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유부

02. 지속가능한 나, 동네에서 배워요.

구독자 님 반가워요. '일류여성'의 두번째 편지를 맡은 '부유하는 유부'입니다. 퇴사 후 새벽과 밤만 있던 동네의 낮을 발견하고는 제가.. 살짝 설렜나 봅니다🤣 시작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05.12 | 조회 361 |
0
|

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일단 해보겠다고 주변에 공표는 했는데, 막상 쓸 만한, 읽을 만한 이야기가 없다. 이름까지 ‘일류여성’ 아닌가? ㅎㅎㅎ (어쩌자고 그랬을까ㅠ)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니, 하면 늘긴 한다고 나를 달래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일단 ‘일’에 관련된 글이어야 할 텐데… <알쓸인잡> 김상욱 교수로 빙의 해본다. “우리는 여기서 일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일이 뭘 까요?” 나는 일의 의미를 재정의하지 않고서는 글쓰기가 애매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갭이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은 했지만, 나는 백수다.

일단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접속했다. 일의 첫 번째 정의는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 이라고 한다. 음.. 지금 매우 귀여운 대가를 받으며 알바를 하고 있긴 한데, 왠지 일이라 부르기엔 아쉬운 것 같다. 일단 패쓰. 두 번째 정의는 “어떤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루려고 하는 대상.  소개된 예문은 "일을 꾸미다". 꿍꿍이가 있어 보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이고, 예문까지 완벽하다. 그래, 나의 일은 두 번째 정의로 설명해야겠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계획하지 못했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동네에서 단서를 찾았다. 시작은 어린이였다. 회사원의 부지런함이 남아있던 퇴사 1주차, 6시에 일어나 동네 뒷산에 올랐다. 한시간 반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을 나설 때와는 사뭇 다른 소란스러움이 온동네에 가득했다.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이었다. 학교 앞 사거리에서 한 무리의 초등생들이 대기 중이었다. 신호등 불이 바뀌자 녹색 어머니회의 깃발이 솟아 올랐고, 보도블럭 위 아이들은 우루루 도로로 쏟아져 학교까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우리 동네에 애들이 이렇게 많았다고?’ 

이 동네에 산지 6년째 되던 시점이었는데, 그때까지도 나는 동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서울로 통근하는 경기도민에게 그저 베드타운일 뿐. 그 날 마주한 초등생의 출근 현장은 ‘네가 모르는 일상이 여기 이렇게 생생하게 있단다’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낯선 우리 동네를 살폈다. 오전 11시에는 어린이집 친구들이 종종 산책을 나오곤 한다. 선생님의 반토막도 되지 않는 작은 아이들이 노란색 조끼를 입고 선생님과 친구 손을 번갈아 잡고 공원을 누빈다. 한번은 한 개의 벤치에 무려 5명이나 쪼르르 앉아 요구르트를 빨고 있는 광경을 마주했다. 좌석 너비에 꼭 맞는 발을 대롱 거리는 모습은 그저 아찔했다. 이 사랑스러운 풍경은 게으른 나를 자주 산책으로 이끌었다.

어느 날은 대로변의 다수 사람들이 모두 대박집이라고 쓰인 봉투를 들고 다니는 걸 발견했다. 동네 작은 야채 가게였다. 회사 다닐 땐 주말에 마트에 가서 냉동식품과 맥주를 담아왔고, 그보다 더 자주 엄마네 집에 가서 장바구니를 채워왔기에 동네 야채 가게 갈 일이 없었다. 개미 떼처럼 줄지어 나오는 사람들에 이끌려 간 가게에는 저렴한 농수산물이 가득했다. 나도 홀린 듯 대파 한단을 사서 나오는데, 파 길이 딱 맞게 만들어진 기다란 비닐봉투가 신기했다. 대박집 봉투를 들고 동네를 걸으니 왠지 진정한 생활인으로 거듭난 것 같다는 묘한 뿌듯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동안 밥벌이 한다고 회사를 다니긴 했으나 정작 내 밥을 제대로 만든 적은 없었다. 일이 1순위였고, ‘나 일하기 바쁜데 그런 거(각종 집안일;;) 할 시간이 어디 있나?’ 라는 오만한 생각으로 책임을 미뤘다. 그런데 직장에서 벗어나니 내가 가진 일상 기술로는 스스로를 먹이기 택도 없었다. 나 자신을 산책 시키고, 내 먹을 음식도 만들게 하고, 청소와 빨래도 가르치면서, 제대로 나를 먹이고 입히는 일을 그제서야 시작했다. 노년까지 지속가능한 일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퇴사했지만, 그 전에 노년까지 지속가능한 나를 만드는 게 먼저다. 오늘도 한량처럼 목적 없이 집을 나서겠지만 돌아오는 길엔 일상력이 +1 되어있길, 하찮고도 원대한 포부를 품어본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일류여성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 2024 일류여성

세 여자가 전하는 '일'에 관한 모든 이야기

자주 묻는 질문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 서초구 강남대로53길 8, 8층 11-7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070-8027-2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