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앤은 종종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의 구두 속에 발을 넣어 보거나 아빠의 면도기를 써보고 싶어했던 사람이라면 이해하겠죠. 어른의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건 뭔가 좀 더 우아하고 성숙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모방하려는 셈이니까요.(정말로 어른의 세계가 더 우아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ㅎㅎ)
그래서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가 볼 일이 있어 집을 비우게 되는 날, 다이애나를 집으로 초대해도 되는지 마릴라에게 묻습니다. 평소 깐깐하다고 느낄 정도로 앤에게 엄격했던 마릴라가 어쩐 일인지 흔쾌히 그러라고 합니다. 그리고 포도주스가 있는 위치를 가르쳐 주며 다이애나와 함께 마시라고 허락도 해주죠.
앤은 신이 났습니다. 다이애나를 초대해 어른(?)의 매너를 발휘하며 다이애나에게 의자를 빼주는 등 놀이 겸 손님 접대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마릴라가 말했던 대로 포도주스를 찾아 다이애나에게 따라주죠. 본인은 손님을 완벽하게 대접해야 하니 다이애나만 마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이애나가 크게 웃다가 엉엉 울다가 기분이 나빠져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합니다. 이 증상, 어른이라면 다들 아시겠죠. 주사입니다.
할머니들이 보리차 끓이면 오렌지 주스 유리병에 넣어뒀던 걸 혹시 기억하실는지요?(나이가 대략 나오죠? ㅎㅎ) 마릴라도 비슷한 일을 벌였습니다. 평소 포도주스를 넣어두던 병에 포도주를 담고 포도주스는 다른 병에 담아둔 것이죠. 그래서 다이애나는 덜컥 포도주를 마셨던 셈입니다. 이러니 취하지 않을 리가요. 결국 앤은 손님 접대 중간에 다이애나를 집으로 데려다 주게 됩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죠. 다이애나의 엄마인 배리 여사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 술을 줄 수 있느냐며 앤과 다이애나가 같이 놀지 못하게 합니다. 마릴라가 자신의 실수라고 가서 해명을 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만화 버전과 달리 책에서는 조금 더 강경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당시 사회적 배경상 집에서 술을 빚는 걸 금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상황을 위해 마릴라가 아주 조금 담근 뒤 음식 등 필요한 곳에 조금씩 꺼내 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도 배리 여사는 계속 아이들을 함꼐 놀지 못하게 만듭니다. 책에서는 권고를 무시하고 술을 담그는 마릴라의 행태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집안에서 자라는 앤이라면 더욱 멀리해야겠다고까지 하지요.
어린 시절의 저는 무조건 배리 여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릴라가 직접 가서 상황 설명까지 했는데 사실관계를 알고도 왜 앤을 반대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저희 엄마(저와 함께 빨강머리 앤 덕후이십니다.)와 배리 여사의 행동에 대해 이해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저는 정말 배리 여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애들 일을 두고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저희 엄마가 말씀하시더군요. 배리 여사가 그러는 건 앤이 고아 출신이기 때문이라고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어느 지역 출신인지 정확히 모르는, 그리고 에이번리 마을에 오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아이와 술이라니요. 앤이 너무나 위험한 아이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모두 마릴라가 고아 여자 아이를 데려온다고 했을 때 수군거렸지만 배리 여사는 기꺼이 자신의 딸과 놀기를 허락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 일이 되니 우선 격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겠지요. 아무리 자신이 본 앤이 있다고 해도 술을 권한 앤조차 앤이었으니까요.
물론 앤에겐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친구를 잘 대접하고 싶었으나 실수로 술을 준 것이니까요. 거꾸로 앤이 부모가 있는, 마을에서 함께 자란 아이였다면 다이애나의 엄마가 그렇게까지 모질게 둘을 떼어 놓으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른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아이에게 너무 큰 상처를 만들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세상이 험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몽고메리 작가가 만든 에이번리 마을에는 겨우 사람들의 화를 돋우는 파이 집안 사람들 정도가 최고 나쁜 사람으로 표현될 만큼 모두들 선하고 성실한 사람들만 살고 있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세계는 훨씬 무서운 일도 많이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니 어른으로서의 걱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저희 엄마에게서 힌트를 얻기 전까지 이런 배리 여사의 입장은 좀처럼 가늠해보기 어려웠습니다. 20대 초반이었으니 그렇게 너그럽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자신의 잘못보다 과하게 혼나는 앤이 그저 불쌍했어요. 그러나 나이를 먹은 지금은 나 역시 다이애나의 엄마가 얼마나 걱정이 되어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시간이 지나야만 이해되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지금 느끼는 제 감정 중에도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시간이 더 지나면 저절로 이해되는 것도 있겠죠. 그래서 지금 조금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 생기더라도 앞으로 나아질 것을 믿고 현재의 상황을 슬기롭게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구독자님 에게도 지금 어려운 감정이 있다면 나중에 꼭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될 겁니다. 그걸 믿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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