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가보지 않았는데도 익숙한 동네가 있으신가요? 제겐 동두천이 그랬어요. 아빠가 좋아하던 언더그라운드 밴드 음악을 찾다 보면 미군부대니, 동두천이니 하는 지명이 튀어나왔거든요.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GPS를 켜고 가까이 가볼 생각은 못 했던 곳. 오늘의 편지는 동두천 이야기입니다.
치열한 경쟁의 장, <미8군 쇼> 오디션
![미8군 쇼 공연 모습 [출처 : 조선일보]](https://cdn.maily.so/du/zizikzizik/202607/1785142352954934.webp)
한국전쟁 이후 미군의 장기 주둔 체제가 이어졌습니다. <미8군 쇼>는 미군의 사기 증진을 위해 시작됐습니다. 멋진 공연을 거듭하려면 수준 높은 연주자와 가수, 무용수가 필요합니다. 원석을 가려내기 위한 오디션 현장은 무척 치열했습니다. 무대의상을 입고 와서 탭댄스를 추는 사람부터 최신 미국음악을 익혀 연주하는 사람까지 오디션장이 곧 쇼장이었다고 하는데요. 쇼에 참여하는 것도 어렵지만 들어왔다고 방심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분기별로 역량 평가가 이어져서 매번 새로운 곡을 연습해야 했으니까요. AA, A ,B ,C 네 개의 등급으로 실력을 평가하는 오디션 현장에서 2년간 AA 등급을 받은 연주자가 있습니다.

훗날 조용필의 메가 히트곡인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을 만든 작곡가 김희갑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전날 발매된 팝 음반을 다음날 오디션에서 연주하기도 했다는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어요. 젊은 예술가들이 게걸스럽게 씹어 삼킨 서양음악이 널리 퍼져 한국 대중음악의 뿌리가 되었구나, 감동적이었거든요.
언더그라운드의 재키 신

미국을 침공한 비틀즈를 시작으로 바야흐로 밴드 음악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비틀즈의 등장은 미8군 무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연주자와 가수가 분담해서 꾸리던 기존 <미8군 쇼>엔 대규모 군단이 필요했으나 한국의 비틀즈를 만든다면 적은 인원으로도 공연을 이어갈 수 있었고요. <해변으로 가요> 등의 번안곡으로 사랑 받은 키보이스는 한국의 비틀즈를 수식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편, 전쟁으로 고아가 된 뒤 고물상에서 일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서양음악을 듣고 폐품 기타를 주워 악기 연주를 했던 신중현은 용산의 미8군 쇼 오디션에 합격한 뒤, 동두천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미군기지가 있어 돈은 잘 벌리고 서울에 비해 집세는 저렴한 동두천에 가수들이 모인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신들린 기타 연주로 승승장구하던 재키신은 애드훠(add 4)라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을 결성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전에 발표된 팝 음악을 번안한 곡이 아닌, 창작곡이었다는 점입니다.
신중현과 애드훠는 창작곡 ‘비속의 여인’을 발표합니다. 모방을 넘어 창작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여러 번의 리메이크로 오늘날까지 친숙한 곡이지만 당시엔 인기가 없었다고 해요. 신중현의 삶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전설의 시작쯤으로 그려졌을 장면일 텐데 말이에요. 다른 얘기지만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이 그때부터 쩌렁쩌렁 팡파레를 울리며 변곡점을 알리는 경우는 드문 것 같아요. 밤안개처럼 알게 모르게 시나브로 시작되어 지나고 보니 그때 그랬었더라. 하는 얘기가 많더라고요.

초기 목적 자체가 미군을 위한 공연이었던 만큼 미군이 떠나면 미8군 쇼도 힘을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월남전의 여파로 주한미군의 규모가 줄어들면서 미8군 쇼의 명성도 초반보다는 작아졌습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몰라서 재밌는 거 같아요.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의 사기 증진으로 펄시스터즈 등이 위문공연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면서 이들을 발굴한 신중현의 음악성이 다시금 세간의 주목을 받았거든요.
하지만 신중현은 월남 위문공연 참가를 취소하고 미8군에서도 나온 뒤, 본격적으로 음악 제작에 매진합니다. 사이키델릭과 같은 새로운 장르를 발 빠르게 받아들이고는 그 안에 한국만의 정서를 주저없이 녹여냈습니다. 서양음악을 재료로 한국 대중음악의 뼈대를 만든 신중현 덕분에 동두천엔 해마다 록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이야기를 머금은 이벤트는 알고 즐길 때 풍부한 맛이 나는 것 같습니다.
동두천에 남은 타인의 취향

상권은 소비하는 사람에게 맞춰집니다. mom으로 시작하는 김치찌갯집, 영어를 써붙인 양복점 등 달러가 오가던 동두천엔 여전히 이국적인 간판이 즐비합니다. 타지역에도 있는 백반집이고 양장점인데 외국에서 만난 한인 교포의 가게처럼 반가운 마음이 들었어요. 노스탤지어와 반가움이 제 맛을 내기 위해 꼭 필요한 조미료는 낯선 거리감인 것 같아요.
그 시절 동두천에 살게 된 미군들에게 보고픈 마더의 이름이 들어간 낯선 김치스튜집은 친숙했을까요? 낯설었을까요. 한국 엄마가 만들었다는 낯선 김치 스튜 보다는 고향 엄마의 맛을 구현한 바비큐집이 오히려 반가웠을까요?

한때 동두천에는 바비큐 양념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일렬로 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지만 지금도 남아 있는 두 식당이 있어요. 하나는 콕스 바베큐, 다른 하나는 텍사스 바베큐입니다. 사실 맛보고 싶던 곳은 콕스 바베큐였어요. 외관에서부터 세월이 느껴지는 게 역사의 맛은 보장됐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내신 노년의 사장님은 갑작스러운 손님을 반기지 않으셨어요. 적어도 하루 전날 미리 주문해야 받아볼 수 있고요. 포장만 가능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꼭 미리 전화로 예약하시길 바라요!

콕스 바베큐 실패하고 텍사스 바베큐집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스테이크와 치킨을 팔아요. 치킨은 반 마리만 주문할 수 있으니 두 명 이상 간다면 두 메뉴 다 시켜서 경험해 보세요. 무척 이국적인 맛이었어요. 바비큐 소스에서 향신료 맛이 느껴졌는데 이 맛 자체를 좋아하는 분이 많은지 소스를 따로 판매하시더라고요.

텍사스 바비큐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기본 찬으로 나오는 샌드위치와 콩 수프예요.

이런 서비스는 동두천이 아니면 경험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몰에 눈뜨는 동두천

오전에 도착한 동두천은 한겨울 아침에 꾸역꾸역 일어난 사람처럼 한껏 웅크린 모양새였어요. 상권이 다 죽었다더니 정말 그런가 싶었는데요. 시간도 중요하더라고요. 1997년 외국인 관광특구가 된 보산동 일대에는 한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외국인 전용 클럽이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 주변 다른 가게도 클럽이 문을 여는 시간대쯤 활기를 띠더라고요. 주말 저녁엔 어떤 풍경일지 궁금했습니다.

한때 동두천에서는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과 저곳을 다르게 하는 요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학로를 만든 서울대 문리대, 동두천을 달러 상권으로 만든 미8군 기지 캠프 케이시. 문리대가 사라져도 미군기지가 축소되어도 한번 획을 그은 것은 흔적으로 남아 가지처럼 다른 이야기를 향해 팔을 뻗습니다. 사람도 도시도 결국은 자신을 바꿔 놓은 흔적 위에서 살아갑니다. 지금의 우리를 만든 가장 강렬한 흔적은 무엇일까요. 이곳저곳을 쏘다닌 2026년 7월의 화두였습니다. 다음 편지는 8월에 도착하겠네요. 또 뵙겠습니다! 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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