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문학으로 읽는 영국

‘가정폭력’이라는 말이 생기기까지, 영국 법이 ‘강압적 통제’를 범죄로 만든 날

함께 읽는 영국 추리소설, 『산산이 부서진 남자』 두번째 이야기

2026.04.12 | 조회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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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

영국에서 가정 내 폭력이 법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짧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법은 남편이 아내를 체벌할 권리를 사실상 용인했다. 1853년에야 비로소 배우자구타방지법(Aggravated Assaults Act)이 통과되었지만, 이 법조차 실제 적용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당시 법원은 가정 내 문제를 공적 영역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영국 관습법의 오래된 원칙 중 하나인 ‘영국인의 집은 그의 성(An Englishman’s home is his castle)’은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작동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영국 경찰은 가정폭력 신고를 받아도 이를 ‘민사적 분쟁’으로 분류하고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경찰관들은 현장에 도착해도 “서로 화해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 여성이 고소를 원해도 담당 경찰관이 이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변화는 여성운동과 함께 왔다. 1971년 에린 피지(Erin Pizzey)가 런던 치즈윅(Chiswick)에 영국 최초의 여성 쉼터(women’s shelter)를 설립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피난처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과 같았다. 가정 내 폭력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것. 피지의 활동은 영국 사회에 가정폭력이라는 개념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여러 법적 정비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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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6월 14일, 에린 피지가 보건사회보장부(DHSS)에 보낸 편지. 당시 이 편지에는 ‘구타당한 여성(battered women)’이라는 사회 문제에 관한 보고서가 첨부되었다. 출처: The National Archives

 

눈에 보이는 것만 폭력인가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영국의 가정폭력 관련 법은 조금씩 강화되었다.

1976년 가정폭력 및 혼인소송법(Domestic Violence and Matrimonial Proceedings Act)이 제정되어 피해자가 접근금지 명령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에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보호를 강화하는 추가 입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법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었다. 폭력은 물리적인 것이라는 전제. 멍이 들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상처가 남아야 폭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 배우자가 매일 아침 그날 입을 옷을 지정해줬다. 

2. 어떤 친구를 만날 수 있고 만날 수 없는지를 정했다. 

3. 전화 통화 내용을 감시했다. 

4. 돈을 주지 않거나, 돈을 쓸 때마다 허락을 받게 했다. 

5. 외출할 때는 항상 행선지와 귀가 시간을 보고해야 했다. 

=> 이를 조금이라도 어기면 분노했지만, 그 분노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냉담함이나 언어적 압박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에 신고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증거가 없습니다. 신체적 폭력의 흔적이 없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에반 스타크와 ‘강압적 통제’ 개념의 탄생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법의학 전문가인 에반 스타크(Evan Stark)는 수십 년간 가정폭력 피해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기존의 법적 틀이 포착하지 못하는 패턴을 발견했다. 그는 2007년 저서 『강압적 통제: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개인적 삶 속에 가두는가(Coercive Control: How Men Entrap Women in Personal Life)』에서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스타크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가정폭력의 본질은 개별적인 폭력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통제의 패턴이라는 것. 피해자가 경험하는 것은 한 번의 구타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고립되고, 정체성을 침식당하는 장기적인 과정이라는 것. 그는 이를 ‘자유에 대한 범죄(a crime against liberty)’라고 불렀다.

스타크가 세운 개념은 영국에서 특히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영국의 가정폭력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법적 변화를 위한 근거를 찾고 있었고, 스타크의 이론적 틀은 그 근거를 제공했다. 특히 2010년대 초반 여러 충격적인 살인 사건들이 잇달아 공론화되면서 법 개정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높아졌다. 대부분 피해자들이 목숨을 잃기 전, 경찰에 수십 번 신고했지만 매번 증거 불충분으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던 케이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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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세계 최초의 입법

 

2015년 12월 29일, 영국에서 심각한 범죄법(Serious Crime Act 2015)이 발효되었다.

이 법의 76조는 역사적인 조항이었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강압적 또는 통제적 행동(controlling or coercive behaviour in an intimate or family relationship)을 형사범죄로 규정한 것이다. 최대 5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였다. 신체적 폭력의 흔적이 없어도, 지속적인 심리적 통제와 압박이 입증되면 처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계 최초였다.

법이 제시한 강압적 통제의 구체적 사례들은 다음과 같았다. 피해자의 일상적인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 피해자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것, 피해자의 금전을 통제하는 것, 피해자의 이동을 제한하는 것, 피해자를 반복적으로 비하하거나 모욕하는 것, 피해자가 도움을 구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이제 법적으로 범죄였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테레사 메이(Theresa May)는 입법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가정폭력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삶 전체를 지배하는 패턴이라고. 피해자들은 자신의 집에서 공포 속에 갇혀 살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왔다고. 이 법은 그 침묵을 깨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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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ous Crime Act 2015의 소개 서문

 

법이 만들어진 후

 

하지만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강압적 통제는 여전히 입증하기 어려운 범죄였다. 피해자의 진술 외에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경찰과 검찰이 이 새로운 범죄 유형에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2015년 법 발효 이후 초기 몇 년간의 기소율은 활동가들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낮았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강압적 통제의 핵심은 피해자가 자신이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이것이 정상이라고, 이것이 사랑이라고, 이것이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렇게 내면화된 피해자는 스스로 신고하지 않는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소설 『산산이 부서진 남자』 속 가해자가 바로 이 기술을 사용한다. 피해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 강압적 통제의 가장 정교한 형태는 통제받는 사람이 통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통제

 

2015년 이후 영국 사회는 강압적 통제의 새로운 형태들과 마주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는 통제의 도구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위치 추적 앱을 통해 파트너의 실시간 위치를 확인하는 것, 소셜 미디어 계정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하는 것, 친밀한 사진이나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는 것. 이른바 ‘테크 어뷰즈(tech abuse)’는 기존의 강압적 통제 법률로 다루기 어려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

2021년 영국 정부는 기존 법률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디지털 형태의 강압적 통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강화했다. 온라인 안전법(Online Safety Act, 2023) 역시 디지털 공간에서의 통제와 괴롭힘을 다루는 조항들을 포함했다. 보이지 않는 폭력과 싸우는 법의 역사는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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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 Safety Act, 2023의 서문

 

소설이 법보다 먼저 알았던 것

 

『산산이 부서진 남자』는 2008년에 출간되었다. 영국이 강압적 통제를 범죄로 규정하기 7년 전이다.

작가인 로보텀은 소설 속에서 피해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면서도 사실은 완전히 통제당하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묘사한다. 그것이 독자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메커니즘이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형태로 제시되어 있지만, 그 원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거나 목격하는 것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때로 법보다 먼저 사회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을 포착한다. 강압적 통제라는 개념이 법적으로 인정받기 훨씬 전부터, 문학은 그것을 묘사해왔다. 영국 소설의 긴 전통 속에서 보이지 않는 통제는 언제나 중요한 주제였다. 사회가 그것을 범죄라고 부를 언어를 갖기 훨씬 전부터.

법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언어가 법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먼저 만드는 것은, 때로 소설이다.


생각해볼 질문들

  • 강압적 통제의 가해자들은 종종 자신의 행동을 사랑의 언어로 포장한다. 질투는 사랑의 증거로, 감시는 관심으로, 고립은 둘만의 세계로. 우리는 관계 안에서 이 언어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받아들이는가. 사랑의 언어와 통제의 언어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 강압적 통제의 가장 무서운 측면은 피해자가 자신이 통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소설 속 피해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런 순간을 알아챌 수 있는가.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는 믿음이, 사실은 누군가의 설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가능성을 어떻게 점검할 수 있는가.

읽으면서 들으면 좋은 음악

  • The Police – ‘Every Breath You Take’ (1983) 발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아름다운 사랑 노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작곡가 스팅(Sting) 본인은 이 노래가 소름 끼치는 집착과 감시에 관한 것이라고 누차 밝혔다. 이 칼럼을 읽기 전에 한 번, 읽고 난 후에 다시 한 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두 번째 청취에서 곡이 다르게 들릴 것이다.

다음 주 예고

가해자를 잡으려면 가해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다음 주에는 영국 범죄 심리학과 프로파일링의 탄생을 따라간다. 시작은 1888년 런던이다. 이스트엔드의 골목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사건.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고, 범행 방식은 충격적으로 유사했으며, 범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우리가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라고 부르는 그 사건에서, 외과의사 토머스 본드(Thomas Bond)는 범행 현장의 증거만을 가지고 범인의 성격과 행동 양식을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범죄자의 심리를 추론한 최초의 공식 문서로 꼽히는 기록이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뒤, 범죄 심리학은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FBI의 행동과학부(Behavioral Science Unit)가 체계적인 프로파일링 기법을 개발했고, 그 기법이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영국식 범죄 심리학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영국의 프로파일링 역사에는 화려한 성공만큼이나 치명적인 실패도 있었다. 잘못된 프로파일이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진짜 범인이 그 사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던 사건들이 있었다.

범죄자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그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나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경계가 흐려진다. 범죄자를 이해하는 사람과, 범죄자처럼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경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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