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교토(Loop. Kyoto)] Vol.2 비로 씻기다 - 쇼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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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비가 온다.
해가 뜨지 않는 회색빛 교토.
어제 너무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그냥 날씨 탓일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몸을 억지로 이끌고, 숙소 문을 나선다.
성 옆에 나무로 된 아주 작은 카페가 있단다.
2평 남짓. 다찌 좌석 4개. 심야식당 같은 작은 공간.
비를 피해 들어간 것뿐인데, 조곤조곤 대화 꽃이 피어있는 실내가 포근하다.
주인이 말없이 필터를 올리고, 일본식 정석 핸드드립으로 한 잔을 내린다.
살짝 태운 맛이 나는 쌉싸롬-함이 입에 부드럽게 감도는 커피.
커피를 다 내린 뒤, 나의 반응을 힐끗보더니
이내 만족한 표정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주인은 말없이 커피 필터를 접기 시작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본인만의 요령으로.
그 반복을 멍하니 보고 있다.
료안지 석정에 긁혀있던 홈들이 떠오른다.
규칙적이고 섬세한 반복. 여기에도 같은 것이 있구나.
이제서야 주변을 둘러본다.
교토대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지인을 생각한다.
'선물해야겠다'
원두를 하나 집어들었다.
쇼렌인
한층 기분이 나아진 채로 쇼렌인에 들어섰다.
친절한 인사와 함께 각자의 적절한 자리에 앉아 운치를 즐기라는 말에 발을 뗀다.
삐그덕삐그덕 마루가 소리를 낸다.
소리가 나도록 만든 것은 아마도 무시무시한 이유 -암살 방지용와 같은 것- 이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평화로운 소리로만 전달된다.
비 오는 소리에 그 삐그덕 소리만 있고,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는 묻힌다.
옆자리에 엄청난 아우라를 풍기는 남선생과 여제자가 있다.
무언가를 가리켰다가, 서로를 마주보고 끄덕였다가.
스케치북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리고 싶은 풍경.
아쉬운 대로, 필름 카메라의 셔터를 살포시 누른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림에는 소질이 없다.)
"찰칵-"
비에 젖은 나무 냄새.
정원에 핀 이끼 냄새.
삐그덕 소리와 빗소리에 맞추어
여태 미묘하게 엇박자를 타던 숨의 패턴을 찾아간다.
멍하니 연못을 바라본다.
어딘가 긴장한듯 들어있던 힘이 빠진다.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졌던 숨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석정에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오늘, 쇼렌인의 비 한 줄기에 복잡하던 생각이 하나씩 씻겨나간다.
같은 교토.
정반대의 경험.
어쩌면 둘 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일게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어제 석정에서 얻은 해방감 뒤에도,
마음한 곳의 공허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었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빙글빙글 도는 석정 앞에서
해탈에 가까운 무력감을 느꼈으니까.
그런데 비에 젖은 사원 안에 앉아 있으니,
안개처럼 남아있던 번잡한 것들이
선명한 빗소리에 실려 하나둘 씻겨 내려나간다.
남은 것은 고요.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조그맣게 피어오르는 아주 작은 감각 하나.
어제는 어렴풋하던 감각이 어느새 단단해져 오롯이 올라왔다.
이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맞아.
아빠도 이 나이에, 이 곳에서, 동일한 질문을 했지.
나 혼자서 이 굴레를 도는 게 아니지.
영원 속에서 나만 의미 없이 맴돌이를 하고 있다는
인간 본연의 고독도 함께 씻겨나가는 듯 싶었다.
자갈 위의 패턴도, 세대도, 감상도
반복. 그리고 여기서 오는 인생 본연의 회의감 -
인류의 이 오랜 난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은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철저히 혼자라 믿었던 이 되풀이 위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것.
그 자체로 위로가 되었다.
어느새 귀에 쟁쟁하던 빗소리가 멈추고, 해가 구름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민다.
(3편에서 계속)
Micro-Mission: 되감기 🧐
비 오는 날, 고즈넉한 카페 하나 골라 앉아 있을 때가 생겼다.
스마트폰은 뒤집어놓고, 빗소리만 들으며 10분.
무위 그리고 무념이 무슨 소용이겠냐고 생각했던 내가,
생각이 명료해지는 경험을 한 뒤로 빗소리에 생각을 종종 맡기게 되었다.
어느새 번잡한 생각들이 씻겨내려나가는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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