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닿는 길

사소한 것은 정치적인 것_목담

2024.06.27 | 조회 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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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외부 교육을 받을 일이 있어 밖으로 나섰다. 며칠 동안 덥고 습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결국 비가 내린다.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을 강구했겠지만, 비가 오면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약속 장소에 늦기가 십상이다.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므로 나는 굳이 지하철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입구에 서 있었다. 문 옆 좌석에 낯익은 문구가 눈에 띈다.

‘핑크 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하다. 굳이 ‘내일의 주인공’이라고 해야 했을까? 문구 그대로만 해석한다면 ‘내일의 주인공’은 오로지 뱃속의 아이만을 뜻한다. 그럼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여성은?

그냥 평범하게 ‘임산부를 위한 자리입니다’ 했으면 됐을 것을, 내일의 주인공을 운운한 순간, 여성의 인격은 사라지고, ‘출산하는 도구’로서의 여성만 강조되었다.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여성에게 앉으라고 하면서 여성을 전혀 보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럴 의도가 아니지 않냐고, 뭘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그러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소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이러한 문구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자연스럽게 쓰일 때 여성은 삭제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질 즈음, 20대의 청년 한 명이 떡 하니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50대 여성인 나도 그 옆에서 자리를 비워두고 서 있는데, 감히 이노무시키가?...

내가 보기에 그 청년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전혀 개념이 없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직접적인 눈치를 주지 않았으나, 그 주변의 공기는 청년을 향한 눈총으로 가득 차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몇몇은 얼굴을 돌려 한 번씩 그 청년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그 옆에 앉아있던 젊은 여성이 “앗..!” 하며 당황한 표정과 동시에 이 남성을 잠깐 쳐다보다가 재빨리 일어서며 “여기 앉으세요!” 한다. 그 청년 앞으로 임산부가 와서 섰고, 그 모습을 본 여성이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청년 앞에 서 있던 여성은 임산부임을 알리는 ‘핑크 키링’을 달고 있었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임산부인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 바로 옆자리에, 임산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상태로 앉았다. 주변의 공기는 쏴 했지만, 젊은이는 여전히 아랑곳 하지 않았다.

편한 자세로 핸드폰을 보는 20대 청년은 정말 아무 개념이 없는 것일까? 임산부가 자기 바로 앞에서 핑크 키링을 달고 서 있었는데 그걸 알아보지 못하다니! 더군다나 공기가 이렇게 쏴 한데, 참 낯짝도 두껍다고 생각했다.

갈아타기 위해 내릴 때가 되었다. 지하철이 멈추고 나가려는데, 맞은편에 있던 한 70대의 남성이 청년 앞으로 오더니, 한마디 말한다.

“이봐, 젊은이! 이 자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비워두어야 하는 자리야!”

문이 열리기 전까지 약간의 시간 동안 지하철 안에는 정적이 감돌았고, 이것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준 이 남성에게 무언의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지하철을 내리면서 묘한 감정이 들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청년의 행동이 부적절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비록 표현은 안 했지만 속으로 도덕적 비판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졌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동시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있었다. 이 상황에 따르면 가장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어야 할 사람은 임산부인데, 왜 임산부는 ‘자리 좀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안)했을까?

또 젊은 청년에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은 모두들 같았지만, 임산부 당사자도, 20대 여성도, 심지어 50대인 여성인 나도 아무 말을 하지 못(안)했다. 그런데 70대인 남성이 그 한마디를 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것을 푸는 것은 나의 숙제다.

사소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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