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시선

[건축가시선] 아파트공화국에서 살아남는법

설계사무소의 딜레마, 오늘은 검토프로젝트에 관한 볼멘소리 입니다.

2024.01.19 | 조회 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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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레터

평범한 30대 직장인 건축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저는 이렇게 살고 있어요. 당신의 삶은 어떤가요?

안녕하세요. [건축가시선]에서는 건축을 업으로 하면서, 건축을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내용들, 고찰들, 이야기들, 현상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건축물들. 그런 건축물을 만드는 건축가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 지난 주말 안과를 다녀왔다. 다래끼 치료 후 한번 더 방문하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주말 시간을 내어 병원을 찾았고, 의사선생님은 잘 아물고 있다며 다음주에 한번 더 오라고 했다. 20분을 기다리고 1분동안 의사선생님을 마주한 후 나는 5,900원을 지불했다.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것 만으로도 당연히 우린 돈을 지불한다. 의료보험으로 인해 고작 몇 천원에 불과 할 지라도 사회가 정한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고 나온다. 그들의 전문성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며 내가 받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합당한 대가이기도 하다.  

# 우리 회사 프로젝트 서버에는 수십개의 프로젝트가 생성되어있다. 그 중에 실제로 진행중인 것은 단 하나. 수십개의  프로젝트 중 계약을 하고 진행되는 건은 단 하나이다. 이 하나를 제외한  프로젝트를 우리는 검토 프로젝트, 검토건이라고 부른다. 주로 주상복합, 공동주택 등 분양관련 프로젝트에 한한다. 법적인 사항을 검토하고, 대략의 세대수와 동선, 배치, 주차장의 규모 등 러프하지만 그렇다고 터무니 없어서는 안되는 계획안을 만들어 낸다. 지극히 사업적인 마인드에서 이루어져야하는 프로젝트이다. 건축가가 아닌 법조인이 되어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학적 계산으로 최대 용적률, 최대 세대수를 뽑아낸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결과물이다. 그래야 사업수지를 분석하고, 적절한 가격에 땅을 사고, 수익성을 따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사무소 입장에서도 예비건축주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우선 고무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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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이런 프로젝트들은 전부 무료 서비스라는 점이다. 1개의 프로젝트를 실제로 진행시키기 위해 우린 수십여개의 프로젝트를 무료로 검토해주고 있는 현실이다. 검토 프로젝트는 대부분 이렇게 들어온다. <이거 곧 진행될 사업입니다. 곧 계약 후 진행할테니 최대용적률로 검토 부탁드립니다.> 초년시절엔 곧 진행된다는 말에 설레기도 했고, 많은 준비를 하기도 했다. 이젠 알고 있다. 대부분은 없어져버릴 사업이거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 다른 설계사로 넘어갔거나 한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만 일말의 희망과 수주에 대한 간절함으로 늘 최선을 다해 무료 서비스를 해주고 있다. 

# 건축주/사업주 입장에서는 건축사무소에서 해주는 이런 검토의 작업물들이 그들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일으키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물들이라는 것은 우리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수 십억, 수 백억의 자본이 투입되는 사업이기에 신중할 수 밖에 없으며 쉽사리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진짜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은 수 백억의 사업 모델을 진행 시키기 위한 근간이 되는 작업물을 어떻게 무료 서비스로 요청하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너무 당연하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린 왜 우리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당연히 받아야할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검토 프로젝트가 실제로 계약으로 이루어져서 사업이 진행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진행되지 않는 프로젝트가 수십여개이고 우린 감감무소식을 그저 지나가버린 여느 검토건 중 하나이구나 라고 치부해버린다. 1년에 수 많은 무료 검토건들이 들어와 우리도 그 아웃풋의 수준을 정하기에 이른다. 적당한 선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그 적당함 속에서 빠른 시간안에서 해치워버리는 업무의 한 영역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멋진 계획안이 나오지는 않는다. 무료이기에 그래서도 안된다. 그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 그렇다고 우리가 검토건을 거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무소의 가치관과 소장들의 건축적 철학에 큰 영향을 받겠지만, 늘 아쉬운건 우리다. 검토를 해줄 설계사무소는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혹여나 하는 생각에 이번에도 검토건을 진행한다. 이번 검토건에는 약간의 아이디어를 가미해서 보행자들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보행통로를 계획했다. 하지만 이런 건축적 아이디어는 검토건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세대수는 최대로, 공용부의 면적과 주차대수는 최소로. 언제나 같은 목적으로 검토건이 들어온다. 이렇게 검토를 해주는 것도 아주 큰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현실이다. 혹여나 이렇게 만들어준 검토건이 계약 후 프로젝트로 진행되더라도 생각보다 건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미 그들은 검토해준 면적과 세대수가 기준이 되어 버려서 무언가 더하거나 뺄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사실 이제부턴 더 이상 건축이 아니게 된다. 건축이라기 보단 사업과 건설에 가깝다. 건축은 언제나 상상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렇게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그 상상을 가로막으며 건축이라기 보단 그저 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설계사로 전락해버리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 검토건의 장점도 있다. 정말 많은 땅을 만나고 지역마다 다른 법규를 검토하고 대략의 볼륨과 세대수를 만들어내는 감을 성장시킬 수 있다. 즉 분양 사업에 관련한 감각을 키울 수 있으며 어느정도 이런 반복되는 작업으로 우리의 스킬을 기를 수 있다. 프로젝트 서버 그 어딘가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아까워 늘 회사에 제안하고 있다. 이렇게 서버에만 있는 수많은 검토건들을 우리의 포트폴리오와 데이터 베이스로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돈이 되진 않았지만 자산으로 남아있는 이 프로젝트들을 잘 정리하자고.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게으름 때문인지 회사는 관심이 없다.

# 건설경기가 안좋아지며 건설비용의 증가로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수도 줄어들고, 사업주의 자금사정, PF에 진행되는 수 많은 프로젝트들이 홀딩되거나 지지부진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도 중단된 프로젝트에 대해 용역비를 청구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며, 건설비용이 증가하니 건축설계비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저 서비스 비용 정도로만 치부되고 있는 현실이 슬프고 답답하기만 하다. 우린 어떻게 우리의 전문성을 인정 받아야 하는 것일까. 건축가는 박봉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언제까지 인정해야하며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 내리는 일들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 건축가로서 잘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우리의 수익모델을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건축가의 수익모델은 건축설계가 전부였다. 건물을 짓기위한 건축설계. 그렇다 보니 건물이 지어지지 않는다면, 즉, 사업이 멈춘다면 건축설계가 진행되었다는 용역이 성립되지 않게된다. 계약서에 단계별 용역비 지급 비율이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 사업이 멈추면 그 대가를 정당하게 요구하기 어려워진다. 건축가에게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업 모델이긴 하지만 우린 다양한 영역으로 우리의 전문성을 넓힐 필요가 있다. 

# 최혜진 작가의 <에디토리얼 씽킹>에서 말한다. 소수의 공급자가 주도하던 과거엔 에티터라는 직업은 잡지업계에서만 통용되는 낯선 직업이었다.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잡지는 사양산업이 되어갔고 자연스레 에디터는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오히려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니 그 모든 분야에 에디터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종이 잡지가 사라지더라도 모든 분야가 저마다 미디어를 기반으로 잡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에디터의 일은 오히려 더 다이나믹해졌다. 건축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건축의 수요는 현재 건설사와 디벨로퍼들이 주도하는 대형 아파트 단지 설계가 만연하지만, 설계 너머 건축적 작업이 필요해지는 많은 분야가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에디토리얼 씽킹>에서 말하듯이 정보와 지식 기반 산업이 커지고 산업 경계가 무너지면서 물리적 아웃풋 보다는 연구, 분석, 문제해결, 서비스 개선, 경험 기획 등 작업 프로세스가 직업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가상의 메타버스에서도 건축 작업은 필요하며, 다양한 도시 연구 시뮬레이션에도 건축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과 사회비판을 담은 많은 글 들도 세상에 필요하며, 생각보다 많은 분야에서 3D작업물들도 필요하다. 핫한 팝업전시와 세미나등에서도 건축은 필요하다. 우린 점차 우리의 파이를 키우며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획, 프로그램 교육과, 출간, 상품 제작, 그림 전시, 팝업 등 건축가의 정체성을 담은 무언가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고 다른 분야와의 협업 할 수 있는 그 교집합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젠 그래야만 하는 시대이다. 잡지사 에디터라고 단정 짓는 순간 에디터의 한계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제 우리도 설계만 하는 건축가라고 단정 지어서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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