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회화가 생명력을 가질 때

엄유정, 모레이의 부피들 전시 리뷰

2025.02.25 | 조회 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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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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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잘 지내셨나요? 여러모로 봄이 기다려지는 겨울입니다. 추위가 누그러지고 3월이 코앞이네요. 3월이 오기 전에 대전시립미술관에 가득한 초록을 가져왔습니다. 대전시립미술관의 열린 수장고에서 열린 엄유정 작가의 개인전입니다. 2022년 글렌피딕 레지던시에 머물며 스코틀랜드 모레이 지역의 식물들을 그린 작품들을 모았습니다. 대전시립미술관 소장품인 <아라우카리아>, 드로잉 시리즈를 함께 보고 왔습니다.


차원을 넘어서

모레이의 부피들 전시장 부분 ⓒ차영우
모레이의 부피들 전시장 부분 ⓒ차영우

엄유정: 모레이의 부피들

대전시립미술관 열린수장고

2024.10.29 - 2025.02.28.


작품을 둘러싼 관계의 3차원성

회화는 2차원의 일입니다. 2차원의 세계에서는 부피를 가질 수 없죠. 3차원의 세계에서야 부피를 지닐 수 있습니다. 미술이란 한편으로는 이 차원의 벽을 넘기 위한 기술의 발전이기도 합니다. 암각화, 고구려 고분 벽화 등을 떠올려 보세요. 모두 납작합니다. 그리고 점차 평면 안에 3차원의 세계를 재현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현대미술의 세기, 1900년대에 이르러 조르주 블라크, 피카소 등의 유럽 화가들을 중심으로 이 괴리감을 거리낌없이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단순히 그 방법론이 아니라 미술가 - 작품 - 관객의 관계를 재정의하는데 있습니다. 회화는 베르나르 뷔페가 지적한 것처럼 관람한 사람들의 뇌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변화”합니다. 즉, 관람하는 주체의 뇌 안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조됩니다. 이로써 회화는 2차원에 표현되지만, 3차원을 재현하고 마침내 3차원을 구현합니다.

 

”종이를 ‘보고‘ 있는 손 // (개별적인 신체의 고유성) // 경험을 통해 획득하는 규칙은 궁극의 로컬 룰local Rule같은것이다.  - 특정 사람에게만 통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해 보이는 로컬룰도 있다.”

-엄유정 작가노트 중(파도-주상절리)

 

이번 엄유정의 개인전 <<모레이의 부피들>>에서 보여주는 엄유정 작가의 시도는 3차원을 표현하는 2차원의 일, 더 나아가 작가와 관객의 시선 사이에 있는 간극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이 변화는 <아라우카리아>와 <부피-모레이> 시리즈 사이에 생긴 ‘색면‘에 대한 탐구입니다. 엄유정 작가가 모레이의 식물들을 그리면서 탐구한 방식은 에이라운지(A-Lounge)에서 개최된 개인전 <<세 가지 형태(Three Shapes)>>와 함께 묶어서 볼 수 있습니다. 색면을 레이어처럼 쌓아서 부피와 존재감을 만들어냅니다. 마띠에르를 쌓지 않는 아크릴 물감으로 다양한 질감을 색면으로 표현했을 때 사람들은 다채로움을 통해 입체감을 획득합니다. 레이어가 촘촘히 쌓여있는 케이크처럼 다층적으로 쌓아온 색면은 그 자체로 입체감을 획득합니다. 

 

<부피-모레이> 중 암부가 강조된 부분 ⓒ차영우
<부피-모레이> 중 암부가 강조된 부분 ⓒ차영우

특히 배경을 생략하고 오직 식물의 잎으로만 채운 작품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은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입니다. 촘촘하게 쌓은 붓질, 다채로운 색, 질감, 묘사와 함께 명암이 주는 힘입니다. 이미지의 구성은 역시 중앙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암부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동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양의 수묵화 작법에 따르면 ’평원‘이자 ’심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아주 플랫한 전면회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이 앞에 선 채로 스스로의 감각에 맡기고 결정해야 합니다. ”이 그림은 입체적이다.” 혹은 “이 숲은 평면적이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숲의 입구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입체적이거나 평면적이거나 이 앞에 있는 것은 모레이의 한 숲입니다. 삼차원적 관계는 이렇게 구성되죠.


생명력을 주는 구성

 

<아라우카리아>(2019) 우측 캔버스 부분 ⓒ차영우
<아라우카리아>(2019) 우측 캔버스 부분 ⓒ차영우

2019년 작품인 <아라우카리아>에서 탐구하던 볼륨감은 어떻게 면이 되었을까요? <아라우카리아>는 연보라색 배경에 녹색과 청록색, 검은색 사이의 선으로 구성된 그림입니다. ‘아라우카리아’는 침엽수로 실제로는 그림보다 훨씬 얇은 잎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는 조금 더 드라마틱한 선으로 구성되어 있죠. 특히 우측 캔버스에서 보여주는 변화가 관객에게 생명력을 전달한다고 느껴졌습니다.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구성이 하강과 상승을 보여주면서, 관객 쪽으로 뻗어나오는 듯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관객쪽으로 뻗어나오는 듯한 우측 캔버스의 구성이 <아라우카리아>의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는 듯합니다. 선으로 이루어진 나무가 주는 볼륨감과 함께 그 방향성이 일관되지 않았을 때, 관객들은 연보라색 단색 배경에서 숨어있는 공간을 상상합니다. 이 상상된 공간이 그림에 생명력과 입체감을 부여합니다.

 

<부피 - 모레이> 연작에서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한 부분 ⓒ차영우
<부피 - 모레이> 연작에서 배경을 단색으로 처리한 부분 ⓒ차영우

특히 단색 배경은 <아라우카리아>부터 <모레이-부피>에서도 계속 나타나는 배경 표현법입니다. 배경이 단색으로 처리되었을 때 캔버스 안의 공간은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습니다. 만약 배경이 하늘을 실감나게 재현하는 쪽이었다면 모든 작품의 입체감은 도리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단색으로 채운 배경은 오히려 수묵화의 ’여백‘으로 느껴지면서 관객에게 무한한 공간감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공간감 위에 채워진 나무의 선, 식물의 잎은 생명력과 부피를 지닌 존재가 됩니다. 이로써 작품들은 구상적이면서 추상적으로 변화합니다. 실제 나무의 품종, 실제 숲의 모습을 보고 그려냈지만 이 나무와 풍경은 작품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작가-작품-관객의 관객은 이로써 복잡해집니다. 엄유정 작가의 세계관에서 회화는 ”관점의 물질화“입니다. 작가가 ”본 것“을 작품의 내적 질서로 재구성합니다. 그 회화는 작가의 관점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재현품입니다. 그리고 다시 관람객은 작가의 관점을 통해서 그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관람객은 작품을 통해 본 모레이를 자신만의 경험과 시각으로 재맥락화합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뉴스레터입니다. 

 

”시각 경험에, 집중된, 시각적인 것, 너머에서 다시 내가 한 시각 경험을 안내할 수 있는 방법“

-엄유정 작가노트 중(파도-주상절리)

 


그림을 본다는 일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모레이의 숲 앞에 서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회화의 힘입니다. 벽면을 채운 드로잉을 통해서 모레이의 풍경, 조금 더 사진에 가깝게 모레이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레이를 경험하게 해준 것들은 캔버스에 작업한 연작 시리즈입니다. 모레이의 숲 앞에 서있는 듯한 경험, 그리고 그 숲이 쌓아온 시간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그림을 보는(seeing) 것은 단순히 이미지를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contemporary)에이르러 그림(미술)은 ’관계맺기‘입니다. 세계와 작가가 맺는 관계, 그 물질화된 관계와 다시 관객이 관계를 맺으며 확장됩니다. 리뷰는 다시금 그 관계를 확장하는 일이죠. 왜 아름다웠는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모레이의 부피들>>을 통해 저는 다양성, 예측불가능성, 다채로운 변화가 곧 생명력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관계를 맺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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