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즘의 첫 번째 장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다면 표상적 사유와 리듬을 타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표상적 사유를 알기위해서는 표상이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야합니다.
표상개념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를 뽑자면 매트릭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 1편(1999)에서 인공지능 시스템이 만든 가상현실을 깨닫고 자각하는 네오(주인공)을 볼 수 있습니다. 모피어스가 나타나 빨간약을 제안하기 전까지 현실인데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기이함을 느끼지만 확신할 수 없었고, 이내 빨간약을 먹고 나서야 자각하여 현실세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모든 정보는 감각기관 신경세포들의 연쇄반응으로 현상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즉, 신경세포의 모든 입력값을 조성할 수 있다면 매트릭스에서의 가상체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죠. 그래서 매트릭스에서 목 뒤 중추신경계에 시스템을 바로 접속하는 어댑터를 모두가 장착하고 있습니다. 이때 지각된 감각의 총체, 감각을 종합한 현실지각의 심상, 이미지를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인식된 세계를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를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철학에서 인식론적 논쟁은 뿌리 깊은 역사가 있습니다. 영국경험론, 대륙합리론으로 불리는 양대산맥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습니다.
영국경험론에 따르면 인식 가능한 것은 경험한 것에 한정됩니다. 즉 경험하지 못한 것은 신뢰 가능한 지식일 수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유명한 정주영 회장의 말이 있죠. 해봤어? 합리적으로 추론한 결과가 아무리 실패를 가리키더라도, 실제로 부딪히고 경험하면서 극복 가능하다는 그의 말은 경험론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을 대립 항으로 놓을 때 경험해본 것에 무한한 신뢰를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죠? 수학은 언제나 합리적 논리가 경험적 발견을 앞질러 가는 학문입니다. 수학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의 실험적인 사유는 경험을 뛰어넘어서 있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오히려 수학의 정삼각형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정삼각형은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닌 오직 이성적 기준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정삼각형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완벽해 보이는 직선일지라도 확대해보면 분자단위의 원자단위의 불규칙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시공간은 이미 중력에 의해 휘어져 있으며, 우리는 아주 작은 시공간의 휘어짐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통하며 표현하는 대부분 것들은 사실 실체를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칸트에 와서야 이 둘이 관념으로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경험적으로든 합리적으로든 인식된 것은 관념으로 묶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만들어진 관념은 경험에 앞서, 감각-지각의 현상에서 심상을 이미지화시키는데 작동하게 됩니다. 이처럼 경험하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석의 편향성을 불러일으키는 관념을 우리는 고정관념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들뢰즈의 표상개념을 다시 들춰 볼 수 있습니다. 다시-나타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표상은 이미 경험하기 이전에 발생한 고정된 관념에 의해 경험된 정보를 해석하는 경향성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경향성은 한번 형성되면 좀처럼 깨기 힘들어지게 되면서, 해석주체를 오만한 지식의 저주에 빠지게 합니다.
들뢰즈는 이 표상적 사유를 경계합니다. 고정관념을 무한한 반복활동을 통해 세계를 경험함에도 보는 것만 관성적으로 보는 동일성으로의 회귀를 벗어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봐왔던 세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봐왔던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세대들에게 늘 고리타분해 보이기도 합니다. 전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들에게는 지루하고 또 지루한 일들일 뿐이겠지요.
이는 비단 세대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도 충분히 발생하며, 해외여행만 나가더라도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보통의 사람들을 너무나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내가 가진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마치 아이가 된 것처럼 새롭게 경험을 재구성하고 기본이 되는 삶의 방식을 찾아 나서야할 것입니다.
이 삶의 방식을 찾아 나가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눈치 보기에 가깝습니다. 상황을 보고 판단해서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것, 상대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해보고 변형해보는 것. 실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전의 집단 혹은 국가에서의 삶의 방식은 더는 통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유는 마치 재즈 악단의 일원이 되어 각자들을 살피고 내가 어떤걸 치고 나갈지 어떤식으로 변형할지, 무엇이 공통인지 알아가는 과정, 실천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사유방식, 삶의 방식을 리듬 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듬타기에 관한 글은 분석맨님의 글을 읽어주셔도 좋을것같습니다.
노마디즘1_0장1-2_철학을 음악처럼 들으며 리듬을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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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gijyh
동일성의 회귀'.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는 부정적인것인가요? 정량평가가 어려운 대상일것 같은데.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을까요?
개념지도 그리고 읽기와 쓰기
부정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의 관념을 고집하는걸 경계하고 있어요. 우리가 뭔가를 배울때는 고정된것도 중요하지만 고정되지 않은 무수한 실험적 사유가 있기 때문에 학습이 일어나는것처럼, 창조적인 활동의 이면에는 고정성의 회피가 필요합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에는 늘 표상적인 사유 너머를 찾아야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에 매우 필요한 질문 감사합니다~
megijyh
답변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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