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잊지 말라. 인간도 규칙을 따라야 한다.

‘루시’부터 ‘DMZ’까지, «최재은: 약속»

2026.01.13 | 조회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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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예술, 방문하고 보이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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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 인류세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인류세는 1980년대에 논의되기 시작한 개념이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신생대의 홀로세 대신 인류세라고 구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이산화탄소가 늘고, 플라스틱이 토양에 쌓이는 것, 여섯번째 대 멸종이 한 세대를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논의는 인간이라는 한 동물의 종이 생태계를 어떻게 파괴해오고 있었는지에 대한 반성이어야 합니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최재은 작가의 이번 전시 «최재은: 약속Where Being Be»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죠.


‘루시’로부터

최재은, <루시> ⓒ 차영우
최재은, <루시> ⓒ 차영우

한기가 느껴지도록 하얀색의 거대한 조각으로부터 전시는 시작됩니다. 세포의 모양을 본따 새하얀 옥돌을 육각형으로 조각내어 이어붙인 모양은 얼핏 치아같기도 하고 뼈의 골두같기도 합니다. 이 조각의 제목은 <루시Lucy>,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최초의 인류’ 화석과 같은 이름입니다. 이 압도적인 조각은 앞에선 사람에게 묻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루시는 압도적인 크기로 관람객을 몰아붙입니다.

압도적인 크기의 조각은 아름답죠. 웅장하고 숭고합니다. 거대한 조각이 지배하는 공간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자신의 부피를 체감하게 됩니다. 자작나무로 만든 공간을 루시가 채우고 있을 때 그 안에 들어선 사람은 키에르케고르가 말을 빌려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됩니다. 루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저는 그 앞에서 한 가지 질문을 받고 전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대단한가?“


검은 ‘경종‘

최재은, <대답 없는 지평 Ⅰ>. ⓒ차영우
최재은, <대답 없는 지평 Ⅰ>. ⓒ차영우

다음 전시실로 들어서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핀포인트 조명 아래 마치 석화된 허파가 보이는 듯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오키나와 해수의 이상고온 현상으로 백화된 산호라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물에 담겨있는 죽은 산호초는 <대답 없는 지평 >을 배경으로 떠있습니다. 실시간으로 해수의 온도를 검은 바다의 풍경 위로 알려줍니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설치 작업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압도적으로 빛을 제한한 공간은 인간의 물리적 시각을 차단합니다. 두번째 전시실인 “경종”에서도 막막할 정도의 어둠 속에서 발 아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앞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채 걸어가야 하죠. 그 안에서 백화되어 죽은 산호초와 이상고온의 해수 온도를 보고 있으면 무력감이 듭니다. 그리고 자연의 물리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한계가 느껴집니다.

빛이 없으면 앞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빛이 허용한 공간에는 인간이 만든 기후 위기로 인해 죽어버린 산호의 시체가 인간의 허파 모양을 연상시키듯 공중에 매달려있습니다. 


‘소우주’는 어디에나 있다

세번째 전시실 ‘소우주‘ 일부, ⓒ차영우
세번째 전시실 ‘소우주‘ 일부, ⓒ차영우

붉은색, 추상적 이미지인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가루이자와)>는 지표면의 모양, 흙의 미네랄을 단면으로 갈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작은 구멍을 통해 보게되는 작품인 <순환>은 세포의 움직임을 보여주죠. 우주는 여전히 밝혀지거나/밝혀지지 않은 자연계의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죠. 그것은 지구 바깥, 지표면, 인간의 세포 단위에서 공통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일입니다. 

자연은 지정된 규칙을 수행하고 있고 이것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죠. 전시실의 한 가운데 <숨을 배우는 돌>처럼 그 수많은 법칙의 반복이 쌓여 조형적 언어를 갖추었을 때 드러나고는 하죠.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는 땅에 ‘간피‘, ’고조‘, ’아사’를 배합해서 만든 종이인 와시washi를 묻어두었다가 다시 꺼내는 방식의 작업입니다. 얕은 지층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무늬를 고착시켜 만들어낸 이미지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인간이 만든 조형성 대신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규칙을 조형적 언어로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아무 움직임도 없고,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그 흔적은 이미지가 됩니다.


‘미명‘과 위계 

네번째 전시실 미명 전경 ⓒ차영우
네번째 전시실 미명 전경 ⓒ차영우

네번째 전시실에 들어가면 갑자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전시실에 유형학적으로 펼쳐져 있는 압화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름 부르기>는 산업혁명 이후로 멸종된 종의 이름을 부릅니다. 

‘호명‘은 다양한 의미를 갖지만,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권력이 기울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은 학생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선생님의 이름을 그대로 부를 수 없죠. 서비스직은 이름이 적힌 명패를 채용하고 있고, 일부 고객은 그것을 통해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수 있죠. 하지만 고객은 익명성을 유지하죠. 이 관계는 ’호명’이 위계상 위에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죠.

<이름 부르기>로 가득찬 공간은 반대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권력 관계를 보여줍니다. 지구의 생태는 인간에 의해 발견되고 명명되죠. 하지만 이름이 없다고 하여 그 식물과 동물에게 생태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고, 그 용도를 설명하고 싶은 것 역시 인간의 관점입니다. 게다가 여섯번째 대멸종이라고 부르는 산업혁명 이후의 멸종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냥과 기후 위기로 인한 멸종입니다. 인공적이죠. 

전시실 ‘미명’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첫 전시실에서 한백옥으로 만든 뼈로 환유되는 ‘루시‘를 떠올립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식물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자연국가‘의 가능성

최재은, <대지의 꿈> ⓒ차영우
최재은, <대지의 꿈> ⓒ차영우

DMZ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인 국가와 전쟁을 자연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여주는 공간이죠. 휴전 이후로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는 땅, 개발하지 못하는 땅, 황량해진 공간, 미개척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공간 자체가 미술가를 끌어당기는 이유는 그 자체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국가(인간)가 자연이라는 땅을 영토로 분할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능한가?

자연은 국경을 모르죠. 그래서 남한과 북한의 상징과도 같은 경계선인 판문점은 콘크리트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둔 경계입니다. 최재인은 DMZ의 철조망을 녹여서 <증오는 눈처럼 녹는다>로 빚어냈습니다. 이는 전쟁의 상흔을 재가공해서 만들어내는 것과 동시에 DMZ에 존재하던 인공물을 제거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씨앗은 국경과 상관없이 싹을 틔웁니다. 최재은은 <대지의 꿈> 프로젝트를 통해 철원 지역의 DMZ엑 공중 보행로, 공중 정원, 종자 보관소를 설치하는 “종합 생태예술 로드맵”*을 제안합니다. 생태숲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종자볼Seed Bomb’을 뿌리자고 제안하죠.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인간이 우세종으로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자연이 우세종으로 존재하는 국가를 수립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 마저 ‘국가‘라는 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호주관성을 확보하죠.

*전시 리플렛, 작품 설명에서 인용


‘약속’된 미래

전시는 ‘루시’로 시작하여 ‘DMZ’로 끝납니다. 전시를 따라가는 동안 계속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제 안에 중첩되어갑니다. 오감을 통해서 습득하고 있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관계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불확실성입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보다 나아진 내일은 반드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기술 낙관주의는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세계는 평화로운 미래를 약속하지 않죠. 자연 역시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의 법칙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최재은은 이 관계를 추적하며 그 결과를 조형적 언어로 관람객 앞에 가져다 놓습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쌍무계약적 관계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5.12.23 - 202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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