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 한강 작가의 책을 한권쯤 갖고 계신 분들이 제법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해, 읽다가 중간중간 내려놓은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작가의 책은 대개 쉬운 내용도, 편한 내용도 아닙니다. 특히 가장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인 <작별하지 않는다>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시적산문',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불친절한 문장의 병렬적 구성에 가깝습니다.
제주 4.3사건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중반부까지 소설은 모호한 독백과 비현실적인 묘사의 연속입니다. 화자인 경하와 친구 인선의 대화나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중간중간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고요. 많은 문장이 도치법으로 배열되어, 인물의 말이나 태도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발화의 목적을 더욱 흐릿하게 만듭니다.
경하의 친구 인선이 자신의 집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하는 데서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정확히는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한 인선이, 기르는 새가 죽지 않도록 먹이를 전해주라는 부탁이지요. 문제는 인선의 집이 위치한 중간산 마을은 제주에서도 4.3사건 이후 더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인적이 드문 마을이고, 지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씨라는 겁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소설 전반에 드리운 눈보라처럼, 이를 뚫고 찾아가야만 하는 여정처럼 사건을 마주하는 과정은 불투명하고 위태롭습니다. 눈은 때로 성글고 흰 실밥같은 눈송이들이 모인 듯, 물기가 많고 입자가 작은 눈송이들이 가느다란 선들을 수직으로 그으며,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 싶다가도. 수천수만의 새떼 같은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숨막히는 밀도의 눈보라가 됩니다. 어렵사리 눈보라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 경하는 인선과 그의 어머니 정심을 따라 4.3사건으로 점점 들어갑니다.
새
눈과 새는 그 하나하나는 지극히 가볍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세계를 공평하게 덮어주고 이어지는 삶을 견디게 해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미 죽은 정심을 떠올리게 하는, 할머니의 얼굴 위로 내리는 눈처럼요. 문득 손을 뻗어 노인의 흰 눈썹에 맺힌 눈송이를 닦아 내주고 싶다는 경하의 생각은 타인의 고통을 애도하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행동은 4.3사건 당시 시신의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어린 살 얼음이 낀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던 정심의 기억과 겹쳐집니다. 자행된 폭력이 인정되기 전, 역사에서 지워졌던 사람들. 당시의 압도적인 폭력 하에서는 애도조차 허락되지 않아, 지극한 고통을 아무렇지 않은 척 감추고 살아남아야 했죠. 마치 죽기 직전까지 횃대에서 떨어지지 않는,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새들처럼요.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 개씩 잘려나간 손과 발의 사진이 벽에 붙어있는 게 보였다. 눈을 피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잠시 들여다봤다. 오히려 실제보다 무섭게 기억할 수도 있으니 제대로 보려는 거였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건 제대로 볼 수록 고통스러운 사진이었다.
...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 의사가 환지통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경하가 인선의 집을 향해 새를 찾아가는 길은 지워진 역사의 희생자를 되짚어가는 여정인 양 험난합니다. 생사를 알려주고 현실로 나를 끌어내줄 인선과의 통화가 이유도 모르게 유보되는 동안. 어두운 갈래길에서 발을 헛디뎌,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눈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동안. 경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 길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고, 거리는 커녕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제주 4.3사건 이후 끊어진 소식에도 생사의 확인이나마 포기하지 못하고 추적하는 여정을 연상시킵니다. 인선과 그의 어머니 정심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생사조차 불투명한, 압도적인 폭력 앞에 지워진 이름들을 몇십년 간 추적합니다. 한줄기 빛만 있어도 짚어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지말 걸, 거절할 걸, 끊임없이 후회하면서도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움직임. 제대로 보기 시작하면 고통스럽지만,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의 기록을 되짚어갑니다.
밤
내가 너를 묻었는데, 어젯밤에.
꿈일까, 의심하며 나는 말했다.
...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겨우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는 이미 죽은 새를 마주합니다. 경하는 새의 시체를 나무 아래 묻습니다. 그러나 새가 다시 살아돌아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혼란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먹지 못해 굶어죽은 새에게 물을 주고 밥을 주는 일. 죽은 다음에도 배고픈 게 있나, 죽은 다음에도 추운 게 있나, 죽어도 다시 잠드는 게 있나 걱정하는 일. 이는 곧 죽음을 잊지 않는 일, '작별하지 않는' 일입니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한 틈을 타 경하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혼이 된 새의 안내를 받아, 경하는 혼의 모습으로 찾아온 걸까요. 경하와 인선 중 혼이 된 존재는 누구일까요. 인선이 경하를 '하도 생각해서 어떤 날엔 꼭 같이 있는 것 같'았던 것처럼, 경하도 인선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느끼게 된 걸까요. 재회한 둘은 오랫동안 미뤄둔 프로젝트를 다시 이야기합니다. 바닷가 무덤을 위해 나무를 깎고 검게 칠해 묘비를 만드는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작별하지 않는다'입니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작별하지 않는다는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요. 인선은 오랫동안 타국의 고통을 기록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녀가 기록한 폭력의 생존자들은 생사의 고비를 넘어, 추운 눈 속이 오히려 더 포근했고 발가락이 떨어져나간 일 '정도는'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게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을 헤치고 살아남았습니다. 인선은 '대만에서 삼 만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던' 것을 추적하고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종종 생각하던 인선. 그녀에게 4.3사건을 좇는 일은 너무나도 가까운 고통이라, 지나치게 압도적이고 폭력적이라, 어쩌면 집을 무작정 나갔던 어린 시절처럼 외면하고 싶었던 일이었을 겁니다. 산을 넘을 때까지 고향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으면 자유가 되는 설화 속 여인처럼 말이죠. 그렇게 인선은 제주를 떠났고, 다른 삶을 살고자 했지만요. 결국 뒤를 돌아본 설화 속 여인처럼 다시 제주에 돌아옵니다.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뒤돌아보면 돌이 될지언정, 기어코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거겠지요. 역사에서 지워진 마을을 뒤로 하고 홀로 살아남는다는 것, 내 터전과 내 사람들을 묻어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인선이 아직 만주를 촬영하고 있던 십년 전, 제주공항 아래 유골들이 발굴되었다는 가을. 그 날부터 인선이 누군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 방의 온도가 달라지는 느낌, 무언가 따스한 기체의 덩어리 같은 게 주위를 채운 것 같은 상태를 경험하는 것처럼요.
경하는 집에 돌아온 인선이 내민 상자를 받아듭니다. 상자 안에는 어떻게 그녀가 제주에 내려가 혼자 살고 있는지, 수 년동안 무엇을 해왔는지 기록한 것들이 있습니다. 치매로 정신이 흐려진 엄마가 계속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들. 사건 당시 총에 맞아 죽어가는 동생, 배에 구멍이 나고 턱뼈가 부서진 피흘리는 갓난아기를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 먹이던 어린 정심의 기억같은 것들.
기억을 따라 깊이 내려가면, 인선의 어머니 정심의 기억 깊은 곳에 가 닿으면. 오십팔년 전의 날짜를 꾹꾹 눌러 쓴, 삭은 귀퉁이가 부스러지는 신문 스크랩이 나옵니다. 인선의 외삼촌, 오빠의 생전 행적을 끈기있게 추적하던 젊은 시절의 정심이 거기 있습니다. 그 뒤로 삼십사년이 지나서야,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다시 기사들이 등장합니다. 희생자가 묻힌 광산을 발굴하려는 시도, 갱도를 밀봉한 콘크리트를 부수자마자 쏟아져 나온 어마어마한 유해들에 대한 기록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 엄마라고 생각했어.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정심은 4.3사건과 단 한순간도 '작별하지 않았'습니다. 유족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멤버였던 엄마의 모습을, 인선은 엄마의 장례 후 다른 유족회 사람의 입을 통해 듣습니다. 유족회를 통해 생존자 청년이 한 사람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 그 청년이 외삼촌이었을 확률이 0에 수렴하더라도 0이 아닌 것처럼, 갱도에 있는 유해 삼천 구 중 어떤 것도 외삼촌일 수 있는 것처럼. 두 개의 상태에 그날 밤의 오빠가 동시에 있게 된 뒤부터, 엄마 안에서 분열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인선은 말합니다.
불꽃
노환과 치매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진 정심은 밤마다 아이처럼 기어서 인선을 찾아 문턱을 넘습니다. 도와주라. 나 도와주라 인선아. 병세가 악화된 엄마를 등지고 누워 인선은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당신을 내가 구해. '사실은 죽고 싶었다. 한동안은 정말 죽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고 인선은 고백합니다.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노쇠한 정심은 하루의 삼분의 이, 나중엔 사분의 삼 이상 잠을 잡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낸 마지막 한달은 거의 종일 잠들어있었죠. 이상하지. 엄마가 사라지면 마침내 내 삶으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갈 다리가 끊어지고 없었어. 더 이상 내방으로 기어오는 엄마가 없는데 잠을 잘 수 없었어. 더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부드러운 불꽃의 잔열처럼, 어둠 속의 길잡이처럼 촛불의 빛에 의지해서 인선과 경하는 책의 가장 처음에 언급된 바닷가의 무덤 자리를 찾아갑니다. '작별하지 않기' 위한 프로젝트. 꿈속에서 마주한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사람처럼 조금씩 다른 키의,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는 나무들. 마치 수천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모양인 양 심겨져 있는, 묘지와 같은 나무를 조각하는 일.
죽고 싶었던 인선을 삶에 붙들어준 것은 '작별하지 않는' 애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폭력의 기록, 고통을 똑바로 목도하는 일은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이상 알 수 없게 될'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는 일이지만.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에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증언하는 일.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 바람의 몸을 입은 죽은 사람들의 혼을 가르며 걷는 일. 그렇게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일.
죽음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나.
뺨에 닿은 눈이 이토록 차갑게 스밀 수 있나.
그렇게 인선과 경하를 통해, 우리 또한 역사에서 지워진 폭력과 고통, 죽음을 마주보고 기억합니다. 소설을 통해 그들의 삶을 잠시나마 함께 살아봅니다. 살아내봅니다. 이 지난한 소설 읽기를 멈추지 않고, 눈을 허물고, 깊이 침잠하고, 기어가 서로의 얼굴에 쌓인 눈을 닦아주는 마음으로.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는 자세로. 우리가 기억한다면, 4.3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은 아직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숨쉬는 걸테지요. 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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