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셧더퍽. 갓생? 셧더퍽.

세상은 우연한 조건을 숨기고 필연의 서사만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속고있다.

2025.08.20 | 조회 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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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벤자민

브런치북 <서른의 나는 세살의 나를 불러본다> 연재중

  모두가 똑같은 기준으로 성공을 호소하고 있다. 명문대, 대기업, 부동산, 돈과 자산 같은걸로 말이다. SNS를 스크롤 하다보면 화려한 스펙과 성공담이 넘쳐난다. 이 호소 속에는 '노력'과 '갓생', '자기개발' 같은 단어가 난무한다. 여기에는 본인이 행한 치열한 '노력'만 남아있고, 정작 본인이 어떤걸 이미 누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우연성'은 빠져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갓생 살자." 이런 말을 지겹도록 듣는다. 노력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런 낡은 언어는 빙산이 우뚝 서있게하는 거대한 하부구조를 무시해버린다. 세상은 우연한 조건을 숨기고 필연의 서사만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속고있다.

 

노력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나 역시 오래도록 노력이란 말에 붙들려 살았다. 더 많은 자기계발서를 읽고,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더 격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렇게하면 결국 성공 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물론, 노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았으면 이루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노력의 결실 또한, 거대한 '우연'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공 호소를 하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단한 노력만으로 성취한 것 같아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행운의 발판이 있었다.

  누가 성공을 했든, 그 성공의 90%는 이미 '우연'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어떤 집안 출신인지, 어떤 도시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말이다. 이 모든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조건일 뿐이다. 각자의 출발선은 다르고, 운동장은 기울어져있다.

  문제는 내가 우연을 필연처럼 여기면서 시작되었다. 지금 내 처지에 마치 어떤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것을 알아내고,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들었다. 아주 규칙적이고 규율적인 삶을 지향했다. 그 바람에 내 안의 무한한 에너지는 억눌러져 버렸다. 늘 만성적인 긴장 속에 갇혀 있었다.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마르크스는 자신의 처지를 필연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내가 가난한 건 내 능력 부족 때문이다."라는 식의 필연화된 자기 해석을 거부한 것이다. 대신 그것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우연한 결과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노력의 악순환

  우연성을 지우고 노력탓, 의지탓 만하는 풍토는 스스로를 더 채찍질 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렇게 관리하고 통제할 수록 자신에게 내재되어있는 무한한 에너지가 억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갖고있는 힘이 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에너지, 프로이트는 무의식, 마르크스는 노동력이라고 일컬었다. 내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 창조적인 힘이 낡은 언어들로 가두어져 있다. 그 언어 중 하나가 '노력'이다.

  사회가 강요하는 노력은 더 큰 '노오력'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작은 억압이 더 큰 '어억압'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자기계발서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동기가 부여되어서 더 의식이 높아진 것 같지만, 그만큼 더 긴장하며 살아야 하고 더욱 자신을 관리하고 통제해야 한다. 심하면 자기 검열 강박에 빠지기 까지도 한다. 규칙, 규율, 질서라는 때깔 좋은 단어들로 스스로를 더욱 옥죄는 꼴이다.

  나는 여태 열심히 일하면서 스스로를 소모시켰다. 더나은 성과를 내겠다고 스스로를 더욱 억압시켰다. 노력은 나를 해방시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를 속박시켰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마르크스는 근대부터 이어진 '착취의 교묘한 형태'라고 지적했다. 스스로 더 열심히 일하고, 자기계발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과정 자체가 이미 착취구조 안에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정으로 잘 사는 건 동기부여나 노력 따위에 매여 사는게 아니다. 중요한건 가둬져있던 자기 힘을 되찾는 일이다. 내 안의 억눌린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자기 힘 되찾기

  철학자 푸코는 '자기에의 배려'를 이야기 했다. 이는 스스로에게 돌아가 자기 힘을 자기 방식대로 가꾸는 일을 말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나아가야할 자기계발의 방향이라고 보았다. 사회가 정해놓은 착취의 톱니바퀴에 나를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나를 돌보고 기르는 것 말이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과연 정말 그런걸까. 개인적으로 남들을 제치며 끝없이 달리는 데에는 그닥 관심도, 소질도 없다. 대신 인생이란 높이뛰기, 멀리뛰기, 투포환 등 저 마다의 종목을 발견하는게 아닌가 싶다. 자기만의 종목을 발굴하고 그 안에서 자기 힘을 발휘하는 여정 말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존재의 편향' 즉, 개성을 갖고 있다. 모두가 같은 기준으로 경쟁하는 평평한 사회보다는 각자의 우연성을 활용하는 울퉁불퉁한 사회가 더 바람직해 보인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을 레버리지 삼고, 미국에 태어난 사람은 영어능력을 활용하며, 뛰어난 언어감각을 가진 사람은 글을 쓰며 살아가는 거다.

  서로가 가진 달란트를 질투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불균형한 우연성을 인정하는 사회, 각자의 차이가 존중되는 사회, 남들과 다른 나의 길을 걸어가도 괜찮은 사회를 꿈꾼다. 모두가 자기 힘을 되찾은 세상 말이다.

 

갓생을 넘어, 내 삶으로

  어떤 사람은 글을 쓰며 세상과 소통하고, 어떤 사람은 코드를 쓰며 세상을 발전시킨다. 어떤 사람은 눈부신 성과로 회사에 기여해서 임원의 자리에 오르고,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충실하며 최고의 아빠와 엄마, 배우자가 된다. 어떤 사람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엑싯에 성공하여 샌프란시스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어떤 사람은 한국의 한 시골마을 기와집에서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나는 이 모든 삶의 방식이 다 소중하고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을 순수한 즐거움과 쾌락으로 쌓아올리고 있다. 규율이나 노력, 소비나 유흥 같은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이다. 진정한 갓생, 즉 신의 삶이란, '살아있다는 느낌'을 '삶을 사는 것 자체'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삶이 아닐까.

  나는 아직도 내 안의 힘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내 안의 억눌린 힘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그 힘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보기좋은 갓생이 아닌 진실된 '내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만의 삶은 우연히 주어진 조건을 인정하고, 나를 옭아매는 낡은 언어에서 해방되어, 자기 힘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나는 우연히 주어진 나의 배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피어나는 나만의 꽃을 예쁘게 키워나가기로 했다. 나에겐 정말 주어진 것이 많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 한, 각자에게 주어진 우연적 조건은 선물과 같다. 우연성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해방시켜 나만의 힘을 발휘하는 여정, 나는 이런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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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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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피의 프로필 이미지

    라피

    0
    4 months 전

    공감합니다~ 잘 되고 계신 것 같아요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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