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희일비 #8] 상담의 이유

2021.09.13 | 조회 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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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곰의 일희일비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일상에 대해 씁니다

상담을 공부했습니다- 라고 하면 대부분 독심술을 배운 건 아닐까 걱정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을텐데, 많은 분들이 자신의 속내를 들킨 양 두려워하기도 하죠. 상담을 배우는 과정도, 혹은 상담을 하는 과정도, 결국은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배움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랜 시간과 큰 돈을 들였지만, 그래서 상담을 배운 시간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언젠간 그 과정이 제 삶에 큰 디딤돌이 되어줄 거란 믿음이 생겼으니까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공부를 꿈꾸시나요?

 

대학원에서 심리상담을 전공했다. 이 열다섯 자 내외의 말을 내뱉기 위해 3년의 시간과 약 3,000만 원이라는 돈을 썼다. 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였다는 이 '사실'이 주는 무게감은, 뱉기 어려운 이별의 말처럼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졌다. 아마도 나는 이 한 장의 학위를 얻기 위해 수많은 가능성들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좋은 차를 살 수도,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더 속편히 '살던대로' 살 수 있는 가능성들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을 공부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온전히 나를 이해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오롯이 나를 위해 모든 걸 쏟은 시간이었으니까.

 

상담을 공부하는 과정은 내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내담자의 어떤 말이 거슬린다면, 그 말이 내게 주는 전이-역전이의 감정에 대해 살펴야 했고, 그렇게 감정을 분석하는 일은 내담자와 상담자가 아닌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관계로 확장되어야만 했다. 애인에게 화가 나면, 화가 난 나의 감정의 뿌리를 찾아 내 '연애의 역사'를 거슬러봐야 했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난 뒤 그들의 주는 '공동의 불편함'의 의미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들은 지난했고, 그 과정들이 나의 무의식을 파헤쳐놓을 때마다 나는 종종 악몽에 시달렸다. 외면하고픈 기억들은 지나치게 힘이 세서, 내 의식의 경계가 흐려질 때마다 나를 겁주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던 건, 그 끝에 이르러야 내가 비로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결국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고 있는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자아는 나를 나답게 살게도 해주지만, 어느 순간엔 세상의 불합리와 타인이란 지옥 속에서 스스로를 고집하다 부러져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분노하고 집착하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거부하게 하는 것도 결국은 자아 때문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더 유연한 자아를 갖고싶었다. 내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한 발 떨어져 분석하고 공부하면서, 또한 오랜기간 나 스스로가 내담자가 되어 상담을 받으면서, 나의 자아는 조금 더 부들부들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자아가 유연해졌다는 것이 모든 걸 해탈한 '그렇구나'의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때때로 분노했고, 때로 우울했으며, 또한 자주 좌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완전히 무너지는 일은 점차 적어지기 시작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몸이 아니라고 말 할 때까지 스스로를 몰아대던 이전의 나와 달리, 이제 나는 적당한 시점에 내 감정의 온도를 밖으로 분출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나의 변화에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늘 웃고 있던 내 얼굴에선 점차 표정이 사라졌고, 때때로 나는 냉정하게 내게 요구해오던 타인의 욕망을 잘라냈다. 그렇게 내가 자유로워질수록, 오히려 더 많은 '주변인'들이 내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롭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내 편이 되어 나를 위해 싸우고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래서 요즘의 나는 조금 덜 바쁘지만, 외려 조금 더 자유롭다. 본연의 내가 가진 강점들을 바라봐주고 더 단단해진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소수의 친구들이 남아있어 내 삶은 오히려 더 충만하다. 누굴 더 많이 만나지 않는 대신 더 많은 홀로의 순간들을 즐길 줄 아는 내가 더 좋아지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야 마음편히 내 잘못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전의 내가 항상 상대에게 친절하게 대한 뒤 스스로를 '피해자'의 위치에 두고 모두에게 상처받았다고 울부짖었다면, 이제 나는 조금 덜 친절하게 우리의 '쌍방과실'을 인정하고 합의점을 찾아가고자 노력한다. 꽤 오랜 시간 내 상처들을 되짚다보니, 그 상처의 일부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보인 것도, 불편함을 불편하다고 (분노하지 않고) 말하지 못했던 것도 일정부분 나의 책임이었다. 이 보이지 않는 책임들을 인정하고 나니, 외려 누군가를 조금 더 쉽게 용서할 수 있게 되었다. 화가 나더라도, 누가 죽일듯이 밉더라도, 그 감정에 대해 상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내고 나면, 감정의 찌꺼기가 내 안에서 덩굴을 이루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점점 체득해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상대가 변화하지 않고 여전히 나를 탓하더라도, 적어도 나 스스로는 자신을 탓하지 않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결론은 같더라도, 내 안에서 그 상황과 감정을 소화해내는 방식이 달라지니 결과적으로 나는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종종 화를 낸다. 때로는 날것의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는 내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예전처럼 상대의 모든 행동 속에서 '싫어할 이유'를 찾는 일은 멈출 수 있었다. 나의 모든 감정들이 발화되고 결국 휘발되고 나니, 그 감정들 끝에 선 우리의 '상호 존재적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안에서 꼬인 채 자라난 부분들에 스쳐 상처받고 상처내며 살아간다는 사실. 그 작은 사실을 깨닫기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 것만 같다. 존재를 인정하고 싸우는 것과, 내 안에 보이지 않는 나와 싸우는 것. 그 사이를 넘어서고 나니 드디어 삶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앞으로의 나는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상담자가 될지도, 혹은 상담에서 배운 이 삶의 자세들을 가지고 더 깊이 일과 삶에 몰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이든 치열하게 공부하고 난 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슬프고 지친 나와 이별하려고 한다. 적어도 나 하나를 잘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면, 3년과 3000만원 따위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담을 공부하며 나는 더 부유하게 사는 대신,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타인에게 이르는 길은, 결국 자기 자신이란 정차역을 통과해야 된다는 사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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