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마음 [주간 묘사 제 8호]

방승현 짧은 소설

2023.06.21 | 조회 343 |
0
|
주간 묘사의 프로필 이미지

주간 묘사

매주 수요일 짧은 소설을 받아보세요.

첨부 이미지

(A)

  타인으로부터 인식되지 않는 삶은 진짜일까?

  크고 넓은 종이에 무언가 적으려고 망설이는 사람 같은 게 주변에 보이면 마음이 놓인다. 내가 특별히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것이 느껴지면 내가 망망대해에 어떠한 것과도 관계하지 않고 지내는 것 같은 느낌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 잔디밭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나는 한가로이 누워서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람이 더 재밌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그 삶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막막함을 느낀다. 어떻게든 살아갈 그 사람이 당장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삶을 저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불안감은 실제 그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그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이렇기 때문에 그의 삶을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대부분의 삶은 좋은 체계가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냥 뒤섞여 있다. 뒤섞여 있어서 마음이 놓이기 때문에 뒤섞여 있다. 그렇지만 또한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고 나는 그것에 합류해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믿으면 진짜 같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진짜 같다. 내가 그저 상상할 수 있는 타인의 세상이 눈에 보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내가 어떤 문자를 받고 어떤 말투로 읽으며 어떤 말로 대답을 하든 그것은 아주 아득한 곳에서 오는 주파수 같은 것이 아니게 된다. 저기 이제는 종이에 스케치를 시작하는 사람의 말이 될 수도 있고 강을 부유하는 오리떼를 선글라스 너머로 지켜보는 사람의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안에 있는 것뿐 아니라 그 밖에도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같은 이불을 덮고 누우면 대개 사람은 너무 쉽게 연결의 감각을 체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소통이 때로는 외부에 배타적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단절을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모든 타인과 한 명의 타인을 맞바꿀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까? 그것들이 모두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람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전 내내 문자를 보내지 않는다. 때가 되면 집에 가자고 한다. 나는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자고 말한다. 꿈에서 깰 것 같다.

  나눠지지 않은 마음은 진짜일까?

 

(B)

  날씨가 나쁠 때 기분이 나쁜 것은 괜찮다.

  그러나 날씨가 좋을 때 기분이 나쁘면 견딜 수가 없다.

  다 잘될 거야. 곧 이사도 가게 될 거고, 이사를 하고 나면 동생이랑 같이 살면서 아침에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읽어야지. 매일 날씨 얘기를 하게 되겠지? 오늘은 날씨가 별로네, 빨래를 내일 하는 게 좋겠어. 건조기를 사면 어떨까? 둘 데가 없잖아. 여기에 평생 살 것도 아니고. 이러다가 일 년이 채 안 돼 네가 나가게 되면 우린 어떡해? 그렇게 작은 말다툼으로 번질 때쯤 동생의 애인이 아침밥을 먹으러 나오고, 그는 늘 늦게 일어나지만 아침을 끝내주게 차려 먹는 사람일 거야. 너도 먹을래? 감자를 삶으면서 나를 위해 하나 더 넣을지 말지를 꼭 물어보는 사람일 게 분명하지. 나는 됐다고 말을 하고, 너에게 문자를 할 거야. 우리 탁구 하러 나갈래? 그러면 너는 꼭 12분, 15분쯤 지나서 꼭 말을 하는 듯이 들뜬 이모티콘을 보내며 ‘그래! 그러자! 날씨 너무 좋다! 잘 잤어? 나 아침에 집에서 거미를 발견했어. :(‘ 라고 수다스럽게 말을 뱉어대기 시작하겠지. 혹은 오늘은 안 된다고, 그렇지만 내일 일이 끝날 때쯤 만나면 어떨지 물어볼지도 몰라. 나는 그럴 때 실망감을 어떻게 감추어야 할까. 내가 실망하면 너도 실망할까 봐. 기어코 나를 위해 감자 하나를 더 삶아 접시에 덜어주는 동생 애인의 얼굴을 스윽 보고는, 웃고, 감자를 포크로 으깨고 으깨서 완전히 으깨질 때까지 천천히 으깨는 거야. 실망감이 가라앉을 때까지. 다시 좋은 기분이 될 때까지. 네가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이 식탁에 앉아 그림처럼 우리와 어울리고 같이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책을 보고 잠에 드는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내가 여전히 즐겁게 살 수 있게. 너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너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하는 연습을 해나가는 거지. 이사를 하고 나면 더 좋은 기분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감자를 먹고 동생이랑 동생의 애인이 지난밤 개표 결과에 대한 이야기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나 어린 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말없이 들으면서. 그런 것들에 아무런 의견을 가질 수 없는 나의 마음 상태에 대해 생각하면서. 왜 이런 것들이 도무지 끝나지 않는 건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사실은 그런 일이 생기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애초에 너에게 문자를 보내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디론가 가겠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걸 알고 있으면서 창문을 연다. 멀리 푸른 잔디밭이 보인다.

 

(C)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이 도시락을 챙긴다.

  간밤에는 차마 문자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알람을 듣기 위해 소리를 키우고 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기분이 곧 내 기분이 되곤 한다. 대부분은 아이에게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기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천천히 곱씹어 본다. 방향을 찾지 못하면 결국 나도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속이 상한다. 그럴 때는 정말 타인이 필요하다. 나보다도 나의 기분에 더 신경을 쓰는 타인이 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속절없는 어림잡음에 휩싸이곤 한다. 기꺼이 그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건 내 마음이지, 아이의 짜증을 풀어주고 싶은 것도 내 마음이고. 소금 간을 하지 않은 계란말이에 잘게 썬 토마토랑 파프리카를 섞는 것도 내 마음이다. 글루텐 프리 빵이랑, 길쭉하게 모양을 낸 당근과 초록색 포도, 입에 쏙 넣을 수 있는 브레첼 모양의 크래커 정도만 있어도 아이에게 절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지난밤에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어도, 아이의 기분이 풀리고 나면 나도 풀리고 그럼 그뿐이다. 언젠가 너도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날이 올 거야. 타인이 너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들겠지. 그렇게 강렬히 소망하다 보면 결국, 사람은 무언의 규칙을 공유하며 다 같이 잔디밭에 누워 있는 모양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상호 간의 적절한 공간과 연결의 감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체득해 나가는 거지. 모든 사람에게 각자 다른 감각과 거리감이 있다는 것도 배우면서. 모두가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필요한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불안감이 잦아들게 된다. 그런 것이 믿음이 아닐까. 결국에는 네가 화가 난 이유를 내가 알게 될 거라는 믿음. 그리고 믿기 위해 감각을 키워주는 게 나의 일이겠지. 도시락 뚜껑을 탁탁 닫고, 물병까지 챙기고 나면 너를 깨우러 간다. 오늘 오전에 보낼 문자 내용은 이미 정했어. 그 사람이 어떤 아침을 보내고 있을지는 여전히 막막하지만 나는 잔디밭에 깐 수많은 돗자리 그 중 어딘가에 있다. 나를 보고 있을지 혹은 나와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 혹은 아직 나올 준비가 안 됐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는 햇빛이 따가워 눈을 감은 것처럼 은근하게 그 사람의 방향으로 윙크를 보낸다.

 

 

 

 

 

첨부 이미지
첨부 이미지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주간 묘사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5 주간 묘사

매주 수요일 짧은 소설을 받아보세요.

메일리 로고

도움말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로10길 6, 11층 1109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