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기

카파도키아의 작은 그릇

넘쳐흘렀던 카파도키아의 밤

2026.03.20 | 조회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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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조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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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지 않는 것들. 튀르키예(Things That Don't Crumble)] Vol.1 카파도키아의 작은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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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동굴의 마을.

 

동생의 편입 시험이 끝났다.

세계여행자라면서 튀르키예 한 번 안 가본 게 민망하기도 했고.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이곳에 왔다.

 

이번 여행에서 딱 하나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주일 온라인 예배.

출발 전부터 몇 번이고 피력했던 것.

'난 가서 예배만 잘 드릴 수 있으면 돼.'

(써놓고 보니 내가 봐도 너무 고지식한가 싶다.)

사진으로 추정컨데, 이때까지만해도 좋았던 분위기
사진으로 추정컨데, 이때까지만해도 좋았던 분위기

 

여행 일정이 조금씩 바뀔 때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카파도키아 도착하면 먼저 드릴까? 중간에 잠깐 드릴까?"

 

동생에게 일정을 강요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여행에 와서까지 이렇게 유난을 떨어야겠냐는 시선을 받지 않을까.

아무래도 예민한 문제이다 보니 더 조심스러워

말을 꺼낼 때마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카파도키아에 도착한 날 사건이 터졌다.

동생의 체력이 바닥나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숙소로 향했다.

일정이 3시간 일찍 끝났다.

나와 아버지는 생각했다.

'지금 예배 드리면 딱 되겠네'

 

"아니, 밤에 드리기로 했잖아. 나 배고프다고."

"둘은 뭐라도 먹은 사람들이고…!"

동생이 볼멘소리로 짜증을 냈다.

 

우리는 내내 동생의 컨디션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일찍 들어오게 된 거, 기왕 예배드리고 밥먹고 딱 잘됐다 생각할 수도 있지 않나.

우치히사르 성
우치히사르 성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가 맞춰주고 있는 거, 알고 있으면 좋겠어. 바라는 게 아니라 알아주기만 하면 돼."

"이게 말이 속상하다면, 내 표현이 여기까지가 한계라 그런거니까 이해해주고, 만약 표현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면 내가 거기에 맞춰서 다시 말할게 미안해. 모자라서."

 

"하나님이 어디 가? 밥 먹고 하면 되잖아."

"뭐라고?"

큰 싸움으로 번졌다.

 

아버지가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여기 와서까지 뭐 하는 거야, 둘이."

그리고는 나가셨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끊으려 했던 담배를 사러.

 

케이브 호텔의 흙벽면.

부드러운 모래 입자들이 탁하게 반짝이고, 부스러질 것 같은 우글우글한 표면.

낮은 천장. 어두컴컴한 방.

동굴 기둥들을 중심으로 방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어딘가 단절된 듯한 느낌.


'말하지 말걸.'

이 생각이 이내 '왜 나는 이렇게 그릇이 작지' 로 번져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오냐오냐 다 받아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럼 안싸웠을텐데'

첨부 이미지

 

답답해서 밖으로 나왔다.

진흙탕 길을 정처 없이 걸었다.

바위를 뛰어 올랐다.

한참을 걷다보니 차 한 대 지나다닐 만한 돌길이 나타났다.

바람이 많이 불었지만, 해가 아직 있어서 아주 춥지는 않았다.

첨부 이미지

 

버섯 기둥들을 헤치고 나오는 빛줄기들.

마을 뒷편으로 핑크빛이 타올랐다. 석양이 야속하리만큼 예뻤다. 

한참을 걷다 고개를 드니, 웬걸 그 먼 우치히사르 성이 눈 앞에 있다.

차를 타고 꽤나 이동했던 곳인데... 이렇게나 가까웠나.

 

비가 추적추적 내려 내 마음만큼이나 칙칙한 풍경.

성에는 유독 구름이 더 껴서, 더 우중충해 보였다.

정처없이 걷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건물이 보였다. 우치히사르성
정처없이 걷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건물이 보였다. 우치히사르성

 

동생.

그대로 품어주면 되는 걸, 감정이 좀 상했다고 알아주길 바라면서 말을 꺼냈다.

 

나의 작음과 한계에 대한 절망이 과거의 내 모습까지 향했다.

겉잡을 수 없이 급속도로 불이 번졌다.

 

친구들.

그대로 받아주면 되는 걸, 몇 번이고 서운해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맞아요 맞아요. 엄마말이 맞아요' 하면서 잘해드릴 걸.

전 여자친구.

어린 아이마냥 받아줄걸. 쿠션처럼 전부 받아주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내 옆에 있는 공동창업자.

사소한 불만들을 가슴에서 삭혀 마음에 남아있던 왠지 모를 불편함.

 

절망이란 것은 과거의 내 모든 모습을 다 태우자

더 태울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내 미래의 내 모습까지 태워버릴 기세로 옮겨 붙었다.

이래저래 속 썩일 동료들.

곧 만날 사업 파트너들.

이래서 사업은 제대로 하겠나.

 

결혼할 미래의 아내와 자식들

이래서 가정은 제대로 꾸리겠나.


 

'왜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카파도키아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버섯 돌집들이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까.

아빠는 못 버틸 거다.

동생은 평생 짊어지고 살 거다.

동업자는 한참을 헤매겠지. 얼마전 읽은 노르웨이의 숲, 와타나베처럼.

누가 또 슬퍼해줄까.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끔찍한 생각들을 내려놨다.

아까 아빠가 나가며 남긴 한마디가 떠올랐다.

"잘 풀어봐라."

 

눈물을 닦고 돌아섰다.

다시 거의 두 시간을 걸었다.

깜깜해진 뒤에야 마을에 도착했다.

밤이 깊어 전등들이 하나둘 켜지자, 카파도키아의 야경이 펼쳐졌다.

그 와중에도 야경을 아름답게 느끼는 내 모습이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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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왔다.

동생은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아무말도 없다.

나는 너무 추웠다. 저녁을 먹으면 체할 것 같아서 둘이 먹고 오라고 했다.

잠깐 눕겠다 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예배 소리에 깼다.

아버지와 동생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멋쩍게 소파에 앉았다.

 

사랑의 종교라는데 이것하나 품지 못해서,
게다가 예배 지키겠다고 싸웠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고약한가!
이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나약한가.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흐른다.

 

동생은 들어가서 자고, 아버지가 싸온 음식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포장 박스에 양고기, 감자튀김, 샐러드. 밥까지 실하게.

동생이 따로 챙겨달라고 했다는 밥.

식었지만 맛있었다.

양고기를 입에 구겨 넣으며,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작음과 약함에 대한 묵상들. 속상함들.

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융지, 처음에 널 알아가는 단계의 사람들은 그게 별나게 보일 수 있지만."

"널 충분히 아는 사람들은 융지 너 좋아해. 많이."

"그걸 알고, 너도 네 스스로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눈물을 꾹 참았다.

아빠는 늘 무조건적인 사랑이 흘러내리는 한 몸의 존재로만 생각해왔지.

이렇게 타인처럼, 마치 동료처럼 객관적으로 말해 주는 게 색다르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다음 날 새벽.

열기구 투어를 위해 프로그램에서 주는 조식을 데면데면하게 먹었다.

밥 먹으며 한쪽에서는 이미 시작한 열기구들이 우리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좋게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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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 버스에 올라탔다. 출발 직전이었다.

동생이 먼저 말했다.

"미안해. 우리 싸우지 말자. 잘 지내자."

별것도 아닌 한마디에 풀려 버렸다. 극적으로.

그리고 허무할 만큼.

'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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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 절벽아래로 고꾸라졌으면 어쩌려고 했나.

참 허무했겠다.

 

열기구에 올라탔다.

말이 필요 없었다.

세상 처음 보는, 합성한 듯한 풍경.

일출. 다른 열기구들. 4000미터 가까이 우뚝 솟은 에르지에스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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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파일럿. 아버지의 행복한 표정.

높은 곳의 상쾌한 아침 공기.

갈등으로부터의 해방감.

안도감.

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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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작으면 좀 어떻나.

아빠는 내가 별나도 좋아해준다 했고.

동생은 밥을 따로 챙겨달라고 했고.

친구들은 매번 서운해해도 다시 전화를 걸어왔고.

꼭 붙어 있는 열기구가, 뭔가 사이좋아보여 마음이 찡했다.
꼭 붙어 있는 열기구가, 뭔가 사이좋아보여 마음이 찡했다.

 

그 손들이 이미 있었는데, 내 작음에 절망하고 있었다

— 내 그릇의 크기를 몇번이고 재며.

 

카파도키아의 버섯 바위들이 아래로 멀어져 간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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