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엔 없는 이야기들

‘신사의 나라’가 감춘 아동 강제 이주의 역사, 영국 홈 칠드런 사건

13만 명의 영국 아이들은 어쩌다 배에 실려 식민지로 보내졌을까?

2026.05.23 | 조회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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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1986년 어느 날, 영국 노팅엄(Nottingham)에서 일하던 한 복지사에게 낯선 여성이 찾아왔다. 복지사의 이름은 마거릿 험프리스(Margaret Humphreys)였다.

여성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 영국의 보호 시설에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배를 타고 호주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이는 겨우 네 살. 그녀는 자신 같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처음에 험프리스는 그 이야기를 쉽게 믿지 못했다. 너무 비현실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국가가 어린아이들을 다른 대륙으로 보낸다고? 그것도 전쟁이나 피난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하지만 조사를 시작할수록 더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났다.

영국 정부와 여러 자선단체들은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로디지아(Rhodesia) 같은 대영제국 식민지로 보내고 있었다. 이른바 ‘아동 이주(child migration)’ 정책이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많은 아이들이 실제 고아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부모가 살아 있었음에도 “버려진 아이” 혹은 “보호가 필요한 아동”으로 분류돼 보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어떤 부모들은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와 떨어졌고, 어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성장했다. 반대로 부모들은 아이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설명만 들은 채, 다시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된다. 부모가 자신들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결코 빅토리아 시대나 19세기 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 아동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1970년이었다.

불과 반세기 남짓 전의 일이다. 지금도 생존자들이 살아 있고, 가족을 찾는 사람들이 있으며, 자신이 왜 버려졌는지 평생 이해하지 못한 채 늙어간 이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오래된 제국의 그림자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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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릿 험프리스. 출처: Eva Rinaldi - Margaret Humphreys, CC BY-SA 2.0

 

‘신사의 나라’가 만든 제도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공업 국가로 성장했다. 공장은 끊임없이 돌아갔고, 런던은 제국의 수도로 팽창했다. 대영제국은 바다를 지배했고, 세계 곳곳에서 부가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그 화려함 아래에는 또 다른 영국이 존재했다.

런던의 빈민가는 극심한 가난으로 넘쳐났다. 좁고 습한 골목에는 집 없는 아이들이 떠돌았고, 어린아이들까지 공장과 작업장으로 내몰렸다. 부모를 잃거나 가족에게 버려진 아이들, 혹은 단지 너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보호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이 도시 곳곳에 넘쳐났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가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에서 그려낸 세계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거리의 부랑아와 구빈원(workhouse), 굶주림과 아동 노동.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한편으로는 문명과 번영의 제국이었지만, 동시에 어린아이들조차 생존을 위해 거리에서 떠돌아야 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 엘리트들은 이 문제를 점점 ‘사회 관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1826년, 런던의 치안판사 로버트 챔버스(Robert Chambers)는 의회 위원회에 출석해 이런 취지의 발언을 남긴다. 런던에는 아이들이 너무 많으며, 고로 영국의 “잉여 아이들(surplus children)”을 식민지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읽으면 섬뜩한 표현이다.

아이들을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제국이 처리해야 할 사회적 과잉 인구처럼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 안에 훗날 아동 이주 정책(child migration policy)의 본질이 숨어 있었다.

당시 대영제국은 동시에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식민지에는 노동력이 부족했다. 캐나다의 농장과 호주의 개척지, 로디지아(Rhodesia) 같은 식민지에서는 값싸고 순응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두 개의 문제가 하나의 정책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한다.

영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제국 바깥으로 보내자.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식민지에는 노동력을 공급하자.

표면적으로 그 논리는 매우 인도주의적으로 포장됐다. 아이들에게 더 깨끗한 공기와 건강한 환경, 더 밝은 미래를 제공한다는 이야기였다. 영국의 음습한 빈민가 대신 햇살과 농장이 있는 새로운 삶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냉혹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본국의 빈곤 문제를 줄이고, 동시에 제국 식민지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는 것. 다시 말해, 아이들은 보호의 대상인 동시에 제국 운영을 위한 자원처럼 다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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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초판에 실린 삽화. 고아 소년이 런던 슬럼가의 소매치기 일당 손아귀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출처: By Richard Bentley - Heritage Auction Galleries, Public Domain

 

선한 의도를 내건 사람들

 

이 이야기가 더욱 불편하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제도를 추진한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악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히려 스스로를 아이들의 구원자라고 믿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애니 맥퍼슨(Annie Macpherson)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복음주의 기독교 활동가였던 그녀는 런던 빈민가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거리의 아이들을 캐나다로 보내는 운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영국의 빈곤과 범죄,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토머스 바나도(Thomas Barnardo) 역시 비슷했다. 아일랜드 출신 의사였던 그는 런던의 빈민 아동들을 위한 보호 시설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훗날 그의 이름을 딴 바나도스(Barnardo’s)는 지금까지도 영국 최대 규모의 아동 복지 자선단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구세군(Salvation Army), 가톨릭 수도회, 수십 개의 자선단체들 역시 이 아동 이주 사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이들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다. 런던 빈민가와 구빈원에서 아이들을 꺼내 햇빛과 농장이 있는 새로운 세계로 보내는 것. 그것은 당시 많은 중산층과 종교인들에게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업처럼 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이 역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단순히 악한 사람들이 악한 짓을 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의를 믿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거대한 폭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들을 “구한다”는 명분은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아이들 자신의 목소리는 쉽게 지워졌다. 부모와 떨어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낯선 대륙으로 보내진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묻지 않았다.

선한 의도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의도의 선함이 결과의 선함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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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바나도스의 광고물. 출처: Dr Barnado's Homes - Page 77 of the 1931 Charles Letts Office Desk Diary, Public Domain

 

배 위의 아이들

 

1869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은 캐나다로만 약 8만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아이들을 보냈다. 아이들의 나이는 세 살에서 열여덟 살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였다.

그리고 그 긴 항해에 부모와 함께 오른 아이는 거의 없었다.

배를 타는 순간, 아이들은 사실상 혼자가 됐다.

당시 영국 사회는 이들을 ‘홈 차일드(Home Children)’라고 불렀다. 겉으로는 보호와 새로운 기회를 위한 사업처럼 설명됐지만, 실제로는 제국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아동 이주 시스템이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 가운데 진짜 고아가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부모를 완전히 잃은 아이들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단지 너무 가난했거나, 부모 중 한 명이 병들었거나, 잠시 시설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아이들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가족이 있었음에도 “부적절한 가정” 출신으로 분류됐다.

그리고 많은 경우 부모는 아이가 정말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때로는 동의서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고, 때로는 부모가 잠시 맡긴다고 생각한 아이가 몇 달 뒤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심지어 부모 몰래 아이가 보내진 사례들도 존재했다.

아이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종종 같은 말을 들으며 자랐다.

“너를 찾는 사람은 없다.” “부모는 이미 죽었다.” “돌아갈 가족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인 경우가 많았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떠나던 해에도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부모들은 보호시설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다, 이미 배가 떠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들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으며 성장했고, 부모들은 아이를 잃어버린 채 평생을 살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약 4,300명의 아이들이 호주와 캐나다, 뉴질랜드, 로디지아(Rhodesia)로 보내졌다. 히틀러가 패망하고, 유엔이 창설되고,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이후의 시대였다.

세계가 인권과 자유를 이야기하던 그 시기에도, 영국은 여전히 아이들을 배에 태워 제국의 반대편으로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 아동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1970년이었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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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캐나다 매니토바주 러셀에 위치한 Dr Barnardo's 산업 농장에서 밭을 가는 소년의 모습. 이 사진은 2010년 ‘홈 칠드런(Home Children)’ 이주 역사를 기념하는 캐나다 우표에도 사용됐다. 출처: Unknown author - http://www.collectionscanada.gc.ca/obj/022/f1/a117285.jpg, Public Domain

 

오렌지와 햇살의 실체

 

그렇다면 아이들이 배를 타고 도착한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많은 경우 형제자매들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서로 다른 시설로 흩어졌다. 함께 울던 아이들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헤어졌다. 다시는 만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트럭에 실려 외딴 농장이나 종교 시설, 보호소로 보내졌다. 어떤 곳에서는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곧바로 노동이 시작됐다.

당시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면, 아이들은 사실상 값싼 노동력으로 사용됐다. 캐나다에서는 농장 노동과 가사 노동에 투입됐고, 넓은 프레리 지역의 외딴 농가로 보내진 경우도 많았다. 호주에서는 일부 시설이 보호소라기보다 거의 강제수용소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영됐다는 증언들이 이어졌다.

특히 서호주의 빈둔(Bindoon) 시설은 오랫동안 악명 높은 장소로 남았다.

생존자들은 이곳에서 일상적인 폭행과 성폭력이 벌어졌다고 증언했다. 어린아이들은 벽돌을 나르고 건물을 짓는 중노동에 동원됐고, 규율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적인 폭력에 노출됐다. 도움을 요청할 곳도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대륙 반대편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삶”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졌다.

2009년, 당시 호주 총리였던 케빈 러드(Kevin Rudd)는 공식 사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사랑과 따뜻함, 돌봄이 완전히 결핍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름은 번호로 대체됐고, 자연스러운 놀이 시간은 강제된 노동과 규율로 바뀌었습니다.”

그 문장은 이 제도의 본질을 너무도 정확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에게 약속됐던 것은 햇살과 미래였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경험한 것은 침묵과 노동, 그리고 버려졌다는 감각이었다.

더 잔혹한 것은, 상당수 아이들이 오랫동안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믿으며 성장했고, 자신을 보호해야 할 어른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낯선 대륙으로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영국 사회는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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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온타리오주 51 Avon Street 는 영국에서 보내진 ‘홈 칠드런(Home Children)’ 아동들을 일시적으로 수용하고 각 지역 농가와 가정으로 보내던 시설이었다. 약 8,100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거쳐간 것으로 알려져있다. 출처: Yoho2001 - With a camera in front of the objects, CC BY-SA 4.0

 

진실을 파헤친 한 여성

 

마거릿 험프리스가 처음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영국 사회는 거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86년, 노팅엄의 한 복지사였던 그녀는 자신이 호주로 보내졌던 ‘옛 아동 이주자’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영국 정부도, 자선단체들도, 심지어 언론조차 이런 이야기를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된 일처럼 보였고, 너무 믿기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영국에는 지금과 같은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록은 흩어져 있었고, 많은 자료들은 비공개 상태였다. 어떤 기관들은 기록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고, 어떤 곳은 협조를 거부했다. 험프리스에게는 단순한 복지 활동이 아니라, 거대한 침묵과 싸우는 작업이 되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험프리스는 ‘아동 이주자 신탁(Child Migrants Trust)’을 설립한다. 목표는 단순했다. 영국에서 다른 대륙으로 보내졌던 아이들, 이제는 대부분 중년이나 노년이 된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과 과거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녀는 영국과 호주, 캐나다를 오가며 생존자들의 기록을 추적했다. 수십 년 동안 서로 죽은 줄 알고 살아왔던 형제자매들이 다시 만났고, 평생 자신을 버렸다고 믿었던 부모와 자녀들이 뒤늦게 재회했다.

그 과정에는 너무 늦어버린 만남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은 부모를 찾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어떤 부모는 평생 아이를 기다리다 끝내 만나지 못한 채 죽어갔다. 험프리스는 단순히 서류를 찾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국가와 제도가 끊어버린 인간 관계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붙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훗날 회고록 『빈 요람(Empty Cradles)』으로 출간됐고, 2011년에는 영화 『오렌지와 햇살(Oranges and Sunshine)』로 제작됐다. 영화에서는 배우 에밀리 왓슨(Emily Watson)이 험프리스를 연기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이어진 그녀의 활동은 결국 국가의 공식 사과까지 끌어냈다.

2009년, 호주 총리 케빈 러드(Kevin Rudd)는 아동 이주 정책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를 발표했다. 이어 2010년 2월 24일,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Gordon Brown) 역시 영국 정부를 대표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날 런던에는 약 60명의 생존자들이 초청됐다.

어린 시절 배에 실려 제국 반대편으로 보내졌던 아이들. 평생 자신의 과거를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노인이 된 뒤에야 국가로부터 “우리가 잘못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많은 생존자들은 이후에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사과는 중요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고든 브라운의 공식 사과문 발표

 

선의는 어떻게 역사적 범죄가 되는가

 

오늘날 연구자들은 전 세계에 약 400만 명 정도의 홈 칠드런 후손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캐나다에서는 인구의 약 12퍼센트가 홈 칠드런 혈통과 연결돼 있다는 조사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 있다.

마거릿 험프리스(Margaret Humphreys)가 만든 아동 이주자 신탁(Child Migrants Trust) 역시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너무 늦게 밝혀진 기록들을 추적하고, 가족 관계를 복원하며, 잊혀졌던 이름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다.

1986년, 노팅엄(Nottingham)의 작은 사무실로 찾아왔던 그 여성은 결국 가족을 찾았을까.

험프리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재회는 기적 같았고, 어떤 재회는 너무 늦었다고.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너무 늦었다”는 말이, 이 사건 전체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문장인지도 모른다.


아동 이주자 신탁(Child Migrants Trust)은 영국 노팅엄에 본부를 두고 현재도 운영 중이다(childmigrantstrust.org). 마거릿 험프리스의 회고록 『빈 요람(Empty Cradles)』과 영화 『Oranges and Sunshine, 2011)』을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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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Oranges and Sunshine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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