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것들은 있다가도 없을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이 없으면 세계가 사라진다.
<퇴근길의 마음> 중에서
정말 오랜만에 씨네큐브 광화문에 영화를 보러 왔습니다. 아내와 데이트할 때 종종 들렀던 개비스 커피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영화를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다음 회사에 출근하기 전까지 무계획으로 쉬고 있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매일 캘린더가 고등학생 시간표처럼 빽빽하게 차 있었는데, 지금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퇴사 첫 주에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쉬려니 어떻게 해야 잘 쉬는 건지 그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요. 고민 끝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보기로 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마음에 슬러지[1]가 끼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불안, 피로,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쌓여 일의 효율뿐만 아니라 일상의 행복마저 가라앉게 만드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엔진 오일을 갈아주고 싶은데 언제 멈춰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달리는 차의 바퀴를 교체한다'는 표현은 많이 들어봤지만, 주행 중인 차의 엔진 오일은 어떻게 갈아야 할까요?
이다혜 기자님은 <퇴근길의 마음>에서 '평상시의 나'를 관리하는 것이 곧 내 '최저점'을 떨어뜨리지 않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일하지 않는 평소의 나를 관리하기 위한 자기만의 루틴이나 방법이 있나요? 일을 잘하기 위해 잘 쉰다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번 주에는 '쉼'에 방점을 찍어보려 합니다.

주의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
짐 자무쉬의 영화 <패터슨>의 주인공 패터슨의 삶은 참으로 단조로워 보입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리얼을 먹고, 유니폼을 입고 출근해 버스 운전을 시작합니다. 선택하고 고민할 일 없이 물 흐르듯 하루가 지나갑니다. 퇴근 후 강아지 마빈과 산책하고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까지가 패터슨의 루틴입니다.
주의 깊게 그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매일 흥미진진한 스펙터클이 벌어집니다. 쌍둥이를 몇 커플 발견하는 우연, 어느 소녀와의 시에 대한 대화, 코인세탁소에서 만난 래퍼, 술집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극까지. 이런 게 스펙터클이라고요? 싶겠지만, 저염식같이 슴슴한 이 영화의 리듬 속에서 시시콜콜해 보이는 순간들도 조미료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루틴이 고정되어 있기에 작은 사건들이 의미 있게 조명될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패터슨은 미세한 삶의 파동을 포착하여 아름다운 시를 씁니다.
인간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주의력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고 합니다. 수많은 자극에 반응하다 보면 어느새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는 걸 느낄 때가 있어요. 따라서 어디에 나의 주의를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건 중요합니다. 저전력 모드로 일하다 유미를 만나면 스위치가 켜지던 <유미의 세포들>의 순록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에너지를 쓸 수 있게 잘 아껴두는 거죠. 패터슨에게 반복되는 일상은 쳇바퀴가 아니라 행복의 최저선을 지키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되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일용할 주의력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패터슨>을 본 다음 날, 출근길에 문득 삶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똑같은 출근길인데 버스 창가에 비치는 아침 햇살의 따스함, 한강에 반짝이는 윤슬의 아름다움에 행복한 감정이 몽글몽글 피어올랐습니다. 배우 앤서니 홉킨스도 한 인터뷰에서 영화 따위보다 생명의 아름다움과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바쁜 일상에 치여 살더라도 오늘 하루의 행복을 음미할 한 줌의 주의력 은 어딘가 아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필요한 주의력을 남겨두려면 가계부라도 써야 할까 싶습니다. 나의 의식이 어디선가 줄줄 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어요. 패터슨처럼 저전력 디폴트 모드로 살아갈 수 있는 루틴을 개발하는 것도 좋겠고, 숏츠나 릴스 같은 블랙홀을 경계하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구독자님도 따스한 아침 햇살, 사랑하는 이의 웃음, 선선해진 저녁 공기가 주는 기쁨을 느낄 정도의 마음은 늘 구석에 남길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일이 아닌 일에 몰입하기
회사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마다 약속이 있다고 하고, 팀원들이 찾지 못할 후미진 골목의 카페에서 글을 썼습니다. (결국 한 번 발각되고 말았지만...)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순간들이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밥을 굶어 배는 고팠지만, 커피 한 잔과 함께 창작에 몰입하던 순간이 제게는 매일을 버티게 해주는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이다혜 작가는 <퇴근길의 마음>에서 일이 아닌 일에 하루 한 시간 몰입하는 것 을 나의 '최저점'을 방어하는 좋은 솔루션으로 제안합니다. 일을 잘하기 위해 잘 쉬는 것이 중요한데, 몰입이야말로 가장 좋은 '쉼'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영화 속 패터슨이 점심시간에 벤치에 앉아 시를 쓰는 것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매일 달리기를 하는 것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정비 시간인 셈이죠.
몰입은 실제로 뇌의 휴식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멍 때리거나 외부 자극으로부터 벗어나 몰입하는 상태에 들어갔을 때 뇌는 디폴트 네트워크 모드(DMN) 상태가 되는데, 이때 그동안 쌓여 있던 정보들을 정리하며 자아에 대해 성찰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고 해요. 컴퓨터로 치면 디스크 조각 모음을 실행하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오래 달리기 위해 꼭 필요한 엔진오일을 교체하는 시간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평소에 몰입하는 경험을 자주 쌓아두는 것은 일에 몰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몰입 이론(Flow Theory)에서 몰입에 빠질 수 있는 8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그중 핵심은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수준의 목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5km를 뛸 수 있나, 10km를 뛸 수 있나? 명상은 10분까지 가능한가, 20분도 도전해볼 만한가? 나의 역량과 과업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훈련은 일을 즐겁게 하는 법을 터득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견주어 나를 이해하는 근육 을 키우는 것이 핵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글쓰기가 역시 몰입에 빠지기 가장 쉬운 지름길 같습니다. (이제는 전 직장이 된) 회사에서 사용하는 노션에 비공개로 '자기만의 방'이라는 페이지를 하나 만들어두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텅 빈 페이지를 켜고 떠오르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써 내려갑니다. 기대된다, 버겁다, 걱정된다, 괜찮다. 떠오르는 감정들을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 한켠이 가벼워지면서 "그냥 하자" 하게 되더라고요. 구독자님만의 해방구가 있나요? 더 좋은 비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때로는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시사하죠.
<패터슨> 중에서
이번 주 일하는 마음 🌿
❶ 주의력의 총량은 한계가 있다. 어디에 쓸 것인지 잘 선택해야 한다.
❷ 오늘 하루의 행복을 음미할 한 줌의 주의력은 남겨두자.
❸ 일이 아닌 일에 몰입할 1시간이 가장 좋은 휴식의 비결이다.
❹ 몰입을 잘 하려면 세상에 견주어 나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일하고 있나요? 이번 주에 일을 하며 찾은 가치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다음 주에도 새로운 주제로 찾아오겠습니다. 뉴스레터는 매주 토요일 발행됩니다 :)
함께 보면 좋아요 📚
- 이다혜, <퇴근길의 마음> : <출근길의 주문>이 나를 해치지 않고 일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책이라면 <퇴근길의 마음>에는 일을 잘하기 위해 나를 관리하는 노하우가 가득합니다. 일하는 사람이라면 서가에 두고 자주 꺼내어 읽기 좋은 책입니다.
- 짐 자무쉬, <패터슨> :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지칠 때 삶의 리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영화입니다. IT 업계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패터슨처럼 휴대폰 없는 삶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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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하늘
무계획 휴식 중인 동지네요ㅋㅋ 행복하게 쉬면서도 은근 불안했는데 이 글 보니 또 위안이 되기도 하네요. 잘 쉬고 새로운 시작도 화이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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