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유리병이에요.
당신의 해변에 편지가 도착했답니다.
이번엔 어떤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요?
같이 한번 읽어 봐요..!

"너는 별을 보자며 내 손을 끌어서"[1]
남들은 척척 해내는 것 같은데 어째선지 내가 하려면… 영 겸연쩍은 일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기죽지 않고 요목조목 따져 묻기. 나의 불투명한 미래를 고려하며 알뜰한 재정 꾸리기. 불퉁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 여행 주도하기 같은, 내 나름대로 정립한 ‘어른의 일’로 시작해 편의점에서 갓 구입한 음료수 뚜껑 따기나 방 탈출 게임을 온전히 이해하고 즐기는 일까지.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다. 살아갈수록 그렇다. 나이 서른 중반에 다다라 낙담하자니 이 또한 겸연쩍긴 하지만….
이왕 고백하는 김에 하나 더. 밤하늘 속에서 별자리를 찾는 것도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설탕 알갱이처럼 콕콕 박힌 별을 쿡쿡 집으며 이것과 저것을 이으면 전갈자리고 저것과 이것을 이으며 염소자리이며 저 국자처럼 생긴 것은 위치가 거의 바뀌지 않는 북극성이라고, 저게 바로 북극성이라고 조곤조곤 떠드는 새 느낄 소박한 기쁨과 슬픔, 아쉬움 같은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대체 뭐가 국자 모양이란 건지… 어느 경치 좋은 산에서 상대방의 검지손가락과 밤하늘 사이를 가늠하다 대강 고개만 끄덕였을 적의 초조함이란. 남들에게는 쉬이 보이나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면, 내 삶에 나타난 어떤 중요한 지표를 놓친 게 아닐까? 그것이 특히 내 머리 위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이라면 더더욱.
이왕 고백하는 김에 하나 더. 나는 몇 년 전, 오랜 친구와 완전히 소원해졌다. 소설 「북극성 찾기」 속 친구들-‘주영’과 ‘이정’, 그리고 ‘유라’보다 어렸을 적에 만난 친구다. 더는 만나지 않게 된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도 그가 출연하는 꿈을 종종 꾸지만, 그와 내가 어쩌다 소원해졌는지는 또렷하게 기억하기 힘들다.
그가 내게 느낀 서운함을 토로했을 때, 나는 우는 것 말고는 뭘 했던가?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을 했던가? 몇 달이 지나 다시 만난 그가 어색함을 뒤로하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말했을 때, 나는 그 가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10년은 한국에 들어오지 않을 거란 그의 말에 나는 그저 알겠다고만 했었나? 아닌가? 뭐라고 했을까? 소설 속 주영이 떠올리는 수많은 의문들을 흉내 내며, ‘그 시절의 마음과 감정들이 뭐였는지 해석되지가 않아서 거듭 돌아보’아도 결정적인 이유를 손에 꼽을 수 없다. 어쩌면 물음표가 붙은 모든 의문들은 나를 향한 마지막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내 머리 위에서 빛을 내면서, 너 이제 거기까지 하라고. 가늠하며 망설이는 건 그만두라고.
북극성은 수억만 개의 별과 달리 한 자리에만 머물며 때로는 누군가의 지표가 된다. 고단한 삶 속에서 번뜩 떠올리는 추억 또한 그럴 것이다. 앞서 길게 주절거린 내용으로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속절없이 맞이하는 변화와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다. 예고 시절, 팍팍한 가정 살림에 엄마로부터 눈칫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주영은 이정과 유라와 함께 있어 행복했다. 어느 기성 작가보다 훌륭한 이정과 유라의 글을 읽고, 그런 두 사람 사이에서 ‘깍두기처럼 굴’며 그래도 이 길 밖에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은 채 입시 준비를 하기까지, 전부. 주영에게 있어선 번뜩이는 추억인 것이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대학으로 흩어지면서 관계는 무너지고 만다. ‘조금 우울해서’ 신주님을 모시던 이정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뒤, 주영과 유라도 더는 교류하지 않는다. 별의 위치에서 본다면 그저 그런 삶을 살던 주영 앞에 유라가 나타난 건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다. ‘홀로 비명 지르지 않고 성장한’ 어른이 된 채로.
우연일까 계획일까 아니면, 갈라진 관계를 이제라도 봉합하라는 별의 신호일까? 무엇이 됐든 중요한 건 오랫동안 연을 끊은 친구가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일 것이다. 유라가 앞집에 이사를 온 뒤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데면데면 대하지만 별이 아닌 ‘벌’을 계기로 주영과 유라는 잠시나마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 옛날, 이정이 별의 자리를 찾아내어 주영과 유라에게 일러주었듯 유라는 주영의 집 베란다에 생긴 벌집을 가리키며 이건 겁낼 필요가 없는 쌍살벌집이라고 알려준다. 주영이 늘 짐작했던 대로, 삶을 잘 살아내는 모습으로, 불현듯 생겨버린 벌을 저 대신 떼어내면서 말이다.
누군가의 손끝이 가리킨 것에 쉬이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은 어쩌면 ‘개가 달립니다, 슬픕니다’라는 문장과 닮았을지도 모른다. 세 인물들이 어린 시절 그토록 곱씹었던, 교감이 잘못 선택한 이 일본어 답안처럼 그저 달리기만 할 뿐 도달하지 못해 슬프니까, 때로는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만다. 이정이 가리킨 별을 찾아내고 유라가 가리킨 벌을 겁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주영이 가진 고단함의 농도가 조금만 덜 짙었더라면 32인치 캐리어에 갇힌 유라의 삶까지는 구제하지 못하더라도, 손 정도는 끌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하염없이 달리는 개는 모든 일이 일어난 뒤에야 겨우 멈출 뿐이다. 캐리어에 촘촘히 박힌 하얀색 별 앞에서.
나는 「북극성 찾기」를 읽는 동안 그 속의 모든 슬픈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었다. 달리는 건 이제 그만두자고.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며, 제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을 신호를 찾아보자고. 깨달음은 왜 항상 뒤늦게 방문해서 우리를 더욱 슬프도록 만드는 것인지.

from 강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