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쌀 행복 레시피

사과 한 입, 추억 한 입_윤지

2025.05.23 | 조회 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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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일들

우리들의 이상적인 시간 기록 일지

‘키위 농장에 시집갈 거야!’

 요즘처럼 슈퍼에 가면 바로 사 먹을 수도 없었고, 어쩌다 한 번 그 오자미같이 생긴 키위가 집에 오는 날이면 벌써 머릿속으로 몇 개인지, 내 몫은 얼마나 될지 빠른 셈을 하곤 했다. 꺼끌꺼끌한 껍질을 쓰윽 벗겨 내면 드러나는 초록빛 풋풋 달콤한 그 과일이 너무나 좋아, 키위 농장에 시집가고 싶다고 노래를 했다. 사등분한 키위를 아껴 아껴 먹다가 그릇에 남아 있는 연두빛 즙까지 싹싹 핥아서 먹고 나면, 혀끝의 달콤함이 아쉬워 못내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부엌 구석구석을 뒤치락뒤치락.  

하는 수 없이 베란다로 향하면, 박스째 우직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과.맨들맨들 사과 하나 집어내며, ‘사과 말고 딸기나 배 터지게 먹어 봤으면. 사과 말고 수박 한 통 나 혼자 다 먹어 봤으면.’ 그래도 사과 하나는 언제나 언니, 동생 안 주고 내가 다 먹을 수 있지!

박스 안에 그득이 담겨 있던 사과는, 우리 삼남매가 먹을 것을 두고 쟁탈전을 벌일 필요가 없었던 유일한 과일이었을 것이다. 그 아무리 귀한 키위가, 봄에만 먹을 수 있었던 딸기가 좋다고 한들, 부족함 없이 질릴 때까지 먹을 수 있었던 사과야말로 나의 찐 과일 친구였다.

매끈한 껍질을 과도로 톡 한 번 치고, 사악-사악- 끊어지지 않게 돌돌돌 깎다 보면 침이 저절로 고인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아까운 껍질을 오독오독 씹어 먹어도 맛있고, 설탕에 졸여 빵에 올려 먹어도 맛있다. 나 혼자 다 먹어도 혼날 일 없는 사과. 한국에도 있고, 오스트리아에도 있는 사과.

20여 년 전, 오스트리아로 가족 모두가 오게 되면서 맞닥뜨린 가장 큰 문제는 당연히 ‘언어’였다. 아무렴 오스트리아에서도 나름 영어가 통한다고는 하나, 우리가 당시 살고 있던 그 마을은 평균 연령대 60세 이상, 마을 전체 인구를 합쳐 봐도 200명도 안 되는 아담한 시골이었다.

독일어를 빠르게 익히기 위해 잠깐 살게 되었는데, 정말 독일어만 통해서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더랬지. 이제는 아득하기만 한 그 동네를 생각할 때면, 그리움이 너울너울거린다.

저녁을 먹고 나면 불 켜진 곳 하나 없고 오직 밤하늘의 별들만 가득했던 그리운 곳. 새벽에 창문을 열면 풀 내음 위로 하얀 구름 같은 안개가 물결치던 우리의 보금자리. 길가에 즐비한 대롱대롱 사과나무. 사과나무에 얽힌 추억거리 가득한 우리 가족의 또 다른 고향, 하게나우(Hagenau).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사과나무를 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베란다에 가면 있던 사과가 아니라, 굽이굽이 뻗어 있는 나뭇가지 끝에 이파리 사이사이마다 빼꼼히 사과가 보이는 나무를 보게 된 것이다. 박스 안에 있는 사과를 무심코 집어 들어 와삭 베어 먹는 생활을 하던 내게, 인터넷, 텔레비전, 전화기 하나 없던 그곳 시골 생활이 어찌나 사과나무 같던지. 가지 끝마다 걸려 있는 빨강 초록 복주머니 같은 사과는 속절없이 탐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한 개 슬쩍 따볼까 싶은 마음이 들어 요리조리 살피다 결국엔 쭉 뻗은 사과 길 위로 후두둑 떨어져 있던 사과를 줍게 되었다.

가슴이 콩닥콩닥거린 채로 한참을 줍는데 멀리서 동네 할머니 한 분이 외치신다. “Sauer! Sauer! 싸우어 싸우어”

길가에 흐트러지듯 놓여 있는 사과를 가져간다고 도둑으로 몰릴쏘냐 했지만, 놀란 가슴에 몇 개 줍지도 않았던 사과를 도로 내려놓고 주머니에 몇 개만 쏙 담았다. 다시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 “Sauer, Sauer!” 이리 오라는 손짓에 죄지은 사람마냥, 할머니께 다가가니 쿵쾅거리는 심장소리와 할머니의 알아들을 수 없는 독일어만 가득하다.

머쓱하게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사전을 펴고 단어를 찾아본다. ‘Sauer: (형용사) 신, 새콤한’

아… 우리가 줍던 그 사과가 시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하셨던 거구나. 그리고 나서 애물단지 사과를 한 입 베어 보니, 과연 할머니 말대로 너무나도 시고 떫었다.

슈퍼 하나 없던 그 시골 마을에서 장 한 번 보려면 반나절이 걸리는 대장정을 각오해야 했다. 집에서 30분 이상 걸어서 기차역으로 가서 약 두 시간에 한 번씩 오는 기차를 타고, 큰 마을에 다다르면 다시 30분을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차도 없이 장 본 물건을 오로지 백팩에 짊어와야 했기에 쌀, 채소, 필수 생필품을 담다 보면 과일은 순번에서 늘 밀리곤 했다. 키위와 딸기는 언감생심.

‘아… 사과 하나 아사삭 베어 먹어 봤으면, 사과나 배 터지게 먹어 봤으면…’

사과만큼 쓰라린 마음에 그날따라 한국 사과는 왜 그리도 더 먹고 싶어지던지.

사과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Sauer를 외치시던 할머니를 다시 마주치게 되었다. 사과나무 길가에 우리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셨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들였고, 총총걸음으로 집 뒤 정원으로 향하셨다. 드넓은 마당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사과나무, 나무마다 달려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 같은 사과. 할머니께서는 땅에 떨어져 있는 사과는 싸우어이니, 당신네 사과를 가져가라고 하시며 손수 따주셨다.

아삭- 한 입 베어 먹으니 새콤하고 달착지근함이 일 전의 씁쓸한 기억을 지워버린다. 평생 ‘부사’만 먹어왔던 내게 오스트리아 사과는 상큼하고 풋풋했다. 들판의 풀꽃 같고, 뜨거운 여름날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같았다. 그날 우리는 사과를 한 바구니 얻어 와 한참 동안 과일 걱정 없이 며칠을 상큼하게 보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해 여름 듬성듬성 채워가던 우리의 독일어 단어장은 조금씩 도톰해졌다… 사과, 나무, 새콤한, 달콤한 그리고 따뜻함...

베란다의 사과도, 동네 할머니가 주셨던 그 사과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반나절을 바쳐야 하는 장보기 대란과 남몰래 줍던 사과의 추억이 무심하게도, 부엌 한 켠에는 늘 곱고 빨간 사과가 시큰둥하게 있다.

그래도 쨍한 여름날, 새콤달콤한 사과가 불쑥 간절해질 때 하게나우의 사과나무들이 떠오른다. 어쩌다 잠깐 한국에서 달달한 부사를 먹을 때에, 단단하고 시큼한 오스트리아의 사과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 글을 마무리하며 지금 마시는 이 커피에, 상큼함이 가득 퍼지는 오스트리아의 대표 디저트 ‘아펠슈트루델’*이 아른거린다. 여전히 내 마음속 과일은 사과임에 틀림없다.

 

#아펠슈트르델(Apfelstru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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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전통 커피숍, 카페 하벨카 Cafè Hawelka의 아펠슈트르델. 먹어본 아펠 슈트르델 중에서 최고였어요!

아펠슈트르델은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전통 디저트에요. 밀가루 반죽을 얇게 얇게 늘여서 반죽 속에 새콤달콤 사과, 건포도, 계피, 설탕을 넣어 돌돌 말아 구워 먹는 음식이에요. 아펠은 사과라는 뜻이고, 슈트르델은 소용돌이라는 뜻인데요, 아마도 돌돌 만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불린 게 아닐까 유추해 보고 있어요. 사과 말고도 Topfen 이라는 생치즈를 넣어 Toptfenstrudel (토픈슈트르델/생치즈슈트르델)을 먹기도 한구요, 고기나 채소를 넣어 식사용으로도 먹기도 한답니다!

지난 홈 디너에는 이 아펠슈트르델을 직접 만들어 보았어요. 보통은 페이스트리 반죽을 슈퍼에서 사서 속 재료만 만들어 먹곤 했는데, 이번에는 반죽부터 직접 다 해 보았어요. 만들며, 또 불쑥 '하게나우' 사과 생각이 났더래요.

 

1. 밀가루, 버터, 물을 섞은 반죽을 잘 치대고 조금 숙성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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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과를 얇게 썰어서 계피, 견과류 가루 등을 섞고 속 재료를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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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반죽을 얇게 얇게 펴내고요, 빵구가 나면 수리도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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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얇게 편 반죽에 속 재료를 넣어주고요, 양 끝을 접은 후 돌돌돌 말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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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겉면에 버터를 발라주고 오븐에 구워주면 끝! 오븐에서 익어가는 동안 버터를 자주자주 발라줘야 겉이 촉촉해진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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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이 위로 가루설탕을 솔솔솔 뿌리고, 휘핑크림과 함께 아암-먹으면, 흐어어어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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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사과 나무

 

4월에 짧게 한국을 다녀오게 되었어요. 5일간의 일정이었지만, 엄마와 함께 『인상파, 모네에서 미국으로』 전시회에 다녀오기도 했답니다.

모네의 「수련」도 좋고, 차일드 하쌈의 「비 오는 콜럼버스 애비뉴」도 좋았지만, 우리 모녀의 원픽은 바로 이 그림이었답니다.

조셉 H.그린우드 <사과 밭>
조셉 H.그린우드 <사과 밭>


우리 가족이 그리워 하는 하게나우를 닮은 풍경, 그리고 사과나무.

하게나우가 그리워지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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