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젊었을 때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했다. 서울 전역을 잘 돌아다녔기에 도심을 왕래하는 웬만한 버스 노선과 지하철 노선은 거의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한번은 ‘충무로역’에서 4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4호선 노선도에 따르면 충무로역-> 동대문운동장 역-> 동대문역 순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내 머릿속엔 충무로역-> 동대문역-> 동대문운동장 역 순으로, 순서가 다르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의 머릿속에선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진리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는 충무로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내 고정관념에 따르면, 충무로 다음이 동대문역, 그다음이 동대문운동장 역이었기 때문에 동대문운동장 역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동대문역을 지난 것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머릿속으로 딴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때 지하철 문이 열리면서 동대문운동장 역이라고 쓰여진 역 이름이 보였다.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나! 벌써 두 정류장이 지났나?’ 생각하며, 문이 닫히기 전에 뛰어내렸다. (사실은 한 정거장만 지난 상태였다.)
‘아유, 딴생각하느라 동대문역을 지나친 줄도 몰랐네!’ 나는 정신 줄을 놓고 있는 스스로를 탓하며, 반대 방향으로 건너갔다. 한 정류장만 되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다시 지하철을 탔다. 나는 눈으로는 차창 밖을 보고 있었지만, 머리로는 딴 생각에 몰두했다. 한 정거장만 가면 되니까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한 정거장이 지났을 무렵 지하철의 속도가 줄어들고 내릴 때가 되었을 때, 역 이름을 보니, 어라? 동대문역이 아니라 충무로역이었다. ‘아니, 다시 충무로네! 그새 두 정류장이 지나가 버린 거야? 아이구, 내가 정신이 없긴 없구나!’
나는 누구 하나 아는 사람도 없는데,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왔다 갔다 했는데도, 다시 충무로 원점이라니 화도 났다. 나는 반대편 승강장으로 가서 다시 지하철을 탔다. 이번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밖을 쳐다보고 있는 순간, 다시 또 동대문운동장 역이다! ‘아니, 동대문역을 언제 또 지나쳤지? 뭐에 홀렸나? 잠시 딴 생각 했다고,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뭔가에 홀린 것 같았다. 사실 이쯤에서 내가 실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한 번이라도 노선도를 살펴봤다면 나의 실수는 한두 번이면 족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내 ‘확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혹감과 자괴감을 안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서 되돌아가는 지하철을 탔다. 오 마이 갓! 다시 충무로역이었다! ‘와, 돌아버리겠네!’
나는 이제는 내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내가 뭔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든 것이다. 왠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고, 이명도 들리는 것 같고, 대낮에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얼빠진 상태가 되었다. 아직도 내 ‘전제’는 틀릴 리가 없었다. 나의 머리는, 내가 확실히 두 정류장을 지나쳤는데, 정신을 딴 데 두어서 인식하지 못했다고 나를 꾸짖고 있었다. 고정관념의 힘은 정말 셌다. 나의 의식은 물론 나의 감각까지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넋이 나간 상태에서 다시 충무로에서 지하철을 탔다. 왔다 갔다 두 번씩 총 4번이나 되풀이 한 후였다. 이번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온갖 신경을 다 집중해서 다음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 정류장만을 지나쳤고, 동대문운동장 역이 맞았다! 나는 그제야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노선도를 살펴봤다. 맙소사! 동대문역은 이미 지나간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거였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의 자괴감이란 상상하실 수 있겠는가. 나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내 생각에 대해 그렇게 자신만만해했을까? 다섯 번도 넘게 아닌 것을 ‘목도’했으면서 어떻게 의심하지 않았을까?
한참이나 지난 일이지만 이 일은 두고두고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린 ‘역대급’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물론 역대급 교훈도 주었다. 그다음부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 지식, 기억들에 대해 절대로 ‘확신’하지 않게 됐다. 그 이후로도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던 일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고정관념’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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