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독자 사랑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한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겁니다. 사랑은 관성을 깨고 무모한 일에 뛰어들게 만들고 불가사의한 일을 해석하도록 시키면서 그 무엇 하나도 같은 모양인 것이 없죠. 그렇기 때문에 기계문명의 시대에 이르러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듭니다. 사랑은 데이터로 만들지 못합니다. 제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고로 사람은 기계를 사랑할 수 있으나 기계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흉내낼 수 있는 있을지 몰라도요. 그러나 이윽고 그 흉내마저 사랑의 모양이 될 것입니다.
기계 신이 강림한 세계

김현석이 선보이는 <루시 1.0>은 현대인의 모습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인류의 조상인 루시(로 추정되는)의 두개골에 박혀서 영원히 재생되고 있는 SNS 숏폼 영상은 동시대 인간의 표본과 같죠.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내부로부터 찾지만 르네 지라르가 말한 것처럼 욕망은 투영되는 대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욕망을 투사할 대상, 롤 모델이 없다면 욕망은 성립되지 못하죠. “돈 키호테”에게는 “기사”가 욕망의 투사체이고 투사체가 되기 위해 온힘을 쏟아붓죠. 그에게는 “기사도 소설”의 신도였습니다.
현대인의 욕망은 너무나 다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가지의 롤모델로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24/7 무한에 가깝게 생성되는-소비할 수 있도록 재생되는- SNS 영상 콘텐츠는 나의 욕망과 롤모델이 일치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롤모델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다음 욕망으로 넘어갑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는 사랑임을 알아채기도 전에 기계 신에 의해 사랑인지도 모른채 다음으로 넘어가게 되죠. <루시 1.0>에서 숏폼 영상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공간은 외국어로 가득 차 있죠. 기계 신은 열렬한 신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앉아있으라 명령하죠.
기계는 편리하게 모든 것을 정의합니다. 판단은 신, 왕, 합리성이 해왔던 일이죠. 그러나 판단을 위한 기준에 대한 의문이 당연한 시대에 인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나요? 그렇다/아니다.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는 자리에 기계 신은 강령하여 대신 판단합니다. SNS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욕망 기계로서 판단의 기준이 되어주고 AI는 거대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경우의 수를 모두 계산한 예지자로서 기능합니다. 현대인은 기계와 함께 감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을 봉헌할 수 있다면

윤지영의 <호로피다오>에 이르러 우리는 목소리를 신에게 봉헌할 수 있을지 스스로 묻습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밀랍으로 만들어 녹인 뒤 자신의 얼굴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초월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사랑이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김연수,≪세계의 끝, 여자친구≫, <작가의 말>, p.316.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채집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노력을 멈출 수는 없죠. 이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모양의 사랑이 있죠. 연인간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학문과의 사랑, 장르와의 사랑, 기계와의 사랑처럼요. 우리는 그 모든 불가능성에 자리한 것들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 사랑의 언저리에 가닿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모양이 달라서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더라도 그 과정에 몰두합니다. 염지혜의 <사이보그핸드스탠더러스의 코>(2021)에서 보여주듯이 기계, 식물, 동물이 모여있는 “물구나무종(핸드스탠더러스)”를 보고 다시 한 번 현재와 미래의 사랑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죠. 우리는 이미 기계를 사랑하고 있는데 기계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소프트웨어는 사랑을 해석하고 패턴화해서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출력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것도 넓은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판테온의 자리: 사랑 신과 기계 신

듀킴의 설치 작품들은 하나의 성소처럼 보입니다. 예배당처럼 꾸며져 있으며 자리마다 <다육복음서>(2026)를 읽으며 신체가 얽혀있는 “퀴어한 신체”의 신상을 바라보게 만들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근원적 토대임을 의미”(전시 서문, 이규식 학예연구사)라는 점에서 사랑은 여전히 판테온의 가장 빛나는 자리를 약속받습니다.
기계 신은 판테온의 자리를 약속받지 못한 채 떠돌고 있죠. 그러나 기계 신은 사람들의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알고리즘으로 AI 챗봇으로 카메라로 분장한 채 세계에 스며들었죠. 가장 최신의 신인 그들의 신화는 결국 인간의 신화처럼 보입니다.

최수련이 <귀신의 권세와 명리>(2025)에서 보여주듯이 신화는 쇠퇴합니다. 구전되지 않는 민담, 더 이상 복제되지 않는 고전의 도상, 여성 인물과 귀신은 모두 사라졌던 신들이죠. 그들의 자리는 있었으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죠. 지금 우리의 신화는 얼마나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을까요? 사랑이 흩어지듯이 이 이야기들도 흩어지고야 말 것임을 알지만 어떻게 기억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호로피다오>에서 목소리를 밀랍으로 기록하듯이 말이죠. 이 사랑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방식이 예술의 한 기능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사랑을 기록하는 가장 보편적인 매체가 되었죠. 정영호의 사진 작업들은 결국 사진이 무엇을 기록하려는 욕망인지 되묻습니다. 사진은 결국 사랑을 기록하죠. 낸 골딘이 기록한 퀴어 커뮤니티의 사진들은 그들을 사랑한 시선이죠.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들도 장애를 극복한 완성형 인간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행위의 본질은 결국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사랑은 기계로 기록되죠. 사랑과 기계는 결국 현대인에게는 뒤섞여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기술
사랑을 남기는 기술은 예술입니다.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려는 기계 신의 시대에 미술은 결코 정량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모습은 사람마다 모두 다 달라서 계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인덱스화할 수 없으므로 그것들은 영원히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미술의 원본성이 가지는 의미와 사랑의 유일무이한 모양은 그런 점에서 일치합니다. 아직 기계 신은 수억 종의 사랑을 데이터화하지 할 수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의 기원≫,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주년 기념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3층
2026.04.30 - 09.06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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