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어떤 책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만나게 됩니다. 그레이슨 페리의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이하, <안내서>)가 저에게는 그런 책이었어요. 우습게도 미용실에서 스태프가 제 앞에 놔준 책이었어요. 항상 제목 때문에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책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스태프의 호의를 받아 몇 페이지를 읽었어요. 그리고 덮었죠. 왜냐하면, 사서 보고 싶어졌거든요. 동시대 미술에 대한 아주 훌륭한 “안내서”였어요. 그것도 아티스트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었죠. 이 산업에 대한 통찰력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nama%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편지를 씁니다.
동시대 미술이라는 산업
갤러리에 자주 가세요? 상업 갤러리에 가면 막막하죠. 왜냐면 하얀 공간에 작품만 있으니까요. 설명이나 제목도 없이 작품 앞에 서면 머리가 하얘지고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사실 미술이 상품이라는 점을 보여주죠. 작품을 가장 잘 보이게 하는 VMD의 방식입니다. 아트테크가 여전히 유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갤러리에 들어가면 작품을 사고 싶다는 마음으로 둘러보세요. 그 순간이 이 산업의 일부러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산업은 “폐쇄적이죠.”
물론 지금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도 대중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가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는 예술가와 딜러와 수집가로 이루어진 폐쇄회로가 충분한 역할을 해주어 더 넓은 관객층의 지지가 딱히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대중이 지불하는 임금을 받거나 대중의 반응에 따라 자긍심이 오르내리는 예술가가 아니라면 자기 작품이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굳이 대중의 반응이 필요하지 않다.
그레이슨 페리,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원더박스, 2019, p.20
동시대 미술의 가치는 자주 “경매가”와 “생존작가 최고가”와 같은 가격으로 평가되고는 합니다. 미술의 가치는 주관적이라서 나에게는 세상 최고의 명작이 남에게는 가치가 없는 작품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한 가치판단을 남들이 말하는 것, 객관적으로 보이는 숫자 등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작품은 다양한 기준을 적용받죠. 미술관에 들어갈 만한가. 우리 집에 어울리는가. 세금 혜택은 얼마나 받을 수 있는가. 미술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련되었는가. 내 컬렉션과 잘 어울리는가.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평가 기준 때문에 오히려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건 복잡해졌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을 구매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기존의 물건을 사는 상업적 과정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해야합니다. 대량 생산된 것을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한다. 이 과정을 완전히 무시하죠. 머뭇거리다가는 가격과 작품 모두 놓치게 된다는 점에서요. 게다가 미술로 재테크를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 작품의 미래 가격을 가늠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복잡해집니다.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많은 기준들이 서로 상충한다. 내 말은 금전적 가치도 있고 인기, 미술사적 의미, 미학적 세련됨도 있다는 거다. 이 모든 기준은 서로 충돌한다.
그레이슨 페리, 위의 책, pp.20-21
서로 충돌하는 기준 중에서도 결국 가장 많이 노출되는 산업적 기준은 ‘가격‘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원하는지 보다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해 누가 얼마나 큰 돈을 지불했는지가 작품을 잣대로 보여요. 그리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이 점유하고 있는 신화적 지위입니다. 그래서 동시대 미술이라는 산업에서 성공하는데 필요한 것은 명성과 숫자로 보이죠. 유명해지면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이것은 그레이슨 페리가 말처럼 작품의 질을 판단하는데 “대중의 반응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죠.(20p) 그리고 이러한 상태는 럭셔리 브랜드 혹은 브랜딩을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가장 성공한 방식일 것입니다.
’좋은 에술이란 무엇인가?‘처럼 명확한 답을 내기 어려운 흐물흐물한 문제에 직면할 때면 우리의 정신은 그 불편함을 감추려고 헛소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 아름다움의 주관적 본성이 이렇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다 보니 사람들은 미적 만족을 준다고 느끼는 대상에 대해 더욱 경험적인 설명을 찾게 된다. 나는 이게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나는 철학자 존 그레이John Gray의말을 즐겨 인용한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과학 이론이었다면 오래전에 논파되고 폐기되었을 것이다.”
그레이슨 페리, 위의 책, p.66
예술이란 무엇인가?
시각적 매체인 미술로서, 주로 예술가가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며, 만들기에도 보기에도 남들에게 보여주기에도 즐거운 그런 예술 말이다. 이런 정의는 예술사의 어느 시기를 대상으로 하든, 좀 거칠기는 해도 그 질문에 답하기는 괜찮은 출발점이었다.
그레이슨 페리, 위의 책, p.66
“예술사가 한스 벨팅Hans Belting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예술이라는 개념은 1400년경에 처음 등장했다고 생각했“(p.67)는데, 지금처럼 ‘예술’을 특별한 활동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약 600년정도 유지된 개념이라는 뜻이다. 미술은 그 이후로 복잡해다가 마르셀 뒤샹에 이르러 ’명명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예술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미술의 지평을 여는 서양미술사의 기념비적인 상황이기는 했지만, 다시 현대에 이르러 그 ’명명하는 권력‘에 대한 비평이 다시금 중요해지고 있다. 이를테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술이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지는 것이다. <모나리자>를 보러 가는 건 유명인을 보러 가는 일과 비슷한 거다. 사람들은 그저 그 그림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을 뿐이다. 나는 <모나리자>가 도무지 예술로 보이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예술이 예술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게 또 있는데, 그건 어떤 그림을 보면서 ’맙소사, 2억 5천만 달러짜리잖아!‘하고 생각하는 그런 반응이다.
그레이슨 페리, 위의 책, p.72
나는 예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동하는 이런 파괴적인 순간을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은 미술의 재화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트테크의 유행이 그런 방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오히려 미술이 가격으로만 표현될 때 그레이슨 페리가 지적하듯이 작품의 가치 자체가 낮아진다. 김환기의 <우주>는 소장가와 작가의 관계 그리고 두 쌍으로 이루어진 작품의 조형성에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그 작품이 홍콩 크리스티에서 132억 원에 낙찰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미술은 마치 랜섬웨어같다. 자본주의 안에서 경제적 가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버그처럼 작동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신화적 위치를 벗겨내려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지만 탈신화에 실패한다. 이 과정마저도 동시대 미술같다.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 미술사적으로 이해해 보려는 것. 우리 집에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취향에 따라서 선택하는 것. 취향 자체를 의심하는 것. 작가를 더 알아보려고 하는 것. 큐레이터의 안목을 믿는 것.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 미술을 구성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미술의 한 장면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미술관과 갤러리에서의 모든 행동과 생각이 미술의 한 갈래가 된다는 점을 늘 믿어야 한다.
그레이슨 페리는 예술계의 일원으로서 서양미술의 맥락에서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탐구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동시대 미술 작품 앞에 섰을 때 그 공간과 맥락, 작품이 주는 불안감을 상쇄시켜 준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가 표지에 쓰여있는게 퍽 마음에 든다. “Playing To The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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