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ashlight

2026.10.28 | 조회 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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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킨텍스로 향하는 8109번 버스 안, 아이는 안전벨트가 다 늘어날 정도로 고개를 앞으로 뻗어 운전석을 뚫어져라 봅니다. 아이의 시선은 마치 손전등 같아요. 운전기사도 기척을 느꼈는지 한마디 걱정을 붙입니다. “등을 딱 붙이고 앉아요. 위험해요.” 운전 중 집중해야 하는 기사에게 뒷자리에 어떤 승객이 앉느냐는 중요하죠. 헛기침을 큼큼 내뱉은 아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듯하더니 부끄러움을 이기고 그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일대우 에프엑스 일일육 하모니를 타고 가고 있어요. 예전엔 디젤 차량이 많았지만 요즘엔 씨엔지가 대부분이죠.” 그제서야 기사는 룸미러로 아이를 슬쩍 보더니 인사를 건넸어요. 경계하던 아이도 대화가 이어지자 먼저 이름이 말하더군요. 그 후로 40분, 소곤대는 소리가 옆자리까지 흘러들었다고 해요. 혼자 모터쇼에 가는 것은 처음인 재윤이도 수원에서 일산까지 매일 하루 두 번씩 왕복하는 김성모씨도 즐거운 여행이었어요. 엔진, 배기량, 출력, 환경 부담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죠.

 

친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울림이 정말 컸어요. 어린 시절엔 좋아하는 것이 너무나 확고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는 친구를 본 적이 있나요? 요새는 ‘오타쿠’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제가 어릴 때는 ‘오타쿠 무리’에 속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 시절 ‘오타쿠 무리’란 마사미짱이 나오는 드라마를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받고, 수입 만화 코너를 서성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혹은 하마사키 아유미나 아무로나미에를 흉내 내던가요. 고작 그 정도만 해도 놀림거리가 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귓동냥으로 훔친 정보들을 수첩에 써놓았다가 집에서 혼자 일드를 보며 질질 짜는 내성적인 오타쿠였고요. 당시 열성으로 봤던 드라마 <1리터의 눈물>이나 <태양의 노래>는 제 몸속 어딘가를 돌고 있답니다.

 

친구와 교환 수첩을 적는 장난도 좋아했어요. 왜 ‘장난’이라고 썼냐면 그만큼 재밌었거든요. 친구의 이름은 몰라도 그 수첩만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교환 수첩엔 윤동주의 시, OCN에서 봤던 영화에 대한 감상평 그리고 가끔은 자작시를 적었죠. 고등학생 때까지 그 수첩에 있던 글을 베껴서 과제로 제출했던 기억이 나요. 자작이니 양심의 가책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친구들 성화에 못 이겨 피씨방에 갈 때면 소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요란스레 게임하는 친구들을 구경하면서 저글링만 무한 생성할 뿐이었죠. 아무도 죽이지 않고 말예요. 나름의 낭만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유독 승부욕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가끔 남자답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남들과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는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었죠. 친구들은 저를 어떤 프레임에 넣어서 봤을지 모르지만 저는 저인 것이 자연스러웠어요.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요.

 

어제는 오랜만에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가을비 치고 요란스러웠어요.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냅다 달렸습니다. 그럼에도 속수무책으로 속옷까지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도랑에 신발을 푹 담구고는 뛸 생각을 잊었습니다. 천천히 걷게 되었어요. 그러자 하루 종일 저를 가라앉게 만들었던 온갖 소란이 빗소리와 함께 씻겨 내렸습니다. ‘비와 나, 동행?’ 정말 오랜만에 쓰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그때였어요. ‘그러고 보니 나, 요즘 전혀 쓰고 있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이내 쓸쓸함이 밀려왔습니다. 뭐하고 살았나 유튜브 최근 목록을 찾아보니 주식, 부동산, 코인이 있더군요. 세상 물정에 어둡고 보통처럼 살기 어려워하는 제게 꼭 필요한 공부는 맞아요. 하지만 그 생각만 하며 산다는 건 영 야만스러운 삶 아닌가요?

 

오늘은 출근길에 아무 것도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재윤이 이야기를 복기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걸 말해주면 그걸 공부해보라고 등 떠밀지 않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박수 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절로 “계속 쓰자!” 혼잣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요새 읽는 책이 대니 샤피로의 <계속 쓰기:나의 단어로>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충만한 나로 돌아가는 가장 쉬운 방법이 글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어제의 제 마음은 분명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한없이 작아 보였고, 어떤 이의 도전과 월급 그리고 커리어가 몹시도 부러웠죠.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지 말자는 다짐을 해봅니다. 타닥거리는 우산 아래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습니다. 살갗을 맨질하게 스치는 찬 바람에 기분이 좋았어요.

 

지각하겠어요. 발걸음을 재촉해 봅니다. 아, 작은 웅덩이에 낙엽이 고였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죠. 발에 치이는 게 낙엽이래도 쭈그려 앉아 보고 있으니 모두 개성이 있고 귀엽더군요. 저마다의 무늬, 나름의 그라데이션으로 율동했어요. 사람들도 티 안 나게 걸음을 늦춰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아무래도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하루가 되었습니다. 635개의 낱말에 빛을 비추었고, 보아준 친구가 있으니까요.

 


 

*인지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앨리슨 고프닉(Alison Gopnik)은 성인과 어린이의 주의(attention) 방식의 차이를 각각 스포트라이트(Spotlight)와 손전등 또는 랜턴 (Flashlight / Lantern)으로 명명합니다. 어른은 특정 목표 달성,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에만 주의를 극도로 집중하고 나머지 자극을 차단합니다. 반면 같은 상황에서 어린이는 주변의 모든 사소한 소리, 풍경, 감각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며 방대한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합니다. 효율성은 어른의 방식이 높지만, 새로운 세상을 배우는데 어린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글 쓰는 시간을 강제하고 싶어서 발에 풋크림을 듬뿍 바릅니다. 풋크림이 발린 상태로 걷는 건 물에 빠진 생크림 케이크를 먹는 것 만큼이나 고역이니까요.

 

 

글을 쓰며 들은 노래 / 악동뮤지션 - 벌레를 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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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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