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광복절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이맘때쯤이면 광복(光復)이라는 단어에 담긴 '빛을 되찾다'는 의미를 다시금 떠올려보게 됩니다. 도심을 걷다 마주치는 길 이름도 다시 보게 되고요. 이순신 장군과 을지문덕 장군의 기운을 담아 지은 지금의 충무로와 을지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상권이 밀집한 혼마치(本町·본정)와 고가네마치(黃金町·황금정)였고, 명동은 메이지마치(明治町·명치정)였습니다. 이 일대는 현재까지도 일제강점기 시기의 근대 건축물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곳이죠.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 신세계백화점 본점(구 미츠코시백화점)의 파사드는 2024년 초대형 전광판을 설치하며 잠시 모습을 감췄습니다. 20세기 초, 일제의 자본주의 첨병으로 기능했던 상업 건물은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백여년 만에 새로운 옷을 입은 셈입니다. 그 옆, 나란히 선 구 제일은행 건물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1호로 10여년 전 신세계가 매입하였는데요. 서울시 국가유산위원회의 자문과 복원을 거쳐 2025년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헤리티지'라는 이름으로 개관하였습니다.
근대기의 석조양식으로 건축된 이 건물의 안으로 들어서면 4층에 '더 헤리티지 뮤지엄'이, 5층에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가 위치해있습니다. 현재 4층에서는 박선기 개인전 <The Origin of Space>가, 5층에서는 김익영 개인전 <백의 풍경>이 진행 중입니다.

박선기, 공간의 근원
박선기 작가는 숯과 같은 재료를 공중에 띄우는 방법으로 입체적인 조각을 구축해왔습니다. 작가의 조각은 공간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공간과 상호작용 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메인 전시장에 설치된 'Space-Origin 20260303' 또한 다분히 장소특정적인 작업으로, 유형문화재인 신세계 더 헤리티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제작되었습니다. "더 헤리티지 뮤지엄이라는 이름에 부합하게 한옥의 기둥과 보만 남긴 형태로 본질만 남은 공간, 가장 근원적인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헤리티지(heritage)라는 단어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전통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처럼 더 헤리티지 뮤지엄이 위치한 공간은 일제시기 지어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신고전주의와 네오바로크 양식이 결합된 요소가 건물 전체에 드리워져 있죠. 그리고 작가가, 우리가 떠올린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건축의 '헤리티지'는 한옥과 맞닿아있습니다. 한때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의 역사, 응축된 시간의 잔재는 탄화된 숯으로 재구성됩니다.
"타고 남은 집의 골격처럼 형체는 무너져 내렸으나 공간의 윤곽은 여전히 살아 있다." 파괴된 형상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통나무 숯으로 조각된 한옥의 기둥과 보는 단단한 동시에 연약하게 그 자리에 떠 있습니다. 기본 단위만 남은 건축적 요소는 마치 역사로만 남겨진 듯, 무너질 듯, 부유하듯, 부스러질 듯 보입니다. 관람객은 그 사이를 거닐며 면밀하게 남아있는, 사라져가는 듯 잔재하는 한국 건축의 유산을 흥미롭게 살펴봅니다. 전시는 9월 13일까지.


김익영, 백의 풍경
김익영 작가에게 한국적인 것, 백자의 아름다움은 현재도 유효한 헤리티지입니다. 하우스오브신세계에 들어서면 먼저 야외 정원의 햇살과 녹음을 배경으로 놓인 작가의 작업이 펼쳐집니다. 작가의 특징인 면치기와 면깎기 기법으로 만들어진 표면은 빛에 따라 변화하며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사면푼주에 흙을 담고 식물을 식재한 모습을 보면, 과거에 제기 등으로 쓰였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 않은데요. 작가는 현대 생활에서 백자 제기를 즐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내가 마주한 제기는 제기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조형으로서 크게 나에게 와 닿았다. 나는 제기를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 아닌, 조형적 태도를 반영한다. 옛날 도예가들이 흙을 다루면서 어떻게 형태를 만들었는지를 본다. 제기는 물레로 둥근 모양을 만들고, 그 원을 네모로 만들고, 네모를 또 변형시키는 조형적 변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것이다."
김익영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헤리티지를 단순히 복원하고 닫힌 상태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게 변형하고 새로운 용도를 부여합니다. 제기를 제기장에 넣어놓는 것은 그가 과거의 유산을 잇는 방식이 아닙니다. 작가에게 도자기의 생명은 시대에 맞는 '쓰임'입니다. 과거 '보'였다고 해서 '보'로만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형을 즐기고 놓고 감상하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과거 제기에서 영감을 받았던 작가는 요즘 산에 매료되어 새로운 산 오브제 연작을 만들고 있습니다. 산봉우리들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모습이 그 자체로 완벽한 조형작품처럼 느껴졌다는 작가의 말이 작가가 빚어낸 백자의 형태, 백의 풍경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전시는 8월 30일까지.


하우스오브신세계 헤리티지 프로젝트는 2023년 신세계백화점에 신설된 아트 전문 조직 '아트앤스페이스'팀의 작업입니다. 아트앤스페이스 총괄 김경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진두지휘했죠. 김경은 디렉터는 "한국인의 삶과 생활의 지혜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국내외로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라며, 프로젝트의 핵심은 ‘위빙(Weaving)’, 우리말로 하면 ‘엮어 짜기’라고 말했습니다. "전통이 주는 아름다움과 현대 재해석을 엮어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준비한 전시부터 기프트숍까지 모든 공간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이 그토록 지우려고 했던 우리의 문화가, 백여년의 시간을 지나 그 흔적 위에 덧입혀지고 새롭게 그 모습을 갖추니 새삼 '빛을 되찾은' 기분이 듭니다. 최근 한국 공예가 주목 받는 것은 이런 작가들의 노력과 세간의 관심이 함께 만나 발생하는 시너지 같기도 하고요. 모두 즐겁고 뜻깊은 연휴 보내셨길 바라며, 시간이 되시면 두 전시도 한번 들러보시길 추천합니다. 다음 레터는 100호 특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곧 다시 만나요!

참고
<국내 최고 럭셔리 랜드마크의 탄생, 신세계 본점 ‘더 헤리티지’> 신세계백화점, 2025.04.23
<숯으로 공간의 근원을 사유하다> 디자인플러스, 2026.08
<도예가의 제기시선 - 도예가 김익영 인터뷰> 경기도자박물관, 2024.12.20
<전통을 ‘계승’한다…신세계가 내놓은 해석> 매경이코노미, 2025.5.9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