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숫자와 시의 사이에서: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로 불리는 여성, 에이다 러브레이스

시인 바이런의 딸이 세계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쓰기까지

2026.05.09 | 조회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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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816년 4월, 영국의 한 귀족 저택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유럽 전역을 뒤흔든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 아기의 이름은 Ada Lovelace. 훗날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 불리게 되는 에이다 러브레이스였다.

에이다의 어머니 애너벨라는 딸이 태어난 지 다섯 주 만에 남편과의 별거를 결심했다. 이후 그녀는 혼자서 딸을 키웠다. 그녀에게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두려움이 하나 있었다. 딸만큼은 아버지를 닮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감정에 휘둘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시인의 삶을 딸에게서만큼은 막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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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때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모습. 출처: Unknown (John Murray Publishers London) - Scanned from Byron and his World by Derek Parker., Public Domain

그래서 애너벨라는 에이다를 철저히 수학과 과학 속에서 길렀다. 논리와 계산, 규칙과 질서가 그녀의 교육이었다. 시와 문학은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어머니는 엄격한 수학적 훈련이야말로 딸 안에 흐르는 바이런의 기질을 억누를 수 있다고 믿었다. 상상력이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삶 전체를 하나의 정교한 공식처럼 만들고자 했던 셈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교육은 에이다를 평범한 수학자로 만들지 못했다. 에이다는 수학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시적인 상상력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숫자와 감성이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훗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조용히 이렇게 적었다.

“시를 허락할 수 없다면, 적어도 ‘시적 과학(poetical science)’만큼은 허락해줄 수 없나요?”

그 문장에는 에이다 러브레이스라는 인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논리와 상상력, 계산과 직관, 과학과 시를 하나로 연결하려 했던 한 사람의 평생의 질문이. 그리고 어쩌면 현대 컴퓨터 시대의 시작도, 바로 그 질문에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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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바이런의 모습. 출처: Thomas Phillips - BBC Your Painting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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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가 살아가던 19세기 초 영국은 여성이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거의 허락되지 않던 시대였다. 여성은 대학에 갈 수도 없었고, 정식 학위를 받을 수도 없었다. 지적 호기심은 종종 ‘여성답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고, 수학과 과학은 남성들의 영역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에이다의 어머니 애너벨라는 딸만큼은 예외가 되기를 바랐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은 교육을 에이다에게 제공했다. 사회개혁가 윌리엄 프렌드(William Frend)가 가정교사로 참여했고, 가족 주치의였던 윌리엄 킹(William King) 역시 교육에 관여했다. 무엇보다 에이다의 삶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메리 서머빌(Mary Somerville)이었다. 그녀는 훗날 영국 왕립천문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 되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19세기 과학의 여왕’이라 불렀다.

에이다가 열여덟 살이 되던 무렵, 두 사람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서머빌은 단순히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에이다에게 책을 보내주고, 문제를 내주고, 공부 방향을 조언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에이다의 지적 호기심을 진지하게 대해주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여성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던 경험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서머빌을 통해 에이다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숫자를 계산하는 기계를 넘어, 생각하는 기계를 꿈꾸던 수학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의 구상은 지나치게 기이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에이다가 처음 배비지를 만난 것은 1833년, 그녀가 아직 열일곱 살이던 때였다. 한 사교 모임에서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다. 나이도 달랐고, 살아온 환경도 달랐지만, 둘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에이다는 배비지가 구상하던 기계에 곧바로 매료됐다.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처음 기계를 본 자리에서 이미 그 작동 원리를 이해했고, 단순한 기술 이상의 아름다움까지 읽어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톱니바퀴와 금속 부품만 보았을 때, 에이다는 그 안에서 전혀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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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찰스 배비지의 모습. 출처: anonymous - Art UK,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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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지가 구상한 기계의 이름은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이었다. 오늘날의 컴퓨터를 떠올리게 하는 이 기계는 단순한 계산기가 아니었다. 입력된 숫자를 규칙에 따라 처리한 뒤, 결과를 출력하는 범용 연산 장치였다. 지금 보면 너무도 익숙한 개념이지만, 19세기 초 사람들에게 그것은 거의 공상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문제는 시대가 아직 그 기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배비지는 늘 자금난에 시달렸고, 정밀한 부품을 구현할 기술 역시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해석기관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기계는 사라졌어도, 그 아이디어만큼은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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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지가 제작한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의 계산 장치 일부와 인쇄 메커니즘. 현재 런던 과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출처: Charles Babbage - Upload by Mrjohncummings 2013-08-28 15:10, CC BY-SA 2.0

1840년,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는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에서 해석기관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 강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이탈리아 공학자 루이지 메나브레아(Luigi Menabrea)는 내용을 프랑스어 논문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훗날 메나브레아는 이탈리아 총리가 된다. 그리고 1842년, 에이다는 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번역 작업처럼 보였다. 그러나 작업은 몇 달 동안 이어졌고, 번역이 끝날 무렵 에이다는 더 이상 단순한 번역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문 곳곳에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A부터 G까지 이어지는 일곱 개의 주석은 결국 원문보다 세 배 가까이 긴 분량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배비지조차 완전히 설명하지 못했던 기계의 미래가 담겨 있었다.

특히 에이다의 통찰은 당시로서는 거의 혁명적이었다. 그녀는 해석기관이 단순히 숫자를 계산하는 기계가 아니라고 보았다. 숫자란 결국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기호에 불과하며, 규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계가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젠가 이 기계가 음악까지 작곡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적었다.

19세기 중반, 증기기관차가 산업혁명의 상징이던 시대에 누군가는 이미 기계가 음악을 만들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1843년 8월 출판된 이 논문과 주석들은 훗날 컴퓨터 역사에서 결정적인 문서로 남게 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마지막 주석인 ‘노트 G(Note G)’였다. 바로 그곳에서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컴퓨터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알고리즘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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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지의 『해석기관 개요(Sketch of The Analytical Engine Invented by Charles Babbage)』에 처음 실린 ‘노트 G’의 일부. 출처: Ada Lovelace - http://www.sophiararebooks.com/pictures/3544a.jpg,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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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G는 ‘베르누이 수(Bernoulli numbers)’라는 수학적 수열을 해석기관으로 계산하는 방법을 단계별로 설명한 글이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이 글을 ‘세계 최초로 출판된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하려면 요리 레시피를 떠올리면 된다. 재료 목록만 있다고 해서 요리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무엇을 먼저 넣고, 언제 섞고, 얼마 동안 가열하고, 어떤 조건이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지가 정확히 적혀 있어야 한다. 에이다가 한 일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기계가 따라갈 수 있도록, 문제를 푸는 절차를 명확한 순서로 나누어 적어낸 것이다.

현대 프로그래머의 눈으로 노트 G를 읽으면 더 놀라운 점이 보인다. 에이다는 연산을 반복 가능한 묶음으로 정리했다. 오늘날 우리가 ‘루프(loop)’라고 부르는 개념과 닮아 있다. 또 계산 과정에서 값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추적할 수 있는 표기 방식도 사용했다. 1843년에 쓰인 문서가 오늘날 소프트웨어를 작성하는 방식과 이토록 닮아 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물론 에이다를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 역시 1837년부터 1840년 사이에 이미 여러 프로그램 예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들은 출판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에이다가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생각해낸 사람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노트 G가 수학적 문제를 풀기 위한 단계적 연산 절차를 세계 최초로 출판한 기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에이다는 지금도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머’라는 이름으로 가장 널리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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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앙투안 클로데(Antoine Claudet)가 촬영한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사진. 출처: Antoine Claudet - shared by Paul Graham on x.com https://x.com/paulg/status/1927655441913250041,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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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이다의 진짜 위대함은 단순히 알고리즘을 작성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았다. 더 놀라운 점은 그녀가 컴퓨터라는 존재 자체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있었다.

배비지에게 해석기관은 기본적으로 계산을 위한 기계였다. 인간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숫자를 처리하는 거대한 계산기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당시에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하지만 에이다는 그보다 훨씬 먼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해석기관이 단순히 숫자만 계산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트의 초반부에서 에이다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대상이 수학적 규칙과 기호로 표현될 수 있다면, 기계는 그것 또한 처리할 수 있다고. 그녀는 음악까지 예로 들었다. 언젠가 기계가 복잡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익숙한 이야기다. 컴퓨터는 음악을 만들고, 영상을 편집하고, 언어를 번역하며, 그림을 생성한다. 하지만 에이다가 이 생각을 적어 내려간 것은 1843년이었다. 증기기관이 세상을 움직이던 시대에, 그녀는 이미 컴퓨터가 단순한 계산기를 넘어 범용 정보처리 장치가 될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에이다가 기계의 가능성만큼이나 한계 또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트 G에서 그녀는 이런 문장을 남긴다.

“해석기관은 무엇을 스스로 창조해낸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명령한 것만 수행할 수 있다.”

에이다에게 기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규칙을 따르는 존재였다. 스스로 의지를 갖거나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장이 약 100년 뒤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된다.

현대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런 튜링(Alan Turing)은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탐구하면서 에이다의 이 문장을 정면으로 다뤘다. 그는 이를 ‘러브레이스 여사의 이의(Lady Lovelace’s Objection)’라고 불렀다. 기계는 인간이 시킨 일만 할 뿐,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튜링은 그 주장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말 기계는 인간이 준 명령만 반복할 뿐인가.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는가.

그 질문은 결국 현대 인공지능 연구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됐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AI를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AI는 창작을 할 수 있는가. AI는 스스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챗GPT와 클로드를 둘러싼 오늘의 논쟁은, 어쩌면 이미 1843년 에이다의 노트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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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가 작성한 자필 원고. 출처: Author: Augusta Ada Byron. Digital image: Somerville College, Oxford - Somerville College, Oxford,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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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다는 1852년 11월, 서른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자궁암이었다. 너무 이른 죽음이었다.

그녀는 유언으로 자신을 아버지 곁에 묻어달라고 남겼다. 그래서 에이다는 평생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 바이런의 곁에 잠들게 된다. 시를 쓰던 아버지와, ‘시적 과학’을 꿈꾸던 딸이 죽어서야 비로소 나란히 누운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에이다가 세상을 떠난 뒤 그녀의 이름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 잊혀졌다. 사람들은 바이런의 시는 기억했지만, 그의 딸이 남긴 노트는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

에이다가 다시 세상에 호출된 것은 그녀가 죽고도 1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다. 1953년, 에이다의 노트들이 재출판되면서 사람들은 뒤늦게 그 문서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수학 노트가 아니었다. 현대 컴퓨터 개념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였고, 컴퓨터 역사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1980년, 미국 국방부는 새로운 표준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며 그 이름을 ‘Ada’라고 붙였다. 당시 미군 내부에서는 400개가 넘는 서로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가 혼재해 있었고, 이를 통합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가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언어에 바이런의 딸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은 어딘가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한때 “시인의 위험한 상상력을 닮지 않게 하겠다”는 교육 속에서 자랐던 아이의 이름이, 결국 현대 컴퓨터 시대의 언어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에이다의 이름은 계속 살아 있다. 매년 10월 둘째 주 화요일이면 세계 곳곳에서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날(Ada Lovelace Day)’이 열린다. 과학과 기술, 공학과 수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기여를 기념하는 날이다.

에이다의 이야기가 지금, AI 시대에 다시 자주 호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수학과 상상력이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딸에게서 시를 지워내려 했지만, 에이다는 그것을 수학 안에서 되살려냈다. 기계가 언젠가 음악을 만들고, 언어를 다루고, 숫자를 넘어 인간의 표현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힘은 단순한 계산 능력만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인의 딸이 가진 상상력이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모두 그 상상력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컴퓨터로 그림을 만들고, AI에게 글을 쓰게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의 씨앗은, 19세기 런던의 한 서재에서 한 젊은 여성이 이미 조용히 상상해두었던 미래였다.


에이다 러브레이스(1815~1852)의 원본 노트 G는 옥스퍼드 대학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에 소장되어 있으며, 디지털 이미지로 공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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