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그린다. 청명하고 탁 트인 하늘에, 초록 잎이 선연한 나무와 게으르게 흐르는 강이 맛 닿아 펼쳐지고, 물 위를 나른히 걷고 있는 백조가 가만히 등장한다.
주로 풍경화를 그리는 이유는 미학적으로 구도가 가장 안정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색에 민감한 나로선 기분이 좋아지는 색감이기도 해서다. 색을 중첩 시킬수록 원하는 색감을 만날 수 있다. 조금 특별한 점이라고 한다면, 내 그림엔 언제나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 모를 들꽃이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작은 존재여도 귀여움과 잔잔한 아련함으로 가득 물들이는 들꽃이다.
꽃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때가 떠오른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시골 외 할머니 댁에서 1년 반 정도 엄마와 떨어져 지낸 적이 있었다. 4살에서 5살 반 즈음이라고 알고 있다. 또 자라서는 명절 때와 방학 때마다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 집에는 우물과 펌프 그리고 온 마당을 뒤덮은 꽃들이 가득했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계절마다 모두 다른 꽃들이 피어났다. 나는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들의 그윽함과 아름다움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한참 동안 바라보고 또 바라보곤 했다. 새벽 공기와 향기로운 꽃 내음이 코끝에 스미면, 밤새 달라붙은 눈을 비비며 대청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흐릿한 아침 안개 속, 따뜻한 꽃들이 외로운 내게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았고 그 얼굴들이 모두 제각각 다른 미소를 띠고 웃어주는 것 같았다. 그때마다 이내 나도 미소로 답하곤 했다.
밤에도 살랑살랑 바람에 이는 그 얼굴들은 달을 향해 칭송의 마음을 보내며 자신이 할 일을 하는 듯하였다. 달빛을 한껏 받은 그 얼굴들은 나를 향해 한들거리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가 여기 있어.”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시골의 밤은 정말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 같은 까만 밤이다. 별이 유난히 반짝이고 달빛이 참 반갑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그 아래 피어난 꽃들은 은은하고도 아련하게 빛을 내며 내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 꽃들이 그저 혼자 알아서 자라는 줄로만 알았다. 꽃을 피우기까지 누군가의 수고와 알맞은 조건들이 뒤따른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나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자라서 화분을 가꾸어보니 알겠더라. 꽃은 환경조건도 중요하고 적당한 물 조절과 관심에 예민하다는 것을. 이렇게 꽃피우기 어려운 것을.
그래서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 졸업식 때, 꽃을 선물하는 이유를 알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꽃을 선물하는지도. 많은 인내의 시간과 알맞은 조건은 꽃을 이루고, 마침내 소중하게 피어난 꽃은 누군가에게 축하의 선물이 되고 사랑의 표현이 되고 소중한 약속이 되었던 거다.
가끔 특별한 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생화를 보낸다. 그러면 감동한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이다. “꽃이 너무 예뻐.” 그리곤 내 마음과 예쁜 꽃을 동일시하며 말했다. “나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꽃처럼 예뻐.”라고. 게다가 한 분은, 꽃 선물이 너무 오랜만이라며 자신을 귀하게 생각해 주어서 고맙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곤 선물로 갚으셨다. 꽃은 내 삶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늘 행복을 선물해주곤 했다.
꽃으로부터 배운 것이 있다면, 꽃은 내게 퍽 다정했다. 먼저는 피는 순간부터 지기까지 미려한 생김으로 기쁨을 안겨준다. 받은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태어나 죽기까지 한결같이 상대방이 미소를 머금게 만들어 준다. 생이 짧다 해도 피어있는 한, 끝까지 기쁨을 선사하곤 한다. 그 한결같은 다정함이 좋다. 둘째로는 좋은 향기로 무엇이든 물들인다. 주변을 자신의 좋은 향기로 정화한다. 좋은 향기를 내뿜는 이의 곁엔, 벌처럼 좋은 사람이 모여들 듯, 향기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도 같다. 같이 있기만 해도 다정한 존재가 되려면 그가 풍기는 내음이 좋은 냄새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달콤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꿀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든 필요할 때, 인간에게 유용하게 쓰이고 벌들을 살리며 살찌우기에 충분하다.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고 언제든 그가 원하면 치유할 방법을 내어줄 다정한 이. 모두 꽃에게서 배운다.
그래서일까? 책꽂이에 꽂혀있는 고대 작가의 세밀화부터 현대 작가의 세밀화까지 꽃에 관한 책이 넘쳐난다. 꽃은 늘 나와 함께 있었다.
심지어 어릴 때, 그 당시 아동복계의 명품인 김민제 아동복을 입은 동네 친구는 흰 들꽃이 가득 그려진 진 밤색 코듀로이 원피스를 입고 한 바퀴 휘~! 돌며 말했다. “나, 어때?” 그 옷을 입는 동안 친구는, 들꽃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해 보였다. 본능적으로 꽃무늬에 끌린다. 지금은 객관화가 충만해 끌리더라도 꽃 패턴 옷을 사지는 못하고, 아쉬운 대로 문구 몇 개로 끝내지만 20대엔 정말 꽃무늬 옷을 입기도 했다. 30대엔 남편에게도 권했다. 아이에게도 입혔다. 그 옷을 입은 남편과 아이가 꽃밭에서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 바라보면 행복했다. 그 때문에 남편은 동료직원에게 패션 취향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며 푸념을 늘어놨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꽃의 역사가 나의 삶과 맛 닿아 있었음은 분명하다.
최근에 ‘고흐, 영원의 문에서’라는 영화를 보고, 왠지 계속 눈물이 흘렀다. 외로움과 싸우는 고흐는, 유일한 친구인 폴 고갱(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여러 개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린다. 카메라는 고흐의 불안한 시선을 따라가며 영화 내내 흔들리고 흔들렸다. 여러 개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는데 그의 처절한 외로움이 여러 모양으로 아우성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중고 삼중고에 시달리던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인정해주고, 그림에 관해 나눌 수 있는 소울메이트를 간절히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외로움과 홀로 싸우는 그가 애처로웠다. 유년시절, 꽃에게 위로받던 외로운 그때의 나와 겹쳐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영화의 고흐를 응원하며 동시에, 어린 나도 응원했다.
내가 한 시대의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크고 작은 이유엔, 꽃의 지분이 결코 작지 않다. 내게 위로가 되어준 꽃을 떠올리며 그 위로가 타인에게 옮겨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적어본다. 가장 사랑했던 김춘수의 ‘꽃’이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엄마와 떨어져 알 수 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던 아이도, 꽃 선물을 받고 자신의 존재가 사랑 받을 존재라는 위로를 받은 분도, 유일한 친구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해바라기 꽃을 그리던 가난한 예술가도, 향기에 알맞은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불리고 싶었다. 잊히지 않는, 외롭지 않은 존재로 살고 싶었다. 중요한 어느 시절, 꽃이 나의 유일한 위로였던 것처럼 당신과 내가 누군가의 새벽, 누군가에 밤의 위로자로, 누군가의 꽃으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럼 적어도 우리는 시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그저 꽃으로서의 아름다움에 집중할 것이다. 당신은 꽃이다.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소중한 눈짓이다.
저자소개
필명: 인사피어(INSIGHT+INSPIRE)
_통찰로 격려하는 삶이 꿈이다
sns그림 작가, 종이 공예와 예쁜 글씨 쓰는 사람. 피아노 반주 봉사하는 사람. 천상 예술인 이지만 글쓰기 공동체 '쓰고뱉다'를 만나면서 내 안에 끝 모를 진지함과 은근한 다정함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궁금해지고 나를 알게 될수록 점점 시선은 타인에게로 향했다. 나의 얘기로도 타인과 닿을 수 있다는 글쓰기는 이제 숙명과도 같은 만남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존재의 이유가 설명되고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날을 꿈꾸며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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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산소통
우와..글만 아니고 그림도 너무 예쁩니다. 저는 그림 잘 그려보는 게 두번째 로망인데요 (첫번째는 무제한 카드로 책 마구 사기 ㅎㅎ) 그림 보는 것만도 힐링이 되네요. 향기에 녹아들어가듯 읽다가 중간에 ‘김민제 아동복’에서 저도 모르게 빵터졌습니다. ㅎㅎ 인사피어님의 세심하고 은은하면서도 향기로운 글향기는 어릴적 자연이 준 사랑, 그들과 나눈 교감으로 꽉 차있어서인가봐요. 읽고 싶은 꽃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피어
감사해요! 반려산소통님!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림그리기도 해보면 좋을텐데요.😊 김민제를 아시는 반가운 분을 만나다니! ㅎㅎ 그래도 글로 웃겨 드렸다니 참 감사한걸요(ღ◕ܫ◕ღ) 읽고 싶은 꽃이 되어 주셔 감사하다니!!! 이런 공감어린 필력에 감동의 물결 흘러 넘칩니다. 섬세하고 따뜻한 피드백 너무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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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빌
꽃이 왜 축하와 고백 등에서 쓰이는지에 대한 통찰을 보며 무릎을 탁 쳤어요. 꽃으로 살아가시는 인사피어님을 응원합니다.
인사피어
공감 가득한 댓글 감사해요! 세빌님(ღ◕ܫ◕ღ) 저 역시 꽃으로 살아내고 계신 세빌님을 응원해요👍🏻 화이팅 ୧( “̮ )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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