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은 내게 유일하게 느긋 할 수 있는 날이다. 주중에 쌓인 피로로 좀 늦잠이라도 잘려고 맘을 먹으면 여지 없이 잠 없는 남편 때문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오늘 아침도 남편 성화에 못이겨 동네 논둑으로 끌려가듯 산책에 나섰다.
왜 이리 다를까? 나는 깨어 있을 때 열심히 살고 잠은 최소 일곱시간 정도 잠을 원하는데 남편은 서너 시간 만 자도 충분하다며 나의 꿀잠을 방해하곤 한다.나는 많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한번 결정하면 쉬 바뀌지 않는 편인데, 남편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집돌이다. 세시간 넘는 곳은 엄두도 내지 않아 아이들과 여행을 더 많이 다녔다. 남편은 예민하다 보니 몸집이 좀 말랐고 나는 동글동글 하다.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30년을 함께 살아냈다.
그동안 결혼 생활을 힘들게 했던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족과의 문제가 컸다. 신혼 초 홀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 많이 아프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덤덤하게 견딜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겨우 20대의 나는 모든 것이 버거워서 이혼을 생각했었다. 그때가 첫번째 위기였다. 어디론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고 싶었을 때, 남편이 내 손을 잡았다. 이젠 옛일이 되어 버린지 오래지만 기적이 한번 다녀갔다
동갑내기 부부이다 보니 우린 말을 친구 처럼 하는 편이다. 그래서일까 한번 싸우면 좀 어렵다.
얼마 전 사소한 말다툼이었는데 남편이 많이 화가나서 한달간 가출(?)을 감행했다. 두번째 위기였다. 이번엔 장성한 아이들이 아빠의 마음을 돌리는데 일조를 했다. '가족이 이래서 좋구나'를 되뇌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사랑 이란걸 알게되었다.
우린 싸우면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 남편의 피난처는 낚시터이다. 본인 말에 따르면 조용한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산과 강을 바라다보면서 맘을 정리하고 오는듯 하다. 나는 도서관이 있는 공원에서 서너 시간 앉아있다 오는 걸로 맘이 노곤노곤해 진다. 요즘은 싸우는 게 힘들고 피곤해서도 더 못 싸운다.
이렇게 내 고집만 하는게 아니라 조금씩 마음을 양보 하다 보니 결혼 초에 그렇게 위대해 보였던 30년차 부부가 되어 있었다. 인생의 반을 함께한 것이다. 몇번의기적들을 경험했다.
우리는 남들 다 마다하는 부부 자영업자이다. 어떻게 하루 종일 함께 있을수 있냐는 주변의 말이 무색하게 17년간 함께 일 하고 있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제철 재료로 장아찌를 담근다. 봄에는 푸릇한 방풍나물이나 취나물로, 여름에는 알싸한 고추나 상큼한 오이로, 가을에는 아삭한 가을 무를 먹기좋게 잘라서 장아찌를 담가 놓는다. 간장과 물 그리고 설탕과 식초를 일대일 비율로 섞어서 설탕이 녹을 정도로만 끓인 다음 재료 위에 잠길 만큼 부어서 보관한다. 그렇게 냉장고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먹으면 개운하고 알싸한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시간이 더 할수록 맛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고기를 먹을 때 장아찌를 함께 먹으면 느끼함은 잡아주고 속도 편하게 해 주는 역할도 한다.
짜증부리듯 나왔지만 아침 공기가 싸하게 시원하다. 너른 들판을 보며 걸으니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남편이 나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다가 내가 들에 핀 작은 꽃 구경에 빠지면 다그치지 않고
'이건 무슨 꽃이야?" 하고 관심도 건넨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년에는 선교사 친구가 있는 곳으로 해외 여행도 가자고 한다. 아메리카노는 한약같다고 가루 커피만 고집하던 남편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 까페에 들르자 했다.
"나는 아아 당신은 라떼?" 내가 주문을 하려는데
"아니 아메리카노 2잔~"
바로 지금 또 기적이 찾아왔다.
요즘들어 부쩍 우리 두사람 닮았다는 얘길 듣게되는데 신기할 따름이다. 오랜시간 간장물에 삭혀져서 오묘한 맛을 내는 장아찌처럼 우리 둘은
어제보다 오늘 더 어울어지고 있는 중이다
저자소개 (서꽃)
글쓰기와 노래를 좋아하는 곧 60의 아줌마.
행복한만찬 이라는 도시락 가게를 운영 중이다.
인생의 남은 부분을 어떻게 하면 잘 살았다고 소문 날지를 고민 하는 중이며
이왕이면 많응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행복한 미소를 글과 밥상으로 보여
주고 싶어 쓰는 사람입니다.
댓글 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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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니신나
너무 따스합니다. 어우러지는 데 걸린 30년. 과연 그만큼의 시간만 지나면 서꽃 님과 같은 따스함을 누릴 수 있는 건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댓글이 너무 늦었습니다. 따스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쓰니신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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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산소통
한약같으시다던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신 순간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요.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ㅎ 그렇죠? 반려산소통님~ 그렇게 닮아 가면서 서로 늙어가는것 같아요.. 그래서 늙는 것이 꼭 싫지만은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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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맛이 깊어져 가는 장아찌와 같은, 아직은 잘 모르지만 깊은 연합의 맛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맛보았습니다.
쓰고뱉다와 함께 하는 오늘의 글 한잔
ㅎ 부부지간만 그런것도 아닌듯 해요. 좋은 관계는 오래도록 깊은 맛을 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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