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政治)와 좋은 삶"은 평화와 커먼즈의 관점에서 현실을 조망하는 언론 <더슬래시>가 2021년부터 2023년까지 발간한 글들을 담은 전자책 <교차하는 말들>의 다섯 번째 챕터입니다. 서로 다른 일상과 활동 속에 살아가는 여러 필진들의 눈으로, 교차하고 변화하는 우리의 삶들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보문고와 알라딘에서 전자책을 구매하실 수 있어요:)
2022년, 판교의 한 건물 신축 공사 현장의 승강기가 갑자기 추락해 두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1월 첫날에는 경기도 양주의 삼표산업 채석장에서 토사 붕괴로 세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고, 1월 11일에는 전라도 광주의 현대산업건설 아이파크 신축 공사장에서 여섯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좋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치가 이미 ‘좋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를 향해야 하므로, 일부에게만 ‘좋은 삶’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정치’의 목표가 달성되었다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선거철마다 성소수자들은 번번이 정치권에 강제로 소환됩니다. 정치가 성소수자들을 소환하는 이유가 “권리 보장을 위한 정책 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찬성과 반대, 합의 대상 혹은 후보들이 권력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지요. 한나 아렌트의 시선에서 본다면 “차별금지법”은 정치가 존재하기 위한 이유가 아니라 정치가 시작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누군가의 “생존”이 위협받는 현실은 아렌트가 말한 정치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으니까요. 정치는 이성애자만의, 정상가족만의 ‘좋은 삶’이 아니라 모두의 ‘좋은 삶’을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의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은 모두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해도 되는 사람과 정치하면 안 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일까? 오늘 출하한 딸기의 가격을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알 수 있는 불확실성 속으로 “농민”을 떠미는 사회 구조, 그리하여 “농민”들의 삶에 떠넘겨진 불안에 대해 말합니다. 수도권 중심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농촌을 주변화해 온 정치는 “농촌”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농촌”을 대상화하고 주변화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 그 목소리는 농촌의 새벽처럼 싱그럽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정체성의 정치”가 가지는 한계를 모든 주체를 일일이 호명하는 것의 불가능성에서 찾습니다. 모든 정체성을 완전하게 호명하는 것은 완결 불가능한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모두의 좋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그 ‘모두’를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때의 ‘모두’는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지만 그 존재들을 연결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사회적 끈”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할 거예요. 결국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종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 다른 존재의 ‘좋은 삶’이 나의 ‘좋은 삶’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며 양립해야 한다는 윤리적 책무를 이해하는 그 지점에서 “정치”는 비로소 시작되는 것일 테니까요.
- 정치(政治)와 좋은 삶에 실린 글들은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쓴 글임을 밝힙니다.
"정치(政治)와 좋은 삶"에 담은 글
- 표가 되는 정치’, ‘머릿수 정치’를 거부한다 /박동찬
- 차별금지법 있는 나라, 성소수자 시민에게 시민의 권리를 /지오
- 딸기와 메아리와 돌멩이의 정치 /푸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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