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인생 방학] 산책만 할 수 있다면 OK입니다!

새삼스럽게 방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2026.08.14 | 조회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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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자님 무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신가요? 여름이 되고 방학에 대해 생각해보니 어른이 된 뒤로 저는 방학이라고 할 만큼 마음 편하게 쉰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10년이 넘게 쉼 없이 일하고 있기도 하고, 취업이 늦었던 탓에 딱히 놀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것 같고요. 그렇다고 휴식이 하나도 없었냐 생각하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상속에 제 방학을 쪼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직장인이라 방학이라기 보다는 좀 연차같은가요? 그럼에도 제 인생의 방학이란 어떤 것인지 써보았습니다. 보시고 구독자님의 방학은 어떤 형태로 누리고 계시는지 한번 돌아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어느 저녁 세종시의 잔디마당에서 올려본 하늘
어느 저녁 세종시의 잔디마당에서 올려본 하늘

 

방학을 생각하면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떠오릅니다. 이 더운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라니 조금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 방학마다 할아버지 댁을 찾았습니다. 할아버지 생신이 여름이었어요. 솔직히 엄마는 참 싫으셨을 것 같아요. 아궁이에 직접 불을 때는 부엌이었는데, 한여름에 잔치음식 만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배은망덕하게도 저는 좋아했습니다. 요즘 기준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그 시절 시골이었기에 가능했던 장면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를 오토바이의 뒷자리가 아닌 당신의 품 안, 즉 운전석 앞자리에 안기듯 앉혀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든든한 팔에 둘러싸여 논두렁길을 가로지를 때 뺨을 스치던 시원한 바람과 끝없이 펼쳐지던 물이 가득 찬 초록빛 논의 풍경. 아마 모내기 때문이었겠지요? 냇가에서 손톱만한 다슬기를 줍고 잡히지도 않는 물고기를 쫓아 온종일 퐁당거리던 그 시절이 바로 제 머릿속에 각인된 ‘방학’의 원형입니다.

여행을 자주 떠나지 못하던 시절이었기에, 자연이라는 거대한 세계로 들어가 맘껏 거닐던 그 시간은 삶의 가장 찬란한 쉼표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른이 된 지금도 저에게 ‘인생의 방학’이란 거창한 휴양지나 화려한 이벤트가 아닙니다. 자연이 가까운 곳을 천천히 걷는 순간이 제 인생의 방학입니다.

어른의 삶에는 타의로 주어지는 긴 여름방학이 없습니다.(유럽에 살았다면 조금 달랐을까요? ㅎㅎ) 빽빽한 일정표와 멈추지 않는 책임감 속에 허덕일 때마다, 저는 스스로에게 방학을 주고 싶어서 밖으로 나갑니다. 오랫동안 저는 동네의 키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자그마한 공원들, 언제 가도 거기에 있는 인천대공원의 널찍한 산책로에 많은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화려한 관광지 대신 이름 모를 흙길을 찾아 걸었고, 일을 하다 말고는 답답한 빌딩 숲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양재천과 안양천의 물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대만 여행 중 걸어다니다가 만났던 풍경. 고대였다면 신의 계시가 내린다고 믿을 것만 같은 풍경
대만 여행 중 걸어다니다가 만났던 풍경. 고대였다면 신의 계시가 내린다고 믿을 것만 같은 풍경

 

자연 속을 천천히 걸으면 잔뜩 솟았던 승모근이 좀 풀리는 느낌입니다. 물소리를 듣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흙을 밟을 때, 어릴 적 할아버지 품에 안겨 논두렁을 달리며 맞았던 그 바람과 냇가의 서늘한 감각이 느껴지고 조금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삶에서 잠시 내려와, 발을 딛는 그 순간의 자연을 온전히 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숨을 쉬는 진짜 휴식입니다.

물론 최근의 여름은 잘못 걸으면 온열질환에 걸릴 지경이지요. 더위에 약한 저로서는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제부터 분명 시원해지고 있습니다. 퇴근하면 에어컨을 켜고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날들이었는데 어제는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산책을 했습니다. 

여전히 걸으면 아직은 땀이 나지만 바람이 양껏 불어주었어요.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더라고요. 일상 속에서는 여전히 괴로움이 휘몰아치는 중이고 이것이 언제 끝날지, 해결은 될지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괜찮으리라 생각했다가 오늘은 끝이 없을 것 같아 불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루 걸었다고 또 다음 날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방학이란 결국 다음을 잘 보내기 위해 쉬는 것이니까요. 여러분들도 자신만의 휴식, 방학을 잘 찾아 보내시고 아직 많이 남은 무더운 여름을 보낼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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