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압록강 너머에서 수십만 명의 중국군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마다 병사들은 산길을 따라 남하했고, 낮이면 몸을 숨겼다. 미군 정찰기는 그 거대한 병력 이동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뒤집혔다.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은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 유엔군은 북진을 거듭하며 압록강 인근까지 올라가 있었고, 워싱턴 역시 승리를 눈앞에 둔 분위기였다. 그러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 이후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유엔군은 남쪽으로 밀려났고, 서울은 다시 함락됐다. 전쟁은 예상보다 훨씬 길고 잔혹한 싸움으로 변했다.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은 한 가지 의문을 품어왔다. 중국과 소련은 어떻게 그렇게 대담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스탈린은 왜 미국의 군사적 대응, 특히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뜻밖의 장소 하나에 도달하게 된다. 전쟁터도, 크렘린궁도 아닌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였다.
그곳에는 겉보기에는 누구보다도 전형적인 영국 엘리트처럼 보이는 청년들이 있었다. 명문대 학생, 상류층 출신, 미래의 외교관과 정보관료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소련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이었다. 영국 외무부의 핵심 관료였던 그는 동시에 소련의 스파이였다. 그리고 그가 넘긴 정보는 훗날 냉전의 흐름뿐 아니라 한국전쟁의 향방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케임브리지 5인조(The Cambridge Five)’의 이야기다. 영국 정보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 그리고 세계사의 방향을 바꾼 스파이들, 오늘은 그 5인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케임브리지 5인조로 알려진 다섯 명의 인물들. 출처: The Collector
케임브리지라는 특권
케임브리지 5인조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1930년대 영국에서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는 영국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꼽힌다. 그러나 20세기 초 영국에서 이 두 학교의 위상은 지금보다 훨씬 절대적이었다.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대학이 아니었다. 이곳은 영국의 지배계층이 서로를 알아보고 연결되는 장소였다.
케임브리지 출신이라는 것은 사실상 영국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입장권과 비슷했다. 외무부와 정보기관, 총리실과 외교가, 언론과 금융권까지. 국가를 움직이는 핵심 조직들은 대부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출신 인물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학벌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망이었다.
영국에는 오래전부터 ‘올드 보이 네트워크(old boy network)’라는 문화가 존재했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문화였다. 특히 상류층 남성들 사이에서는 학교가 곧 신분 보증서처럼 기능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세세하게 검증하기보다, “케임브리지 출신이라면 괜찮은 인물일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먼저 작동했다.
그 결과 정보기관이나 외무부 내부에서도 서로를 지나치게 쉽게 신뢰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때로는 정식 신원조사보다 추천과 인맥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을 소련 정보기관이 파고들었다.
모스크바는 영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사실은 가장 취약한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영국 엘리트 사회의 특권과 폐쇄성, 그리고 “우리와 같은 배경의 사람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급적 확신 말이다.

BBC에서 방영한 케임브리지 5인조를 주제로한 드라마. 이 드라마를 보면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이었던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그 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법적 처벌을 면한다던가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심지어 법정에서도 다른 증거나 진술 등을 참고하지 않고 이들의 배경과 학벌만 보고 무죄를 선언하기도 한다.
다섯 명의 남자
다섯 명의 이름은 킴 필비(Kim Philby), 가이 버제스(Guy Burgess), 도널드 매클린(Donald Maclean), 앤서니 블런트(Anthony Blunt), 그리고 존 케언크로스(John Cairncross)였다.
이들은 모두 1930년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됐다. 당시 유럽은 극단의 시대로 향하고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고, 대공황 이후 기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 역시 깊어지고 있었다. 많은 젊은 지식인들은 민주주의가 무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불안과 위기의식을 느꼈다.
케임브리지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 안에서는 사회주의와 반파시즘 운동이 활발했고, 학생들은 밤늦도록 정치와 혁명, 미래 사회에 대해 토론했다. 일부 학생들에게 소련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었다. 파시즘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
소련 정보기관은 바로 이런 분위기를 주목했다.
물론 당시 NKVD(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은 케임브리지 안에서 공개적으로 “스파이 모집”을 하진 않았다. 대신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진 학생들에게 천천히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처음에는 토론 모임이나 지적 교류의 형태였다. 반파시즘 활동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며 관계를 쌓아갔다. 그리고 상대가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되면 비밀리에 협력을 제안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돈 때문에 움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초기에는 대부분 자신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훗날 킴 필비조차 자신이 배신자가 아니라 반파시스트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소련 정보기관이 이들에게 내린 지시는 단순하면서도 치밀했다.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하지 말 것. 급진적 모습을 숨길 것. 오히려 영국 체제 안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될 것.
그리고 이 다섯 명은 그 지시를 놀라울 만큼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도널드 매클린은 외무부에 들어갔고, 킴 필비와 가이 버제스는 언론계를 거쳐 정보기관에 진출했다. 앤서니 블런트는 군 정보부를 거쳐 훗날 왕실 미술 고문이 됐으며, 존 케언크로스는 독일군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던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에서 근무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사회가 가장 신뢰하던 얼굴들이었다. 교양 있고, 세련됐으며, 상류층 문화에 익숙한 엘리트들. 영국 체제를 위협할 인물처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사건을 더욱 충격적으로 만들었다. 냉전 시대 영국 정보 역사상 가장 위험한 침투는, 가장 영국적인 얼굴을 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킴 필비. 영국 상류층 출신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공산주의 성향 학생들과 교류하며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초기 동안 영국 비밀정보부 MI6에서 활동하며 대소련 정보 업무를 담당했고, 이후 워싱턴 주재 영국 정보 연락관으로 일하며 미국 CIA와도 긴밀히 협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련 KGB를 위해 활동한 이중간첩이었으며, 훗날 ‘케임브리지 파이브’의 핵심 인물로 밝혀졌다. 출처: Unknown author - [1], Public Domain
그들이 팔아 넘긴 것들
다섯 명이 소련에 넘긴 정보의 규모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충격적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소련에 전달한 기밀 문서가 최소 2만 건에서 많게는 2만 5천 건에 이른다고 추정한다. 단순한 군사 보고서 몇 장이 아니었다. 외교 전략, 정보작전, 암호 해독, 전후 국제질서 구상까지 서방 진영의 핵심 비밀들이 모스크바로 흘러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인물로 꼽히는 사람은 킴 필비였다.
필비는 뛰어난 사교성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영국 정보기관 내부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리고 1949년, 그는 워싱턴으로 파견된다. 직책은 영국 정보기관과 미국 CIA·FBI·NSA 사이를 연결하는 연락 책임자였다. 쉽게 말해 영미 정보동맹의 중심부에 앉아 있던 인물이었다.
냉전 초기, 미국과 영국은 거의 모든 핵심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소련을 감시하기 위한 첩보 작전, 이중간첩 추적, 암호 해독 계획까지. 그리고 그 정보들은 자연스럽게 필비의 책상을 거쳐 갔다.
문제는 그 책상 너머에 모스크바가 있었다는 점이다.
필비는 미국이 극비리에 진행하던 ‘베노나 프로젝트(Venona Project)’의 존재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베노나 프로젝트는 미국이 소련 정보기관의 암호 통신을 해독하기 위해 운영하던 초비밀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소련 암호를 읽고 있다는 사실을 소련이 전혀 모른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소련은 영국 내부의 스파이를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이 소련을 몰래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소련 역시 서방 정보기관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존 케언크로스가 넘긴 정보 역시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던 블레츨리 파크에서 근무했는데, 해독 자료 일부를 몰래 빼내 소련 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는 문서를 바지 속에 숨겨 반출했다고 한다.
그 정보는 특히 1943년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격 계획을 미리 파악했고, 결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전에서 독일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정보전의 승리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리고 다섯 명 가운데서도 한반도의 역사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도널드 매클린이 있었다.
존 케언크로스.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장학생으로 학업을 이어간 인물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현대언어를 공부했으며, 뛰어난 언어 능력과 학업 성적으로 주목받았다. 케임브리지 시절 좌파 성향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소련 정보기관과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영국 외무부와 재무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암호 해독 기관인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독일군 암호 해독 정보와 군사 전략 관련 기밀을 소련 측에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독소전쟁 시기 소련군의 정보 확보에 상당한 도움을 준 인물로 평가된다. 출처: unknown - Original publication: http://spartacus-educational.com/SScairncross.htmImmediate source: http://spartacus-educational.com/SScairncross.htm, Fair use
한반도에 드리워진 그림자
1950년, 도널드 매클린은 영국 외무부에서 미국 담당 핵심 책임자로 임명됐다. 냉전 초기 영국 외교 라인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워싱턴과 런던 사이를 오가는 최고 기밀 문서들을 정기적으로 열람할 수 있었고, 한국전쟁과 관련된 영미 공동 전략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직접 개입 가능성을 우려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이 중국 본토나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번지는 상황은 피하려 했다. 매클린은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여러 제한을 걸어두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압록강 일대의 다리를 공격하지 말 것, 중국 영공 깊숙이 정찰 비행을 확대하지 말 것, 중국군과의 충돌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는 모스크바로 흘러 들어갔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 정보가 중국 지도부와 스탈린에게 중요한 신호가 됐다고 본다. 미국이 전쟁을 어디까지 확대할 의사가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서는 스스로 선을 긋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보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은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면서도, 미국이 곧바로 중국 본토를 공격하는 수준까지 전쟁을 확전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더 민감한 순간은 그해 겨울 찾아왔다.
1950년 12월, 중국군 개입 이후 전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미국 내부에서는 핵무기 사용 가능성이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특히 맥아더는 만주 지역과 중국 본토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고, 일부 군 인사들 역시 핵 사용을 검토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영국 정부는 크게 긴장했다. 만약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전쟁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는 급히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과 긴급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트루먼은 전쟁을 한반도 밖으로 확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설명했고, 핵무기 사용에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매클린은 그 회담 내용까지 소련 측에 전달했다.
냉전사의 일부 연구자들은 바로 이런 정보들이 스탈린의 계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미국이 핵보유국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핵전쟁까지 감수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는 판단 말이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탈린이 베를린 봉쇄와 북한 지원, 그리고 이후 중국 개입을 보다 자신 있게 승인한 배경 가운데 하나로 이런 첩보들을 거론한다.
물론 어디까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역사는 단 하나의 정보만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한국전쟁 당시 영국 외무부의 핵심 자리에서 영미 전략을 다루던 인물이, 동시에 소련의 스파이였다는 것. 그리고 그가 넘긴 정보들이 냉전과 한반도의 역사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갔다는 사실말이다.
도널드 맥클레인. 영국의 유력 정치인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교육부 장관을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는 명문 사립학교 그레셤 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홀에서 현대언어를 공부했으며, 케임브리지 시절 공산주의 성향 학생들과 교류하며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영국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파리·워싱턴 등 주요 해외 공관에서 근무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핵무기 및 냉전 전략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 위치에 있었고, 이를 소련에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By United Press International - Guy Burgess and Donald Duart Maclean.jpg, Public Domain
위선의 초상
케임브리지 5인조가 단순한 첩보 사건을 넘어 영국 현대사의 거대한 스캔들로 남은 이유는, 그들의 배신이 지닌 위선성 때문이었다.
다섯 명은 모두 젊은 시절 자신들이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다.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소련 편에 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은 영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이었다.
명문가 출신. 케임브리지 엘리트. 외무부와 정보기관, 왕실까지 연결되는 상류층 네트워크의 구성원들.
그들은 자신들이 비판하던 체제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 체제의 비밀을 소련에 넘기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활동이 너무 완벽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전달한 정보는 양도 방대했지만 정확도 역시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히려 그 때문에 KGB조차 처음에는 의심했다고 전해진다. 정말 영국 내부에 이런 수준의 스파이가 존재할 수 있는가. 혹시 영국 정보기관이 의도적으로 흘리는 역정보가 아닌가.
가이 버지스. 영국 해군 장교 집안 출신으로, 명문 사립학교 이튼 칼리지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시절 좌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이후 소련 정보기관의 포섭 대상이 됐다. 그는 BBC 프로듀서와 외무부 관료로 일했으며, 이후 영국 외교부와 MI6 관련 업무에도 관여했다. 뛰어난 인맥과 사교성으로 영국 정치·언론·정보기관 핵심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소련을 위해 기밀 정보를 넘긴 이중간첩이었다. 출처: United Press International - Guy Burgess and Donald Duart Maclean.jpg, Public Domain
특히 킴 필비의 경우가 그랬다. 공개적으로 좌파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 어떻게 MI6 고위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는지, 소련 정보기관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영국 사회의 맹점이었다.
영국 엘리트 사회는 같은 배경과 억양, 학교와 계급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쉽게 신뢰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감각이 의심보다 앞섰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5인조는 바로 그 신뢰 체계를 가장 완벽하게 이용한 사람들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건이 드러난 뒤에도 본격적인 처벌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케임브리지 5인조 가운데 정식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이 버제스, 도널드 매클린, 킴 필비는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소련으로 도주했다. 앤서니 블런트는 비밀 자백의 대가로 면책을 받았고, 존 케언크로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을 피했다.
영국 정부는 냉전 한복판에서 이런 거대한 침투 사건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국가적 망신이자 정보기관 전체의 실패를 인정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많은 진실은 오랫동안 비밀 속에 묻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앤서니 블런트였다.
블런트는 MI5에서 근무하며 소련에 정보를 넘겼다. 동시에 그는 가이 버제스의 MI5 취업을 도왔고, 버제스가 소련으로 도주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런데도 그는 내부 조사 과정에서 마치 충성스러운 정보요원인 것처럼 행동했다. 배신자가 또 다른 배신자를 추적하는 척했던 셈이다.
1964년, 블런트는 결국 비밀리에 자신의 활동을 자백했다. 하지만 그는 형사 처벌 대신 면책을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이후에도 버킹엄 궁에서 왕실 미술품 관리인으로 계속 일했다.
그의 정체가 공개적으로 폭로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1979년,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의회에서 직접 그의 이름을 공개하면서 영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블런트는 기사 작위를 박탈당했고, 한때 존경받던 미술사학자는 하루아침에 국가적 배신자의 상징이 됐다.
그는 그로부터 4년 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케임브리지 5인조가 남긴 상처와 불신은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국 사회를 떠돌게 된다.
앤서니 블런트. 영국 성공회 성직자 집안 출신으로, 명문 사립학교 말버러 칼리지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현대언어를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좌파 지식인 그룹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이후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영국 국내 방첩기관 MI5에서 근무하며 군사·정보 관련 기밀에 접근했다. 전후에는 세계적인 미술사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영국 왕실의 공식 미술 자문관인 ‘Surveyor of the King’s (later Queen’s) Pictures’ 직책까지 맡으며 상류 사회와 왕실 내부에서도 신뢰받는 인물이 됐다. 출처: Unknown - Original publication: https://www.bdonline.co.uk/the-spy-whom-riba-loved/5000942.articleImmediate source: https://www.bdonline.co.uk/the-spy-whom-riba-loved/5000942.article, Fair use
그들의 말로
소련으로 도주한 세 명이 맞이한 현실은, 젊은 시절 그들이 꿈꾸던 혁명의 이상과는 꽤 달랐다.
가이 버제스는 끝내 소련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런던의 사교 문화와 영국식 삶에 익숙했던 그는 모스크바에서 깊은 고립감을 느꼈다. 술에 의존하는 날이 많아졌고, 점점 무너져갔다. 그는 1963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도널드 매클린은 조금 달랐다. 그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소련 시민권까지 취득하며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 했다. 서방 세계와 완전히 결별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말년 역시 행복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아내 멜린다는 결국 킴 필비(Kim Philby)와 가까워졌고, 매클린은 점점 더 고립된 삶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1983년 모스크바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킴 필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했다.
소련은 그를 냉전의 영웅처럼 대우했다. 그는 KGB 훈장을 받았고, 공식적으로는 서방 제국주의를 속여낸 전설적인 스파이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실제 삶은 훨씬 복잡했다.
필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혁명을 위해 조국을 배신했던 남자는, 정작 자신이 도착한 체제 안에서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했다. 그는 심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깊은 외로움 속에서 살아갔다. 훗날 그의 아내는 필비가 말년에 공산주의 자체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988년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고, KGB 훈장과 함께 묻혔다.
소련 우표에 등장한 킴 필비. USSR Post - Scanned 600 dpi by User Matsievsky from personal collection, Public Domain
어쩌면 이것이 케임브리지 5인조 이야기의 가장 아이러니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혁명의 이상을 위해 조국을 배신했던 사람들이, 결국 혁명의 현실 속에서는 끝내 완전한 내부인이 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케임브리지 5인조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반복해서 소환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냉전 스파이 사건이 아니다. 특권은 어떻게 사람들을 눈멀게 만드는가. 엘리트 집단은 왜 자기 내부를 의심하지 못하는가. 그리고 이념은 어떻게 배신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되는가. 케임브리지 5인조는 그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응축된 사건이었다.
2026년 현재, 영국에서는 이 사건이 처음 본격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지 75주년을 맞아 다시 관련 연구와 재평가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 국립기록원과 킹스칼리지 런던 등에서는 냉전기의 정보전과 케임브리지 5인조의 유산을 재조명하는 프로젝트들도 진행 중이다.
냉전은 오래전에 끝났다. 그러나 이 다섯 명이 남긴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충성과 이념이 충돌할 때 인간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특권은 왜 때로 가장 위험한 맹점이 되는가. 그리고 신뢰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체제의 약점으로 바뀔 수 있는가.
무엇보다 한국인들에게 이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케임브리지의 조용한 강의실에서 혁명과 이상을 토론하던 젊은 엘리트들이 넘긴 정보가, 결국 한반도의 전쟁에도 그림자를 드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정보의 파장이 눈 덮인 산과 들판 위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지를 생각하는 순간, 이 이야기는 더 이상 먼 나라의 첩보사가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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