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소설 중에는 제가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길버트와 결혼해 멀리 있는 마을로 떠난 앤이 오랜만에 에이번리로 돌아와 다이애나를 만납니다. 다이애나의 품에는 두 살배기 딸이 안겨 있는데 이름이 앤 코델리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합니다. '앤'이라는 이름은 이해했죠. 평생 친구였으니 그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지 하고요. 그런데 '코델리아'는 어디서 나온 이름인지 몰랐습니다. 이 장면에서 몽고메리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이애나와 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둘만 그 이름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고 적어 둡니다.
그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처음 초록 지붕 집에 온 앤은 다이애나에게 자신을 '코델리아'라고 불러 달라고 합니다. 빨간 머리의 고아 앤이 아니라, 이야기 속 공주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릴라는 실제 이름을 물었지만 다이애나는 웃으면서 받아주었죠. 실제로 다이애나가 앤, 루비 등과 이야기 클럽에서 소설을 쓸 때 본인이 코델리아라는 필명을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뒤, 그 이름을 자신의 딸에게 붙여 준 것이죠. 친구의 이름만이 아니라, 친구가 열한 살이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이름까지 함께요.
어릴 때는 이 장면이 그저 신기했습니다. 좋은 뜻을 담아야 한다며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을 지어주는 문화 속에서 자라다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 이름을 아이에게 붙인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달까요? 그래서 둘이 정말 친한 친구라는, 그리고 둘만의 비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사건을 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앤과 다이애나는 함께 자랐지만 비슷한 삶을 사는 어른이 되지는 않습니다. 앤은 계속 공부를 합니다. 퀸 학원에 진학하고, 교사가 되고,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 대학에 갑니다.(물론 추후에 길버트와 결혼하기는 하지만요.)
반면 다이애나는 에이번리에서 또래 아이 중 거의 유일하게 퀸 학원에 가지 않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다이애나의 부모님은 딸이 그렇게까지 많이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다이애나 자신 역시 공부에 큰 뜻을 두지는 않았기 때문이긴 했어요. 조세핀 할머니의 도움으로 성악을 배우기도 하지만, 결국 앤보다 먼저 결혼해 가정을 꾸립니다.
어린 시절에는 매일같이 함께했던 친구였지만, 어른이 된 두 사람의 하루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한 사람은 아이를 키우게 되었죠. 그러면 관심사도 달라지고, 생활도 달라집니다. 살아 보니 이런 때부터 친구를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더군요. 사이가 나빠져서는 아니고 서로의 하루가 달라지기 때문이죠. 최대 관심사가 달라지기도 하고요.
저에게도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만나 사회 초년생이 될 때까지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결혼을 했고, 저는 계속 일을 했습니다. 사는 곳도 달라졌고, 생활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서로를 응원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잘 이겨내길 바랍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무 때나 만나 밥을 먹고,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얼굴을 보는 사이는 아니게 되었습니다. 살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래서 다이애나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는데도, 딸의 이름을 지으며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어린 시절 친구였다는 것. 그것도 친구의 이름만이 아니라 친구의 어린 시절까지 함께 기억하고 있었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오래 기억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의 현재만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연락을 계속할수록 그의 현재에 나도 함께 집중하게 되죠. 하지만 사실 학생이었던 친구는 직장인이 되고, 직장인은 부모가 되면서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모습으로 기억을 덧씌우다 보면, 함께 웃고 떠들던 어린 시절은 조금씩 흐려집니다. 그런데 다이애나에게 앤은 달랐습니다. 앤은 여전히 '코델리아'를 꿈꾸던 소녀처럼 느껴진 것이니까요.
시간이 더 흘러 앤 역시 자신의 딸에게 다이애나의 이름을 붙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참 좋습니다. 매일 만나지 않아도,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의 인생 안에 오래 남아 있었다는 걸 이름 하나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다이애나는 정말 성숙한 어른입니다. 퀸 학원 진학을 두고 앤과 갈등할 때도 그랬어요. 겨우 15~17세 정도였는데도요. 상대의 삶이 나와 달라져도, 그 시간을 서운해하지 않고 오래 품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연스레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다이애나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들에게, 나 역시 그만큼의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겠죠. 저는 앞으로는 좀 나아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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