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지 않는 것들. 튀르키예(Things That Don't Crumble)] Vol.3 벗겨진 벽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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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의 피비린내
입장료만 무려 10만 원. 게다가 곳곳은 보수 공사 중이라 천막이 쳐져 있다.
이 비싼 돈을 내고 굳이 들어가야 할까. 아야소피아 입구에서 한참을 멈춰 서서 망설였다.
하지만, 비싸거나 어수선해서라는 이유는 그저 핑계였을지도.
최근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근본적인 피로감.
거대하고 화려한 유산 앞에서, 문득 작아져 버린 나를 마주하기가 싫었던 걸까.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둥거리며 살고 있는가.
어차피 저런 대단한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치열하게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세상의 방식이 껍데기뿐임을 깨닫고, 나는 일찌감치 그 성공의 궤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순간, 정반대의 지독한 허무주의가 나를 덮쳤다.
'성공의 꼭대기를 향해 달리지도,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도 않기로한 내가 대체 세상에서 뭘 할 수 있겠어?'
어차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라는 지독한 무력감만이 맴돌 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이 수천 년의 요충지는 나와 정반대였다. 수많은 제국들이, 힘을 가진 자들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며 어떻게든 이 땅의 주인이 되려 발버둥 쳤다. 무언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목숨 걸고 서로를 짓밟았던 고대인들의 거대한 야욕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조하던 나의 차가운 허무주의가 묘하게 충돌했다.
어두운 동굴 같은 입구를 지나며, 나는 생각에 잠긴다.

수천 년의 층위
내부로 들어섰다. 사방이 돌로 덮여 있어 석빙고처럼 서늘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공기가 따뜻하다.
눈앞에는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다.

보수용 천막 사이, 벗겨진 모스크의 벽지.
그 아래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기독교의 성화가 뚜렷하게 자국을 내며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위압적인 벽을 따라, 이번에는 거대한 검은색 아랍어 캘리그래피 원판들이 걸려 있다.
마치 땅따먹기 마냥 "이곳은 이제부터 우리 땅이다"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기독교의 심장부에 이슬람 문양이 덧씌워진 극단적인 폭력의 흔적. 힘의 논리에 의해 어제는 기독교인으로, 오늘은 이슬람교인으로 개종을 강요받았을 약자들의 고통이 스친다.

그러나 그 파괴자들조차 이 숨이 멎을 듯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칼을 거두었나보다. 15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 이스탄불)를 무너뜨린 투르크의 군마들도 이 건물을 완전히 부수지는 못했다고. 결국 파괴 대신 덧칠을 택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지금 눈 앞에 있는 이질적인 것들의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공존이다.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종교만 존재했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수천 년의 층위.
그 수백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토록 엎치락뒤치락 권력과 승리를 탐하던 그 거대한 제국의 지배자들. 영원할 것 같던 그들은 모두 사라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오직 이름 모를 자원들로 쌓은 이 돌덩어리들만이 남아, 유유하게 시간을 버티고 서서 지금의 우리와 만나고 있다.
반짝이던 것
이 거대한 역사와 공간 앞에서, 나를 짓누르던 알량한 허무주의조차 부서져 내린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의 손길이 묻어난 차가운 벽. 세상을 호령하던 지배자들의 거대한 야욕조차 시간 앞에서는 한 줌 먼지로 무의미해지지 않는가. 그 대단한 영겁의 시간 속에, 나는 고작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며 찰나의 자조에 빠져 있었을 뿐이다.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야만 삶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어깨에 한껏 들어가 있던 긴장이 빠진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상처 내고 덧씌우며 살아남은 이 장엄하고도 비릿한 아야소피아 앞에서, 몇 년전 교토에서 떠오른 지혜자의 그 말은 또 다시 나타나 침체돼있던 나를 바닥에서 밀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묘한 해방감이 밀려온다.
우리가 참으로 남겨야 할 것은 세상을 뒤집을 거대한 업적이 아니다.
타인을 밟고 올라 무언가를 부수고 역사에 내 이름을 새겨야만 삶이 의미 있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내게 남는 것은 대단한 권력이나 칭호도 아니다. 나의 과거 위에 어떤 배움을 덧씌워갔는가,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과 어떻게 하루를 살아냈는가 하는 그 역사뿐.

나는 대체 무엇을 그리 대단하게 이뤄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무가치하다 몰아세웠던가.
'세상을 바꿀 만한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니다'라는 거창한 핑계로, 오히려 소중한 일상과 내 곁의 사람들을 무심코 흘려보내진 않았는지 가만히 떠올려 본다.

무심하게 "응"이라 답하시던 아버지. 이게 무슨 대화야 😂😂
얼마나 사색에 잠겨있었던걸까.
놀란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곳에 내 사랑하는 가족, 아버지와 동생이 천정을 가리키며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쳇-"
대단해져야만 한다는 주입된 강박과 그로 인한 허무주의에 가려져 있던 우리 일상의 진짜 생명력
겨진 모스크 벽지 뒤에 숨어 수백 년을 묵묵히 기다린 저 성화들
그 모든 것이 저 반짝거리는 작은 것들에 비친다.
가족들을 향해 웃음을 지어보인다.
(마침.)

My heart is not proud, Lord, my eyes are not haughty;I do not concern myself with great matters or things too wonderful for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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