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습의 종말" 시대, 다시 '학습'을 고민하다
요즘 주변을 보면 '학습의 위기'라는 말이 실감 납니다. 한때 열풍을 일으켰던 코딩 공부가 그 열풍이 가시기도 전에, 이제는 가장 학습할 필요가 없는 영역 중 하나가 되고 있는 듯합니다. 대학에서는 학생이 제출한 과제를 AI가 작성했는지 판단하는 AI를 돌릴 정도라고 하니, 우리가 왜 배우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의 팔런티어(Palantir) CEO는 "학위는 중요하지 않다"며 “대학을 나오지 않은 인재를 오히려 선호한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이 가르치는 교육의 내용을 왜 4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며 학습해야 하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학을 나오지 않은, 또는 대학을 빠르게 자퇴한 잠재력 높은 인재를 채용해서 조직이 필요로 하는 자체 교육을 4개월간 진행하고 업무에 투입시킨다고 합니다. 과거로부터 축적해 온 지식이 빠르게 대체되거나 변화하고, 또 그 지식마저 손가락 몇번으로 쉽게 구할 수 있다보니, 어쩌면 전통적인 의미의 '학습'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학습'의 효용이 의심 받는 시대에, 비즈니스 현장의 치열한 리더들은 오히려 '학습민첩성(Learning Agility)'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통기한이 짧으니 더 빠르게 학습하기를 기대하는 것일까요?
제가 무신사에서 HR 리드로 일할 때,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던 당시 CEO께서는 ‘학습민첩성’에 대한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셨습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문제해결력’을 꼽았고, 이 문제해결력의 핵심이 바로 ‘학습민첩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핵심인재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관련 글 : https://abit.ly/iz6o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HR을 업으로 하는 저조차 반사적으로 ‘학습’이라는 단어에 먼저 꽂혔습니다. ‘결국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빠르게 학습하는 것이 핵심이겠구나’ 하고 말이죠. 사람들이 학습할 수 있는 역량은 한계가 있으니, 결국은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누적적인 경험을 해야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고, 이러한 방향은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Input을 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핵심인재라고 부르는 구성원들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Input을 투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AI 시대의 미래를 그려보다 보면 더 시간을 많이 들이는 단순한 방식으로 ‘학습민첩성’을 발휘하는 것이 왠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진지하게 그 정의를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 커뮤니케이션과 말하기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 하나를 예로 들어볼까요? 바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입니다. 흔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다'고 하면 유창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거나 회의를 주도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 많은 분이 경험하셨다시피, 현장에서 진짜 일 잘하는 리더들이 정의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건 화려한 언변이라기보다, 때로는 입을 다물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경청이었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해 내는 '상호 이해와 합의의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말을 아무리 잘해도 합의를 못 만들면, 그건 그냥 '말이 많은 것'일 뿐이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학습 민첩성'이라는 단어도 비슷하게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HR을 하는 우리조차 '민첩성'이라는 본질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Learning(학습)'이라는 단어에 더 집중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채우는 것만큼 '비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데이터들을 찾아보니 꽤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지난 10년간의(2011~2020) 국내 학습민첩성 관련 연구 67편을 분석한 연구 논문(https://abit.ly/eh628n)을 보니, 연구의 출처가 경영 현장이 아닌 '교육대학원'이나 'HRD 관련 학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논문의 저자들도 HRD 관점의 접근이 핵심이고, 결과 또한 ‘학습’ 태도 (목표 지향성, 자기주도 학습 등)와 관련된 변수와의 상관관계에 집중합니다. 어떻게 보면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학습민첩성’ 이라는 역량을 '교육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구글에 ‘학습민첩성’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관련 게시글의 저자는 대부분 HRD 전문가, 교육담당자, 리더십 전문가 등 교육과 연계된 지점을 바라보는 직무에서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해보세요. ^^)
하지만 이 개념을 처음 만든 연구자들의 정의를 다시 살펴보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중요한 반쪽이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학습’이 아닌 ‘민첩성’ 인데요. 심지어는 민첩성을 "새로운 것을 배우는 능력"뿐만 아니라, "과거의 방식을 버리는 능력(Unlearning)"으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습 민첩성의 가장 권위 있는 정의(Lombardo & Eichinger, 2000)를 다시 뜯어보면 명확합니다.
"Learning agility is defined as the willingness and ability to learn from experience and apply that learning successfully in new situations."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그 배움을 새롭거나 처음 겪는 상황에 적용하여 성과를 내는 능력
여기서 핵심은 'To Learn(배우는 것)'이 아니라 'New or First-time conditions(처음 겪는 상황)'입니다. 즉, 교실에서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이 아니라, 지도가 없는 정글에 떨어졌을 때 길을 찾는 생존 본능에 가깝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능력(Knowing what to do when you don't know what to do)"이라고 요약합니다.
우리는 흔히 학습을 지식을 쌓아가는 '덧셈(+)'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누적적 경험을 생각했었고요. 하지만 급변하는 환경에서 민첩성은 오히려 '뺄셈(-)'에 가깝습니다. 과거에 나를 승진 시켜 주었던 성공 방정식, 익숙한 업무 프로세스를 과감하게 폐기(Unlearning) 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AI가 코딩을 하는 시대에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성실함이 아니라 도태의 신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생각하는 학습민첩성의 진짜 이름: '용기'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학습민첩성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지능'이 아닌 '용기'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현장에서 제가 목격한 '진짜 민첩한 인재'들은 세 가지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HR이 마주한 딜레마: 학습민첩성 학습할 수 있나요?
학습민첩성은 타고나는 것일까요? 학계에서는 "개발 가능한 역량이지만, 기질적 토대가 필수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100% 타고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나 길러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입니다. '자기 인식'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이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학습 민첩성이 낮은 사람은 역설적으로 '학습 민첩성을 훈련해야 할 필요성'조차 학습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AI 시대에는 사람의 역량이 AI를 통해 증강되고, 개개인의 성과 격차는 제곱으로 확대됩니다. Top Talent는 극단적으로 높은 성과를 내지만, 반대는 오히려 성과가 더 낮아질 수 있습니다. 쇼피파이 CEO인 뤼르케는 "이전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을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들을, 많은 직원이 AI를 본능적이고 탁월하게 활용하여 업무 효율을 100배나 끌어올리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관련글 : https://abit.ly/5glzsv)
어쩌면 학습민첩성이라는 기질의 차이는 AI 시대에 성과의 '빈익빈 부익부'를 더 가속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주변에서도 그러한 모습들이 많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변화를 즐기는 개발자는 AI를 통해 생산성을 극단적으로 높이지만, 변화를 두려워하는 분들은 오히려 AI 활용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더 뼈아픈 건, 우리 HR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하고, 규정을 준수하며, 변수를 통제하는 훈련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즐겨라", "실패하며 배워라"는 요구는 본능을 거스르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HR인 우리가 가장 민첩해지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자문을 하게 됩니다.
민첩해질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해 보면 어떨까요?
학습 민첩성이 '용기'의 문제라면, 교육으로 이것을 키워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학습민첩성이 중요한 시대니 틈을 내어 더 많이 공부하세요”라고 독려하는 방식에서는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대신 구성원들이 용기를 낼 수밖에 없는 '안전한 장치'를 설계해 보면 어떨까요?
학습민첩성은 조직장의 훈계나 동기부여 유튜브가 아니라 현장의 불확실성 속에서 길러지는 것 같습니다. 과거를 비우는(Unlearn) 결단과 두려움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HR은 구성원들이 그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든든한 '생존의 시스템'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기질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인재를 발견하고 확보하는 것 부터가 시작 이겠지만요.
끝으로, HR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학습민첩성’ 기질을 다시 깨우고,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훈련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입니다. 비즈니스의 생존과 성장에 기여하는 HR이 되어야 우리도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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