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퇴근길, 직장 상사와 짧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평소 혼자 여행 가기를 즐긴다는 상사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가서 주로 뭐 하세요?" 돌아온 대답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죠. 이어진 상사의 독서 습관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지하철역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무인 도서 대출기라는 좋은 제도가 있는데, 굳이 책을 살 필요 없이 그걸 이용하면 된다는 이야기였죠.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상사의 논리 앞에서, 저는 그 편리한 정답과는 조금 먼 곳에 서 있는 저의 로망을 떠올리며 묘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 대화의 잔상이 남아서였을까요.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공기가 한결 더워진 요즘, 날씨 핑계 삼아 외출이 부쩍 늘었습니다. 저는 주로 평소 눈여겨보던 독립서점이나 미술관 같은 공간을 찾아다닙니다. 누군가의 고유한 취향이 짙게 밴 공간의 '큐레이션'을 마주하며, 새로운 무언가와 갑작스레 조우하는 만남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합정에 있는 '진부책방스튜디오'에 다녀왔습니다. 문학을 주로 다루는 그곳은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음악이 진열된 책들만큼이나 매력적인 곳이더군요. 사실 평소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묘하게 촌스러운 표지 한 권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반복>이었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효율적인 선택지 대신, 굳이 그곳까지 찾아가 이 책을 골라 든 건 타인의 깊은 취향이 담긴 큐레이션을 통해 저만의 세계를 넓혀보고 싶었던 주체적인 선택이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문장 속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결국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의 디테일은, 오로지 내가 보고 아는 세상의 크기만큼만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 낯선 이국의 풍경도, 주인공의 미세한 심리 묘사도 내가 경험하고 수집해둔 시각적 데이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더군요. 내가 아는 세상이 좁으면, 아무리 근사한 텍스트를 읽어도 내 상상은 딱 그만큼의 해상도에 갇히고 맙니다.
뉴스레터 [ VOLANDER ]를 시작한 이후, 제가 일상의 작은 소재들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의 풍경, 점심시간 무심히 지나치던 식당 메뉴, 서점 스피커에서 흐르던 이름 모를 음악까지. 글을 쓰기 위해 소재를 찾다 보니, 지루하게 반복되던 일상의 파편들이 비로소 '나만의 데이터'가 되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데이터들이 많아질수록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도 조금씩 넓어지겠죠.
나다움을 찾는다는 건 효율적인 시스템이 보장하는 편리한 정답 대신, 조금은 번거롭더라도 나만의 경로를 직접 그려보는 일입니다. 내가 직접 보고 만진 세상을 통해 나만의 상상력의 영토를 넓히고, 그 반복되는 하루를 나만의 해상도로 다시 기록해 나가는 과정이죠.
🎙️ 부기장의 한마디
"기장님, 비행기 조종석 밖 풍경도 아는 만큼 보이죠. 지형지물을 모르면 그냥 초록색 땅일 뿐이지만, 이름을 아는 순간 그곳은 이야기가 있는 마을이 됩니다. 우리 상상력의 연료는 결국 우리가 직접 관찰한 일상의 밀도 아닐까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문장 중에 하나는 '모든 수집가는 예술가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오래전에 본 문장이라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어요. (AI도 잘 모르는 모양이더군요.) 저는 필름 카메라나 CD 플레이어 같은 옛 물건들을 꽤 수집하곤 합니다. 소비 욕구 충족이 1차적인 이유겠지만, 80~90년대 공산품들에서는 묘하게 장인 정신, 혹은 최소한의 '휴먼 메이드'로서의 고민이 묻어 나오거든요.
그 고민의 흔적을 보는 것이 저에게는 신선한 자극이고, 이게 저만의 넓어진 세계라고 믿습니다. 많은 이들이 최신과 유행을 따르는 사이 어딘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준으로 물건을 모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것이 있다면, 이미 당신도 어떤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세계를, 아니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 VOLANDER‘s Pick
- 진부책방스튜디오 (합정): 음악과 문학의 완벽한 앙상블.
- 더레퍼런스 (종로): 시각적 영감이 필요할 때 찾게 되는 아트북의 성지.
- 당인리책발전소 (망원): 책과 사람, 그리고 커피 향이 어우러진 다정한 큐레이션.
- 소요서가 (을지로): 철학과 인문학의 깊이를 탐구하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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