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은 밤 늦게까지 TV를 볼 작정이다. 별다른 재밌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나간 예능 프로그램의 정말 정말 웃긴 과거 회차를 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심금을 울리는 가요가 나오는 경연 프로그램도 괜찮다. 가지각색의 일반인이나 혹은 언제나 안 궁금한 듯 궁금한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나오는 토크쇼도 괜찮다. 그중 제일 나은 것은 아무래도 최근 유행인 누군가의 집을 들여다보는 관찰 예능일 것이다. 정말 재밌으니까.
TV에는 그래서 정의 집보다 몇 배는 좋아 보이는 깔끔하게 정리된 한 가수의 집이 나온다. 내부 인테리어가 심상찮은데 역시나 연예인이라 그런 걸까. 화려하게 꾸며 놨다. 그리고 개 두 마리. 가수의 집에는 개가 두 마리 산다. 두 마리 모두 커다란 달마시안으로 국내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그러나 유명한 견종이다. 정은 가수의 감춰져 있던 삶을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내지른다. 개들이 컹컹 짖는다.
정의 옆에도 개가 한 마리 앉아 있다. 늙은 개. 이름은 조이다. 조이는 벌써 23년을 살았다. 사람의 나이로 치환하기 위해 7을 곱하면 이미 140살이 넘는 노견 중에 노견이다. TV에서 커다란 달마시안들이 컹컹 짖지만, 작은 개인 조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다. 조이는 요크셔테리어다. 작고 늙은 개인 조이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앞도 보이지 않고, 냄새도 잘 맡지 못한다. 대부분의 감각을 차단당한 상태의 조이는 촉각만이 거의 유일하게 살아있다. 그래서 움직이기 위해, 혹은 식사를 하기 위해 얼굴부터 들이미는 버릇이 생겼다.
거실은 불이 다 꺼져 있고, TV만 빛나고 있다. 아니 TV 불빛이 반사되어 비추는 정과 조이의 얼굴도 빛나고 있다. 조이는 TV를 못 보지만 정은 조이가 TV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이와 함께한다고 믿는다. 조이도 즐거움이나 슬픔을 알까. 기쁨을 느끼거나 분노를 느낄까. 조이의 어렸을 적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어렸을 적의 조이. 작은 솜뭉치 같았던. 벌써 20년도 더 된 기억이다.
조이의 옆에는 조이가 평소 좋아하던 장난감이 놓여 있다. 거대한 몸집의 목이 길었던 공룡 모양의 봉제 인형. 조이는 그것을 물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조이는 가만히, 가만히 앉아 있을 따름이다.
오늘 밤을 새기 위해 정은 커피를 많이 마셨다. 오늘은 밤을 샐 것이다. 오래전부터 꼭 하루는 밤을 새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아마도 조이가 너무 늙어서 더 이상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됐을 때. 조이가 큰 병을 앓고 있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수의사가 말했을 때.
정은 TV를 이리저리 틀며 밤을 유랑한다. 이따금, 정은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때마다 그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최대한 밝고 명랑하게 TV를 보고자 한다. 지루하다는 것을 들키지 않고자 한다.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사람들이 그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만 같다. 정은 조이를 쓰다듬는다. 조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정은 문뜩 생각한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조이가 이렇게 늙어버렸을까. 조이가 이렇게 아팠을까. 조이가 이렇게 슬픈 존재가 되어버렸을까.
아침이 되어 정은 조이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간다. 절차는 간단하다. 마취약을 먼저 투약하고, 그다음에는 독약을 주입한다. 그러면 23년의 삶이 금세 끝이 난다. 정은 축 늘어진 조이를 쓰다듬어 본다. 그러나 그곳에 조이는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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