의 중심에 있던 왕의 태도였다. 헨리 8세는 틴들의 성경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다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틴들을 설득하려 했다. 자신의 이혼 문제를 정당화할 신학적 논리가 필요했던 왕에게, 틴들의 지식은 매우 매력적인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봉급과 안전한 귀국을 약속했다. 체제에 맞서던 망명자에게 체제 내부로 돌아올 기회를 제시한 셈이다.
그러나 틴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다. 성경을 누구의 손에 맡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다. 권력의 도구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 것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1525년 윌리엄 틴들이 번역한 신약성경에서,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 출처: Peter Schöffer (printer); William Tyndale - British Library Board, Public Domain
친구의 배신, 그리고 화형대
망명 이후의 삶은 길고도 불안정했다. 윌리엄 틴들은 몇 해에 걸쳐 도시를 옮겨 다니며 번역을 이어갔다. 이름을 숨기고, 인쇄소를 바꾸고, 때로는 도움을 주던 이들과도 거리를 둬야 했다. 그의 작업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를 추적하는 눈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균열이 생긴다. 그를 넘긴 이는 헨리 필립스였다. 틴들이 신뢰했던 인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틴들을 식사 자리로 유인한 뒤,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그의 위치를 알렸다. 긴 도피의 끝은 그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1535년, 틴들은 현재의 벨기에 지역인 브뤼셀 외곽에 위치한 빌보르드 성에 수감된다. 두꺼운 성벽 안에서 그는 거의 1년 가까이 갇혀 지냈다. 겨울의 추위와 고립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글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경 원문과 따뜻한 옷을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번역을 멈추지 않겠다는, 조용하지만 완강한 의지였다.
이듬해, 그는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 재판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가 저지른 죄는 단 하나였다. 성경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옮기려 했다는 것.
형벌은 당시 이단자에게 내려지던 방식 그대로 집행됐다. 그는 화형대에 묶인 채 먼저 교수형을 당했고, 이어 그의 시신이 불태워졌다. 불길은 육체를 태웠지만, 그가 옮긴 문장들까지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한 문장을 남긴다.
“주님,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
그 기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래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된다.
불과 3년 뒤, 헨리 8세는 영국 전역의 모든 교구 교회에 영어 성경을 비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신의 말씀이 더 이상 라틴어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성경의 대부분은, 바로 틴들의 번역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한 인간이 목숨을 걸고 옮긴 문장이, 결국 그를 처형한 권력의 이름으로 공식화된 셈이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뒤늦게 도착한 시작에 가까웠다.
교수형을 당한 뒤 화형에 처해지기 전 윌리엄 틴들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외쳤다. 출처: John Foxe - The Horizon Book of the Elizabethan World (which credits the Folger Shakespeare Library), American Heritage / Houghton Mifflin, 1967, p. 73, Public Domain
그의 언어는 죽지 않았다
죽음은 그의 육체를 멈추게 했지만, 그의 언어까지 사라지게 하지는 못했다. 윌리엄 틴들이 남긴 것은 단순한 번역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후 영어라는 언어가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방식에 깊이 스며든 하나의 기초였다.
1611년 출간된 킹 제임스 성경은 영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텍스트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왕의 권위 아래 편찬된 이 성경은 오랜 세월 영어권 세계의 표준 번역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문장의 상당 부분은 이미 틴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의 번역은 수정되고 다듬어졌을 뿐, 그 핵심적인 표현과 리듬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 점은 단순한 문헌학적 사실을 넘어선다. 틴들이 선택한 단어와 문장 구조는 이후 영어의 감각 자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번역은 학자들의 책상 위에 머무르지 않고, 설교를 통해, 낭독을 통해, 그리고 일상의 언어 속으로 스며들었다. 성경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의 텍스트가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언어가 되었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여러 표현들도 그 흔적을 품고 있다.
“let there be light”, “the powers that be”, “eat, drink and be merry.”
이 문장들은 단순한 번역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적 창조에 가깝다. 짧고 명확하며, 리듬을 갖춘 이 표현들은 이후 수세기 동안 반복되며 영어 문화의 깊은 층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영향은 문학으로도 이어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것은 틴들이 처형된 지 불과 28년 후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보여주는 풍부한 어휘와 생동하는 문장은 종종 독창성의 상징으로 언급되지만, 그 언어가 자라난 토양 역시 중요하다. 틴들이 다듬어 놓은 영어의 형태와 리듬은, 그 토양의 일부였다.
만약 틴들의 번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어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경우,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문장 역시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틴들이 남긴 것은 책 한 권이 아니라, 언어의 흐름 그 자체였다. 불길 속에서 사라진 것은 한 인간의 몸이었지만, 그가 옮긴 문장들은 오히려 더 넓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사용하는 말 속에서 조용히 살아 있다.
벨기에 빌보르드에 위치한 윌리엄 틴들의 처형 장소를 기리는 기념비. Mehmetkoksal - Own work, CC BY-SA 3.0
번역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이 이야기를 단순히 한 신앙인의 순교담으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그 절반만을 이해하게 되는 셈이다. 윌리엄 틴들의 삶은 개인의 용기나 신념을 넘어, 번역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깊이 권력과 맞닿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번역은 결코 중립적인 작업이 아니다. 어떤 언어로 옮겨지는가, 어떤 단어가 선택되는가, 무엇이 강조되고 무엇이 생략되는가는 단순한 기술적 판단이 아니다. 그 선택의 뒤에는 언제나 질문이 놓여 있다. 누가 텍스트를 소유하는가. 누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그 의미를 독점하는가.
500년 전 영국에서 성경을 영어로 옮긴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가 오랫동안 쥐고 있던 해석의 권한, 다시 말해 신의 뜻을 설명할 수 있는 권력에 균열을 내는 일이었다. 라틴어라는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 말씀은 더 이상 특정 계층에 속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틴들은 그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고, 그 대가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종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변화를 더 빠르게 밀어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번역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후의 성경 번역과 영어의 발전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영어는 점차 특정 계층의 언어에서 벗어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확장되어 갔다.
그리고 수세기가 흐른 뒤, 같은 공간에서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캔터베리 대성당. 이곳에서 세라 멀랠리가 제106대 대주교로 취임했다.
그 장면을 단순히 한 개인의 성취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이동해 온 경계선의 결과였다. 한때는 읽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텍스트가, 이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리 또한 점차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캔터베리 대성당의 돌바닥 아래에는 여전히 수백 년의 시간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 어딘가에는, 이름이 널리 기억되지 않는 한 번역가의 흔적도 함께 묻혀 있다.
그는 왕도 아니었고, 제도권의 권력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옮긴 문장들은 결국 문을 열었다. 천천히, 그러나 되돌릴 수 없을 만큼.
3월 29일 일요일 레터 ‘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은 휴재합니다. 4월에 함께 읽을 책은 마이클 로보텀(Michael Robotham)의 『산산이 부서진 남자(Shatter)』입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