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의 화창한 어느 날.
또치는 대한민국 서울에 위치한 한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노란색 이름표를 작은 가슴에 달고 강당에 쪼르르 앉아있는 귀여운 아이들 중에 우리 딸 또치도 있었다. 학교를 떠난 지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참 신기한 일이다. 한국 사람이 만나면 자동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처럼 국민의례의 절차가 낯설지 않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여, 애국가 제창, 그리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까지 완벽하게 기억해 내다니 말이다. 이제 막 유치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학교에 갓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이런 일련의 순서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찰나였다. 애국가의 전주가 흘러나왔고, 아이들의 그 작은 입에서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닿도록~’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책 부리지 말자고 입 꾹 다물고 눈물을 삼켰다. 그런 마음 알리 없는 또치는 빨갛게 달아오른 내 눈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다.
나는 21살에 영국에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외에서 떠돌며 살고 있다. 한국에 대해 애틋한 마음을 갖고 살진 않다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일을 할 땐 그냥 한국인이라는 것 자체를 잊고 살았다. 그러니 아이들 둘을 낳고도 별다른 한국어 교육에 대한 나만의 철학을 갖고 있지도 않았었다. 나는 직관적으로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굳이 한국어 교육에 목을 메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영국에서 정착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3세, 4세가 되던 해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코비드 영국 변이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섬나라였던 영국의 하늘길이 막혔다는 것은 고립을 의미한다. 이때 남편에게 마드리드 본진 출근 명령이 떨어졌다. 주말부부가 가능할 것이라는 안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공항이 폐쇄된 마당에 무슨 주말부부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인사발령 공문이 있는 남편을 따라 스페인으로 입국했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스페인에서 한국을 들어가는 계획을 세웠다. 스페인 역시 유럽에서 코비드 확진자가 많았던 시기라 어느 정도 사태가 안정이 될 때까지 그나마 안전하게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한국에서 지내보자는 것이 나의 계산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영국을 코비드 위험국가로 지정했었고 한국 입국이 쉽지 않았다. 위험국가에서 온 영국 촌년들의 한국 입성기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꽤 길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따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힘겹게 한국 땅을 밟았건만 당시 영어가 제일 편했던 우리 아이들의 한국생활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엄마 없이도 무척 독립적인 아이들이었는데 이때부터 한국어 전담 통역사인 엄마 껌딱지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이니까 한국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도 아이들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들이 한국말을 전혀 못 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사람들에게 영어로 묻고 답하던 또치가 어느 날 결국 터졌다!
영어를 못하시는 한국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스페인의 아부엘라 (스페인어로 할머니)는 항상 한국말과 스페인어를 쓰는데, 왜 영국에서 온 자기들은 영어를 쓰면 안 되냐는 것이다. 이곳에 살러 온 것도 아닌데 왜 한국말을 힘들게 배워야 하고 한국말만 써야 하느냐고 울먹인다. 아이 말이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9월 학기에 맞춰 스페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고 앞으로도 우리는 한국에 나와 살 계획이 없었다. 그래서 또치가 원하는 것은 엄마가 원래 한국말을 사용했던 걸 알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한테 한국말을 사용하는 지금, 이때만큼은 엄마가 영어를 써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아서 한국에 있는 동안 아이들을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런데 한국의 영어유치원은 놀이보다 학습의 비중이 더 높았다. 안 그래도 놀기 위해 사는 아이들인데, 꽉 막힌 교실 안에 빼곡히 앉아 공부시키는 환경은 안 그래도 언어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더 힘들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 엄마는 항상 마음도 약하고 우왕좌왕한다. 그래서 나는 놀이 학교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름도 잘 짓는다. 놀이와 학교, 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만났다. 아무튼 나는 ‘놀이’라는 말에 집중하기로 했고, 한국말을 하더라도 신나게 놀다 보면 새로운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가 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다행히 부모님댁 근처에서 나와 교육철학이 비슷한 원장님이 운영하는 놀이 학교를 발견했다. 다행히 놀기 좋아하는 또치는 적응이 빨랐다. 이 땐 사용하는 언어가 영어든 한국어든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듯했다. 그냥 너무 오랜만에 맨발에 또래 친구들과 부대끼며 노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만 세 살이 된지 얼마 안 된 둘째 까치는 조금 달랐다. 까치에겐 영어도 그리 편안한 언어는 아니었나 보다. 매일같이 놀이 학교 앞에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10분씩 시위를 했다. 다행히 해맑고 즐거운 언니가 있어 문 앞에서의 눈물의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단축이 되었고, 5개월이 될 무렵부터는 신발장에 신발을 넣자마자 바람처럼 사라졌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놀이 학교에서 배운 예쁜 말들도 매일 나를 감동스럽게 했다. 코비드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모두가 힘겨워하는 가운데 어쩌다 택했던 한국행이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5개월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을 한글학교에 입학시켰다. 토요일 오전 3시간 동안 이어지는 아이들의 한글학교 수업 자체에 큰 기대는 없었다. 일주일에 3시간, 얼마나 많은 걸 배워올까 싶기도 했다. 한글학교의 큰 장점은 저렴한 가격에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관임에 있다. 더 나아가 우리 부부의 주말 아침 자유시간을 보장해 주는 감사한 기관이기도 했다. 기대도 없고 게으른 엄마는 아이들의 한글학교 숙제도 잘 봐주지도 않았다. 그냥 한국말을 하며 지내는 환경만 만들어주면 된다고만 생각했지 집 책상에 앉아 한글을 쓰게 하고 공부시키는 것까지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놀기 좋아하는 또치가 한글학교 친구들이랑도 친해지고 싶어 했다. 한글학교를 마치면 다들 각자의 주말 스케줄에 따라서 바쁘게 흩어진다. 나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인사도 나누고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힘이 들었다. 이상하게 한국 사람이면 더 어렵다. 그래서 멀리서 아이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이면 재빨리 아이들 손을 잡고 남편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냥 출석부에 도장만 찍던 날들도 빠르게 흘러 2학기가 훌쩍 지나갔다.
2022년 새해가 밝고 새 학기를 맞이하여 학부모 회의가 있었던 날이었다. 학급 반장 어머니를 해주실 지원자가 있으시냐고 선생님께서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물으셨다. 그날 회의에 왔던 엄마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멋쩍은 미소를 띠었다. 그 불편한 공기를 잊을 수 없다. 나 또한 그랬으니 말이다. 제발 나한테 하라고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른 엄마들 중에 얼른 한 분이 손을 들어주길 바랐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쳤던 생각 하나가 있었다.
‘반장 엄마를 하면 또치네 반 엄마들이랑 좀 가까워질 수 있으려나? 내가 넉살 좋게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외향적 성격의 엄마가 아니라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했는데, 반장이 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면 반 엄마들이랑 소통하는 게 업무가 되어버리니 내가 힘들지 않게 사람들을 알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이게 문제다. 생각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내 입은 ‘제가 해볼게요!’라고 말하고 있었고, 방정맞은 오른손도 번쩍 들고 있었다. 다들 고맙다며 박수를 쳐주신다. 얼른 손들어주길 바란 그 한 분이 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박수를 받으며 정신을 찾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나의 그 선택이 그 후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사람들을 알아가고, 한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아가고, 그 안에 선생님들과 안 보이는 곳에서 수고하시는 많은 분들의 노고가 이 공동체가 지속되는 힘이라는 것을 그때가 되어야 깨달았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정말 한글학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거의 자원봉사자들과도 같았다. 처음 또치의 담임을 맡아주셨던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해외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쳐 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고, 그런 부모들의 마음이 모여 있는 곳이 이곳이라는 말씀이었다. 이곳의 선생님들은 저런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때부터 나도 내 아이가 속해있는 이 공동체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역시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 뭐든 가능하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뜻을 함께하는 엄마들과 함께 학교기금에 보태기 위해 교내 바자회도 개최했다. 함께라 참 즐겁고 뜻깊었던 시간이었다. 한글학교라는 이 특별한 공동체는 단순히 한글을 교육하는 교육기관을 넘어선 곳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 나간 것 같다.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시련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갖기 바라는 것과 그 맥을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지만 여전히 끊임없이 발생하는 인종 간 차별들 혹은 이민자의 아이들로 겪어야 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지혜롭게 대처하게 하는 그 단단한 내면의 뿌리를 가슴에 심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 어떻게든 나 없이도 한국과 연결시켜줄 연결고리를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 한글교육과 한국 문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싶었던 마음이 한글학교라는 공동체에 흘러든다고 생각했다. 정말 나라는 사람은 중간이 없다. 항상 이렇게 극단적이다.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는데, 그래도 나는 좋았다. 힘이 닿는 한 열심히 돕고 싶었다.
남편의 독일 파견으로 스페인을 떠날 거라는 결정이 내려질 2022년 연말 무렵 다시 한번 더 우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엔 또치의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다. 만약 1년 전의 나였다면 입학 통지서와 예비 소집일 공문이 친정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들어가 살 것도 아닌데 뭐…’라는 혼잣말 보태며 일말의 고민 없이 해외 거주지 증명 서류를 바로 송부했을지도 모른다. 9월에 새 학기가 시작하는 유럽과 다르게 3월 학기제를 취하는 한국의 초등학교에서 보내온 이 입학통지서는 나에게 일종의 러브레터 같은 것이었다.
또치를 한국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한 학기를 보내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수많은 말들과 반대가 있었다. 그 많은 말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려 했다. 우리의 결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여전히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또치와 까치가 배운 것은 한국말, 언어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페인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엄마가 한국 사람이고 아빠가 스페인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부가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일반적이라 여겨지는 스페인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의 외모가 달라 보이는 이유가 설명이 되는 상황을 자주 마주해야 했다. 스페인어가 어눌한 우리 아이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묻는 질문에 우리 아이들은 나와 남편에게 배운 대로 정성스럽게 대답을 했었다. 극동은 곧 중국으로 연결하여 알고 있는 스페인 어린아이들에게 한국은 그저 중국에 속해있는 어디쯤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른이었다면 의연하게 한국과 중국이 다른 나라인 것을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 아이들은 이런 질문들과 대답을 잘 못 알아듣는 스페인 아이들의 반응이 싫었었나 보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내가 한국말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엄마가 다른 친구들한테 중국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그냥 영어를 써줬으면 좋겠다고 또치가 간절히 부탁했을 때 내 마음이 무너졌다. 그리고 생각 없이 ‘중국인이세요?’라며 대화를 시도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무지가 아이들의 눈에는 무례하게 보였던 것 같다. 모르는 사람은 알려주면 되는 거라고,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엄마는 하나도 기분 안 나쁘다고 또치를 달래봐도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스페인이 싫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한국인인 것이, 동양인의 피를 갖고 태어난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모르고 물어보는 사람에게는 그냥 알려주면 되는 것이고, 일부러 상처 주고 깎아내리려고 자극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라 나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우려했던 것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국인 부모님 아래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소위 말하는 토종 한국인이다. 그래서 나의 아이들이 겪는 이 모든 일들과 그 속에서의 혼란은 가늠할 수 있지만 확실히 잘 알지 못했다.
그냥 이 아이들은 직접 겪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이라는 곳,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곳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이 직접 겪고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나 아이들 스스로가 아름답고 귀한 존재인지, 생김새를 가지고 속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다. 아이들은 생동감 넘치는 한국을 좋아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도 아이들은 또 다른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번엔 내가 상상치 못한 ‘외국 사람’ 같이 생겼다는 말에 아이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예쁘게 생겼다는 말을 굳이 그렇게 하시는 어르신들이 많으시다.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우리는 한국 사람인데 왜 외국 사람이라고 하냐며 분개했다. 정말 산 넘어 산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원하지 않는 타인의 지속적인 관심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참 다행이다. 아빠가 외국 사람이니 당연히 외국 사람처럼 생겨야 맞는 것이라는 논리를 적용해서 설명했더니 아이들은 ‘외국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타인에 대한 아이들의 적개심은 많이 줄었다. 당연히 아이들의 한국어는 이전보다 더 발전했고, 존댓말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도 되었다. 예쁜 선물을 받고 ‘대~~바아악~~~~’ 하며 환호성을 외치는 또치를 보고 나도 많이 놀랐다. 역시 K-초등의 맛보기 체험이 꽤 효과적인 것처럼 보였다. 가끔 90도 폴더 인사를 하며 예의를 차릴 줄도 아는 아이들을 보면 역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국에서 즐겁게 생존 법칙을 배워나갔다. (여전히 말괄량이 야생마들이긴 하지만…)
한국을 알아가고 한국어를 배워가는 아이들의 여정을 함께 하다 보니 나에게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생겼다. 한국어 교원과정을 시작하기 이르렀으니 말이다. 세상일은 장담할 수가 없다. 나는 선생님 절대! 못한다며 교사는 교육으로 양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타고 나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나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보겠다며 일을 벌인 것이다.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길을 이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나를 보며, 내가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흔이 넘었는데 새로운 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마무리를 하자는 마음이 더 컸으니 말이다. 나중에 아이들이 다니는 한글학교에 교사가 일이 생기면 그 수업 메꾸는데 쓸만한 자격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가르치는 것에 대한 미학을 몰라서 그랬나 보다. 며칠 전, 한국어 중급 정도 실력을 가진 독일 사람을 가르치는 한국어 교사 자리가 났다고 해서 지원을 했고, 이어서 면접과 시범수업을 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고 수업 준비를 해서 교실에 들어갔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노트북이 너무 오래되어서 요즘 사용하는 프로젝터에 연결이 안 되는 것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준비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편의 연극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태어나서 한국어를 그렇게 잘하는 외국인들 앞에 서본 것이 처음이었다. 다행히 학생들과 심사관들께서 처음 하는 수업인데 너무 잘 하셨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이틀 뒤, 한국어 교사 임용 불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말이다. 임용이 되고 안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훌륭한 다른 세 분의 선생님들과 함께 그날 시범 수업을 할 수 있어 오히려 영광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수업은 또다시 한국어 교육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에 큰 변화를 주었다. 비록 임용이 되지는 않았지만 너무 귀한 경험이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온 것일까? 해외에 나와 살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만 나는 조금 과하단 생각을 한다. 어쩌다 대한의 딸이 되어 이제는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샘솟게 된 것일까? 그리고선 문득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먼 훗날 태어날 미래의 아이들이 한국인으로 혹은 한국인의 자손으로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더 수월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그냥 기분 탓일까?
“한국적인 것이 제일 세계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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