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에게 가방은 정말 중요하다. 산에서 가방은 어쩌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일종의 이동식 집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산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까지 필요한 모든 짐이 가방 안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니까. 입고, 먹고, 쉬고 때로는 잠을 자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 말이다.
내가 등산동호회에 가입하고 제일 먼저 간 곳은 한겨울 전남 영암의 월출산이었다. 서울에서 제일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택했던, 그 산은 알고 보니 눈꽃산행의 명소였다. 아빠가 메던 등산 배낭에 아빠가 쓰던 등산 스틱, 아이젠을 챙겼다. 추운 날씨에 대비하라는 산행 리더의 공지에 가장 두꺼운 패딩을 입었고, 엄마에게 털모자도 빌렸다. 핫팩도 여러 개 넣어두었으니 이 정도면 날씨에 끄떡없는 만반의 준비라 여겼던 생각은 그야말로 오산이었다.
겨울 산행의 디폴트는 추위가 아니라 더위였다. 산에 오르다 보면 금세 땀이 났다. 기모 티셔츠에 두꺼운 패딩 하나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은 겨울산을 제대로 안 타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계속 걷고 움직이니까 더워서 겉옷을 벗어 허리에 묶거나 큰 배낭에 넣어야만 했다. 물론 간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려고 잠깐 멈춰 있으면 언제 땀이 쏟아졌었냐는 듯 온몸이 서늘해졌다. 땀이 식어 티셔츠의 축축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배낭에 넣어두었던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었지만, 얼마 못가 온몸이 더워져 또 다시 벗어야만 했다. 그때 겨울산에는 입고 벗기가 편한 얇은 패딩과 바람막이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알았으니 새로 구매했겠죠. 🤭)
새 바람막이와 경량 패딩을 마련하자마자 나는 또 떠났다. 이번엔 설악산 일출 산행을 신청했다. 밤 11시 서울을 떠나 한계령 오색 약수터(출발지점)에 도착한 건 새벽 3~4시쯤. 제대로 보이는 건 각자의 머리 위에 빛나는 헤드랜턴 뿐이었다. 앞사람과 뒷사람의 헤드랜턴 불빛에 기대어 조심스레 걸었다. 큰 바위가 있거나 위험한 곳이 나오면 저기 앞사람부터 구령을 외쳤다. “조심해서 걸으세요!” 그 말이 뒤로, 뒤로 전달됐다. 꼭 산 속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았다. 대청봉 최단 코스가 결코 쉽진 않았다. 설악산이 괜히 ‘악’산일 리 없으니까. 산행 초보인 나는 자꾸 뒤쳐졌다. 그때마다 등산 선배이자 산행 동료들은 물, 초콜릿, 오이, 사탕, 젤리 등을 건네주었다. 그들의 가방 지퍼는 수시로 열렸는데 겹치는 것 하나 없이 골고루 다양했다. 추위 속 핫팩보다 따뜻했다.
대청봉 정상을 찍고 드디어 대피소에서 조별로 식사 시간을 가졌다. 각자 챙겨온 먹거리를 배낭에서 꺼냈을 때 깜짝 놀랐다. 산악인 필수품(ㅋㅋㅋ) 삼겹살을 시작으로 갈비, 소고기, 치킨, 볶음밥, 김치전, 라면 등 조연 없이 모두가 주연급(헤비급) 메뉴가 연이어 등장했기 때문이다. 꼭 모든 코너를 들러 먹어볼 수밖에 없는 뷔페식 진수성찬이었다.
식사 시간 펼쳐지는 서프라이즈의 항연을 경험했으니 내 가방도 점점 무거워졌다. 이번엔 뭘 챙겨가야 좋을까 즐거운 고민 끝에 택한 내 메뉴는 역시 산행의 고전 김밥과 김치전, 파전, 과일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여럿이 먹을 때 언제나 품절되는 메뉴였기 때문이다. (하산길 가방을 가볍게 하려면 안전한 인기 메뉴를 택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용하기도)
아무튼 생각지 못한 메뉴가 등장하면 늘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는데 그게 그렇게 신이 났다. 땅에서 먹는 음식을 산 위라고 못 먹을 이유가 없다는 듯 산행 식사 시간에는 언제나 새로운 메뉴를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등산 다닐수록 점점 남의 가방에 눈길이 갔다. 폭염 속 산행 때는 보냉가방 안에 아이스크림을 챙겨오는 사람이 꼭 한명 이상은 있었다. 산행을 함께 하는 인원수에 꼭 맞는 개수를 보면 그것을 준비해 온 사람의 정성이 느껴졌다. 아이스크림도 감동이지만, 내가 꼽는 여름 산행 최고의 감동 메뉴는 ‘수박’이다. 수박! (에이, 수박이 뭐가 대단하냐고 이른 실망은 금지입니다!) 그건 그냥 수박이 아니어서다. 여름의 기세에 눌려 잠시 쉬고 있을 무렵, 누군가 배낭 뚜껑을 열었다. 그때 여기저기서 감탄이 쏟아졌다. 수박 한 통을 통째로 들고 올라온 것이다. 수박 한통의 무게를 아는데, 그걸 몇 시간을 짊어지고 오다니. 모두가 부족함 없이 정말 맛있게 수박을 먹었다. 다 같이 시원하게 나눠 먹고 싶어 준비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다르게 보였다.
산행이 계속될수록, 나는 점점 사람이 보였다. 가방을 열 때마다 그 가방의 주인이 보였다. 처음엔 단순히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이제 그 사람이 챙겨온 물건만 봐도 그 사람이 보였다. 한번은 설악산 1박 대피소 산행을 갔는데, 잠들기 전에 그 산행을 이끌었던 팀장이 팀원 모두를 불렀다. 그가 내민 건 소음방지 귀마개. 남녀 구분 없이 등산객 모두 한방에서 자는 공간에서 타인의 코골이 때문에 잠 설칠까봐 준비한 선물이었다. (산행이 워낙 고돼 어떤 코골이가 오더라도 꿀잠 취침은 예약이었겠지만 ㅋㅋㅋㅋ) 말하지 않아도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짧은 산행으로도 알게 되는 기분이었다.
남들의 가방에 대한 기대만큼 나 또한 다음에는 어떤 걸 챙겨갈까를 산행 앞두고 틈틈이 고민했다. 그 즐거운 고민을 계속 하고 싶어서, 고민에 기대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찾고 싶어서, 또 다른 산행을 이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가방에 무얼 담느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말해주지만, 결국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등산을 다니면서 정말 많은 유형을 만날 수 있는데,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자신이 마실 물 한병만 들고 와서 여럿이 준비해온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만 하는 얌체족들도 때때로 함께했는데 , 그게 자신에게는 아주 간편한 준비복장이었겠지만 약간 무임승차족 같이 보이기도 했어서다. 그래서 감히 말해보고 싶다. 지금 곁에 있는 '이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 걸까' 고민된다면 함께 등산을 가보라고. 포장되지 않은 모습은 물론, 그(혹은 그녀)가 메고 온 가방을 통해 진짜 모습을 알게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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