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새해, 산중에 집 짓고 남은 생애를 부쳐

국립중앙박물관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3.3)

2025.02.19 | 조회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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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구독자 님, 한 해를 열며 새해 첫 곡을 고르는 문화를 아시나요? 저는 새해 첫 곡보다 첫 전시를 신경써서 고르는 편입니다. 가끔은 새해 첫 영화나 첫 책도 고심해서 고르기도 해요. 올해의 첫 전시는 이제는 종료된 호암미술관의 니콜라스 파티 전을 부랴부랴 다녀왔어요. 정말 좋은 전시였어서 새해를 여는 좋은 시작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만들어진 작품을 찬찬히 보는 일, 잘 전시된 현장을 천천히 걷는 일은 삶의 어떤 부분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것 같아요.

아직 새해 첫 전시를 다녀오지 않으셨나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전시가 3월 3일까지 열리고 있어요. 추천 이유라면, 전시 인트로부터 기분좋은 새해 첫 '일출' 같은 느낌으로 진열된 국보를 만나실 수 있고요. 사람이나 동물, 식물 등의 형상을 본떠 만든 공이 많이 들어간 도자기라 일단 예쁩니다. 또한 상설전시관 1층에 위치한 특별전시실 2에서 진행중인 전시라, 규모가 크지 않아서 가볍게 살펴보기 좋을 것 같아요.

고려 12세기, <청자 어룡모양 주자> ⓒ클로이
고려 12세기, <청자 어룡모양 주자> ⓒ클로이

과거와 과거 사이, 한 시대의 면면

유물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을 좋아합니다. 아주 오래된 것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그중 동시대에서 또는 시대를 건너 선택된 미감들은 때때로 시공간을 넘어 재생산됩니다. 한 시대의 아름다움의 정수에 가까운 유물은 미술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됩니다. 중국에는 아주 많은 도자기 생산지가 전국 각지에 있어요. 심지어 아직도 수백년, 수천년 전의 도자기를 여전히 만들고 있죠.

도자기를 만드는 중국의 각 지역은 대개 한 시대를 풍미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중 허난성 청량사 여요(도자기를 만들던 지역 이름이에요)의 전성기는 송나라 시대입니다. 여요의 청자 향로 중에는 몸체가 연꽃 모양인 것이 있습니다. 연꽃이 겹겹으로 피어난 모습을 받치고 있는 연잎의 형태가 대칭을 이루며 조화롭습니다. 고려 개성 지역이나 고려청자를 만들던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도 이와 비슷한 향로가 발견되는데요. 상형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동시대의 시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 북송 12세기, <청자 연꽃모양 향로 조각>, 청량사 여요 ⓒ클로이
중국 북송 12세기, <청자 연꽃모양 향로 조각>, 청량사 여요 ⓒ클로이
고려 12세기, <청자 연꽃모양 향로>, 경기도 개성 부근 ⓒ클로이
고려 12세기, <청자 연꽃모양 향로>, 경기도 개성 부근 ⓒ클로이

과거와 현재 사이, 재해석의 여지

유물과 유물 사이를 거닐다 보면 교과서에서 본 듯한 섬세하고 정교한 도자기를 많이 만날 수 있어요. 유물 설명에서도 유난히 '국보' 표시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시대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명품을 국가의 보물로 지정하고 국보라 부르는 전통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는데요. 이제는 국보를 일괄 통일하여 지정번호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여전히 국보 번호를 부르는 게 익숙할 때가 있습니다.

국보 133호로 잘 알려진 <청자 양각 동화 연꽃무늬 조롱박 모양 주자>도 그런 작품인데요. 양각 형태로 주자의 표면을 조각하고, 음각으로 잎맥과 같은 선을 빼곡히 그려넣은 뒤, 붉은 색의 동화 안료로 꽃잎을 따라 채색하여 화려함을 더하고, 병목에 앉아있는 동자의 형태까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니콜라스 파티는 이 작품을 초상화와 결합하여 재해석한 모습으로 선보였습니다. 신비로운 청자의 색이 파스텔로 묘사되면서도, 기면의 잎맥과 동자승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은 수작입니다. 다시금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고려 13세기 <청자 양각 동화 연꽃무늬 조롱박 모양 주자> ⓒ클로이
고려 13세기 <청자 양각 동화 연꽃무늬 조롱박 모양 주자> ⓒ클로이
니콜라스 파티의 신작 초상화 ⓒ클로이
니콜라스 파티의 신작 초상화 ⓒ클로이

과거에서 미래로 보내는 편지

상형청자 전시는 명품 청자 뿐 아니라 해학적 의미 또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을 다양하게 조명합니다. 동물과 관련된 상형 청자를 전시한 말미에서는 벽 한 켠에 이색(1328~1396)의 목은집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산중에 집 짓고 남은 생애를 부쳐 있노라면 / 원숭이가 풀 열매 보내오는 걸 매양 보겠지" 라는 문장이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그 옆으로 석류나 항아리 따위를 번쩍 들고 있는 원숭이가 재미있어요. 우거진 자연 속 원숭이를 벗삼아 지내는 삶, (지금은 동남아 등지에서나 가능할 법한) 그런 여유가 문득 그립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지만 연말 연초에 정말 너무 바빴거든요. 망중한, 삶에 위로가 필요할 때면 가만히 종교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불교 사회였던 고려의 유물 중에는 청자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도자기 조각 등도 있어요. 희미한 청자 보살상 조각의 인영을 덧그려보며 도자기에 담았을 염원을 떠올려봅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삶을 괴로움을 곁에 두고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는 마음으로 조심히 늦은 새해를 열어봅니다. 

고려 12세기 <청자 원숭이모양 묵호> 경기도 개성 부근 ⓒ클로이
고려 12세기 <청자 원숭이모양 묵호> 경기도 개성 부근 ⓒ클로이
고려 13세기 <청자 보살상 조각> 전남 강진 용혈암지 ⓒ클로이
고려 13세기 <청자 보살상 조각> 전남 강진 용혈암지 ⓒ클로이

그간 틈틈이 새해 어떤 글을 전할지 고민했는데요. 해가 바뀐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닌지라 여전히 미술 그리고 가끔 케이팝 이야기를 전할 것 같아요. 다음 전시는 이번 레터에 이어 도자기 이야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한국 현대 도자 공예: 영원의 지금에서 늘 새로운>의 추천사를 담을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따로 소개하지 않지만 <서울리빙디자인페어>가 2월 26일부터 3월 2일까지 열리니 놓치지 마세요!) 이밖에도 가보고 싶은 곳,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귀띔해주세요. 2025년에도 좋은 이야기에 진심을 담아 적어볼게요. 

인도네시아 발리, 2025, 원숭이와 초록이 있는 풍경 ⓒ클로이 
인도네시아 발리, 2025, 원숭이와 초록이 있는 풍경 ⓒ클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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