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진짜 사랑이라고 했다.
지난달 성황리에 마친 ‘수프-굴라쉬-카이저슈마렌’ 홈 디너 후, 남편에게 말했다.
“아… 오늘 이 자리에 시아버지도 오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다음번엔 꼭 시아버지도 모시자.”
시부모님이 집에 오시면 한식으로만 식사를 차려드렸는데, 생각해 보니 오스트리아식 집밥을 차려드린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필리핀에서 오신 시어머니를 위한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어머니는 70년도에, 갓 스물을 넘겨 오스트리아에 오셨으니 고향보다는 오스트리아가 더 익숙할 법도 하시겠지만, 그래도 내가 뛰놀며 자라온 곳이 어디 쉬이 없어지겠는가. 그런 어머니에게서 타향살이의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같은 외국인으로서, 그것도 여기보단 뿌리가 더 비슷한 아시아인으로서, 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시어머니와 함께 나누고자 했다. 쌀밥에 새우와 채소를 듬뿍 넣은 요리를 해 드리면 맛있다며 그릇을 다 비우시곤 했던 나의 시어머니.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셨는지, 고향의 그리움만큼 사랑을 듬뿍 챙겨 주셨던 시어머니는 작년 화창한 봄날 평안히 눈을 감으셨고, 남겨진 우리들은 여전히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
혼자 되신 시아버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더 자주 뵙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하여 2월에는 겸사겸사 - 시아버지와 시간을 더 보낼 겸, 내 생일 겸, 언제 다시 특식을 먹느냐는 두 남성의 열화와 같은 성의에 응답도 할 겸, 그리고 보고 싶은 시어머니를 함께 모여 그리워할 겸 - 마음을 더 담아 홈 디너를 준비하게 되었다. 메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슈니첼’. 가장 오스트리아답고, 시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겨 있기도 한 소중한 음식.
*Schnitzel (슈니첼): 얇게 저민 고기를 망치로 두드려 편 뒤 튀김옷을 입혀 튀긴 요리. 특히 Wiener Schnitzel (비엔나식 슈니첼)은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국민 음식 중 하나이며, 송아지고기를 사용하며 라드나 정제버터에 튀겨 내는 것이 특징이다.
슈니첼은 내게 소스 없는 돈가스였다.
처음 슈니첼을 먹었을 때를 잊을 수가 없다. 빵가루에 튀겨진 고기 한 덩어리가 소스도 없이 하얀 그릇에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로 엉뚱하게 레몬 한 조각이 얹혀 있었다. 여백의 미를 찾아볼 수도 없이 그릇을 꽉 채우는 돈가스가 오히려 황량해 보였다. 길고 가느다란 빵가루로 튀겨져 튀김옷이 여기저기 살아 있는 듯한 우리네 돈가스와는 다르게, 슈니첼은 왠지 점잖고 지루해 보였다.
무언가 하나가 빠져 있는 것만 같은 이 조합은 그릇을 받기까지의 설렘마저 없애버렸다. 퍽퍽하기만 한 것 같고, 도대체 레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여기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잼 하나가 더 서빙되었는데,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인가? 고기와 잼**이라니.
**Preiselbeeren/Lingonberry로 만든 잼인데, 달콤하면서도 끝맛이 씁쓸해서 오스트리아의 다양한 요리에 곁들여 지고, 아침 식탁에서도 사랑받는 잼이다.
문화의 다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결국은 식탁이 아닐까.
언어와 생활양식의 차이는 보고 듣고 익히는 과정에서 받아들임의 강약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면, 식탁 위의 사정은 다르다. 먹거나 먹지 않거나 둘 중 하나. 생존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음식을 받아들이는 건 머리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식탁에서 오는 문화 충격은 눈으로, 코로, 목구멍으로, 온몸의 세포로!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냉장고에 있는 김치 좀 꺼내 와 봐!“가 절로 나오는 슈니첼을 먹으며, “돈가스를 이렇게도 해석(?) 할 수 있구나!“를 몸소 체험하며 강렬하게 오스트리아가 훅 들어왔던 게 벌써 20년 전이다.
심심한 커틀릿 하나와, 보기만 해도 신 레몬, 고기와는 한없이 멀어 보이는 링곤베리 잼까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조합이 이제는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이 될 줄은 그때엔 상상이나 했을까?
이제 슈니첼은 내게 그저 소스 없는 돈가스가 아닌, 즐겨 먹는 오스트리아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시아버지가 장래의 며느리가 될 아이에게 처음으로 대접해 주신 메뉴이기도 한, 잊을 수 없는 음식이기도 하다.
남편과 캠퍼스에서 알콩달콩 연애를 하던 그 시절,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일요일 점심에 집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던 그였기에,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우리가 부모님을 뵐 만큼 그렇게 각별해진 사이가 된 것인가? 뼛속 깊이 한국 문화 속에서 자라온 내게는 부모님을 만나 뵙고, 그것도 집으로 찾아가는 것은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에 반해 파트릭은 “그냥 점심에 밥 먹고 놀다가라구” 하며 방과 후 친한 친구를 집에 부르듯 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가고자 했다. 그의 꾸밈없는 마음과 나의 앞선 걱정이 버무려진 어느 여름날,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의 압박감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그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긴장되는 마음을 누르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자 저 멀리서 고소한 튀김 냄새가 마중 나왔다. ‘엇, 돈가스다!’ 긴장감과 시장기가 버무려진 묘한 설렘이 올라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의 따뜻한 향과 기름진 온기가 문 밖까지 퍼져 나오며 앞치마를 두른 키 큰 어르신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상견례도 아니고 그저 일요일 점심에 방문하는 것에 대해 나는 무엇을 상상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어르신들을 뵙는 자리이니 여름날 반바지는 안 돼, 그렇다고 원피스를 입고 가는 건 너무 오버인데. 그래도 민소매 원피스는 안 되지.’ 없는 살림에 이 옷 저 옷 입어보다가 결국은 청바지에 수수한 셔츠 하나 입고 갔던 나였다. 그러나 문 앞에서 반바지와 셔츠 차림 위로 앞치마를 두르고 계시던, 파트릭의 함박웃음과 똑같은 햇살로 나를 반기시는 아저씨 모습에 그만 안도의 웃음이 나와 버렸다.
“슈니첼이 타버릴 수도 있으니까 부엌에 가볼게, 어서 들어와!”
인사 후 후다닥 부엌으로 향하시는 시아버지 뒤로 작은 체구의 여성이 보였다. 파트릭과 똑같은 깊고 맑은 눈을 가지고 계시던, 포근한 봄꽃 향기가 나는 나의 시어머니. 만나자마자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시어머니 앞에서 이 집에 오기까지 고민하고 긴장하던 시간이 사르르 사라졌다. 복도에 걸려 있는 파트릭의 개구쟁이 사진은 더없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가족의 사진들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가니 아담하고 동그란 식탁 위로 식사가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곧이어 갓 튀겨진 슈니첼과 샐러드로 식탁이 풍성해졌고, 잔들을 부딪치며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고 시아버지와 파트릭의 쉴 새 없는 수다가 오가며 정겨운 일요일 오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라디오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여름 햇살이 창문에 아른거리는 한적한 일요일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 기억 속 어딘가에 동동 떠다니던 외할머니 댁에서 보내던 나른한 일요일 정오가 생각났다. 괘앵- 징소리가 들려오는 씨름 중계방송 앞에서 좋아하는 만화를 보기 위해 이제나저제나 TV 앞에서 뒹굴거리던 우리들. 모래 위의 엎치락뒤치락을 멍하니 지켜보다 엉덩이가 간지러워질 때쯤 멀리서 솔솔 풍겨오던 시큼한 김치찌개 냄새. 챙챙 숟가락 부딪히며 상이 차려지고, 왁자지껄 분주해지면 이내 “밥 먹자!” 소리에 달그닥달그닥 밥그릇이 비워지고. 밥풀 몇 개 붙어 있는 밥그릇에 구수한 누룽지를 부어 한 사발 들이켜고 나면 낮잠 주무시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비로소 텔레비전은 우리 차지. 봤던 만화를 보고 또 보고, 한없이 누워 있어도 해가 여전히 길었던 일요일. 그리운 나의 양산동. 아련해진 그 일요일 정오를 시부모님 댁에서 다시 만났다. 달착지근했던 김치찌개는 고소한 슈니첼로 바뀌었고, 밥 먹고 함께 들이키던 숭늉은 커피가 대신했지만, 함께 둘러앉아 밥그릇을 부딪히며 먹었던 그 정겨움은 시간과 공간이 달라도 여전히 따스했다.
10년이 지나 처음으로 시아버지께 며느리표 슈니첼을 만들어 드렸다.
내게 오스트리아 양산동이 되어 주셨던 시아버지께 고마움과 사랑을 그득 담아 한 상 준비해 드렸다.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요리를 시킨 것 같아 미안하다는 시아버지.
“아니에요, 그때 만들어 주셨던 슈니첼만 할까요…”
밥도, 새우 요리도 없지만 시어머니도 분명 함께 즐기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 깊은 눈으로 찬찬히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시겠지. 시아버지의 여전한 장난 가득한 농담에 한숨 쉬시며 웃으시겠지.
나의 일요일 오후는 그리움 한 스푼 듬뿍 더해져 더욱 달큼해졌다.
영글어진 나의 일요일 레시피로 다음엔 어떤 식탁을 차려볼까나? 나의 소중한 손님들에게 무엇을 담아줄까나?
나부터 설레는 이 식사 시간이 기다려진다. 감사와 사랑이 담긴 한 끼는 오늘도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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