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다 보면 결국 종주에 닿게 된다. 올라갔다 내려오면 벌써 또 가고 싶고, 당일치기 산행만으로는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니까. 드넓은 산을 구석구석 오래도록 만나고 싶으니까. 그건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을 닮아 있다. 그러니 짧게는 무박, 길게는 며칠에 걸쳐 여러 산봉우리를 넘는 장거리 산행을 계획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인 것 같다.
물론 나는 산타는 실력이 느는 속도보다는 산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는 속도가 빨랐다. 그렇지만 그게 뭐 대수일까. 좋아하는 마음이 재능이라는 말(여둘톡 148화 제목에서 따옴)처럼 산을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로만 본다면 나는 이미 고수 중의 고수였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 주말, 내가 향한 곳은 백두대간 36~37구간 소백산이었다. 희방사 역에서 시작해 죽령 휴게소를 지나 제2연화봉, 제1연화봉, 비로봉(정상), 국망봉, 늦은맥이재를 넘어 고치령으로 하산하는 1박 2일, 총 29.13km의 여정이었다. 솔직히 29km를 걷는다는 게 얼마만큼 힘든 일인지 와 닿지는 않았고, 그저 드넓은 소백산을 만날 생각에만 들떠 있었다. 혹여 눈이라도 온다면 설산의 아름다움은 또 얼마나 벅찰까 상상하면서.
📍 산행 코스: 희방사역-죽령-제2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국망봉-늦은맥이재-고치령
| 소백산은 1987년 1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322.011㎢로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에 이어 산악형 국립공원 가운데 네 번째로 넓다. 해발 1,439.5m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국망봉(1,420.8m), 연화봉(1,383m), 도솔봉(1,314.2m) 등이 백두대간 마루금 상에 솟아있다. 퇴계 이황이“울긋불긋한 것이 꼭 비단 장막 속을 거니는 것 같고 호사스러운 잔치 자리에 왕림한 기분”이라며 소백산 철쭉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처럼 수많은 탐방객이 봄철 소백산국립공원을 방문하고 있으며, 겨울이면 장중한 백두대간 위에 설화가 만발하는 절경을 이룬다. _소백산국립공원 홈페이지 머릿말 |
하지만 산행일자가 다가올수록 기상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혹한기, 최강한파, 강추위 같은 단어들이 계속 우리의 산행일자 앞에 수식어처럼 붙었다. 때문에 소백산 칼바람에 맞고 정신 못 차릴 수 있으니 추위에 단단히 대비하라는 산행 리더의 당부가 있었다. 나는 방한용품을 챙기는데 가장 공을 들였다.

일단 핫팩부터 박스를 통째로 챙겼고, 입고 벗을 잠바는 경량 패딩과 중무장용 헤비 다운에 바람막이, 후리스까지 골고루 준비했다. 모자도 캡 모자, 털모자, 바라클라바까지 종류별로 챙겼다. 수족냉증이 있으니까 장갑도 가장 두꺼운 장갑(거의 스키장갑 두께)부터 얇은 털장갑까지 모두 넣었다. 자연스레 배낭이 커지고 무거워졌지만, 산 위에서 마주치는 추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몇 차례 겨울산행으로 경험한 바가 있기에 자신만만해하지 않고 담을 수 있는 건 다 담았다.
기대하는 건 하나, 조금만 덜 춥기를. 그러나 우릴 기다린 건 그해 가장 추운 한파라는 일기예보였다. 2018년 12월 29일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이른 새벽, 우리는 소백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첫날 산행 코스는 짧았다. 희방사 역에서 죽령 휴게소를 지나 소백산 유일한 대피소인 제2연화봉 대피소에 짐을 풀고 쉴 계획이었다. 이 말은 곧 다음날은 일출이 뜨기도 전부터 아주 오래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기에 그저 해맑았던 기억이다.
소백산 제2연화봉 대피소는 숙박기능을 갖춘 국내 산 대피소 4곳(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소백산) 중 한곳인데, 거의 ‘5성급’ 호텔 숙소라 불릴 만큼 시설이 좋다. 그곳에서 삼겹살에 볶음밥, 오리고기, 김치찌개, 미역국, 오뎅탕, 떡볶이, 라면 등 살찌우는 각종 음식을 호화로운 산상 뷔페처럼 배불리 먹고 먹었다. 이제 더 먹으면 진짜 사람이 아니지 싶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취사장을 나왔다.
해가 저물어갔다. 소백산 능선으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게 이상하리만치 신나고 기뻤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이토록 환호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니. 그것이 그해를 대하는 내 마음 같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너덜너덜해지지 않고, 그처럼 여유롭고 가볍고 신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다음날 새벽 2시, 옆 사람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바깥을 나가보니 여태껏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찬바람이 뼛속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옷을 여미고 등산화 끈을 조여 맸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배낭을 메고 걷는 것뿐.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내가 걸어야 끝난다. 추웠지만 아직 낭만을 챙길 여유가 있던 때, 머리 위로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별이 쏟아진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그 문장을 처음으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고요한 새벽 눈 위를 밟을 때마다 아이젠이 박히는 소리가 일정 간격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우리에게 말 대신의 말이었다. 등산화 끈을 묶으려고 쪼그려 앉으면 어느새 옆에 다가와 비춰주는 헤드랜턴 불빛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이었다. 서로가 함께 한다는 믿음이 좋았다. 산타는 동안 온통 힘들면서도 다시 산을 찾을 찾게 되는 이유가 아마 이렇게 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뭉클한 순간과 장면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낭만을 오래 즐기기에는 소백산의 겨울은 너무 추웠다. 일정 고지 이상 오르면 나타나는 소백산 특유의 평탄하고 완만한 능선이 좋아 여름에도 오고, 가을에도 오고 몇 번을 왔던 산인데 겨울엔 그래서 유독 추웠다. 거센 바람 때문에 제대로 걷기 힘들 정도로 몸이 휘청거렸다. 준비를 아무리 해도 막을 수 없는 강추위였다. 쪼그려 앉아 떨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주머니에 핫팩을 넣어주고, 따뜻하게 팔짱을 껴 체온을 나눠주었다. 영혼이 탈출하자 ‘고고’를 외쳐주던 채찍질, 무식욕으로 주저앉았을 때 어미새처럼 초코렛을 까서 입에 넣어주던 온정들 덕분에 나는 비로봉(정상) 이후 계속된 긴 추위와 긴 종주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경계 없이 허물어지는 우정에 나는 서툰 편이다. 너무 빨리 풀어둔 마음이나 비밀들 앞에서 나는 종종 당황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물음표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산에서만큼은 달랐다. 산은 결코 혼자 탈 수는 없으니까. 혼자라면 끝내지 못했을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곁에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안심인 시간과 그 시간을 걸으면서 쌓는 우정 같은 게 있다는 걸 배웠다. 진짜 사람을 사귀는 법을 배웠던 셈이었다.
그리고 배웠다. 한파에 산행하는 게 아니라는 걸. 손가락이 잘릴 듯 아픈 추위, 뼈가 서로 부딪치는 듯한 한기까지. 생전 처음 겪은 강추위였다. 그럼에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겨울 산을 찾았지만. 그건 추위에 맞서기 위해서라기보다 얼어붙은 겨울 산에서 더 빨리 열리는 마음이 좋아서, 바람이 얼어붙던 새벽에 피어난 이상한 연대가 좋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이토록 추운 겨울에 따뜻해지는 방법은 결국 뜻밖의 온기를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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