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때에 친구들끼리 돌려보던 잡지가 있었다.
유행하는 스타일, 길거리 패션, 우리를 설레게 하는 그 시절 아이돌 사진이 잔뜩 담긴 그 잡지 뒤편엔 늘 심리테스트가 실리곤 했다. 나의 스타일 분석, 나의 연애 스타일은? 나는 어떤 타입의 사람? 등 소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심리 테스트는 단연코 잡지의 하이라이트였다. 그중 아직도 기억나는 질문 하나.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가장 하고 싶은 행동은? ‘
a, b, c, d 보기 중 하나가 얼마나 상상이 가지 않았으면 아직까지 머리에 남아있는 걸까? 중학생을 갸우뚱하게 만든 그 보기는 바로,
‘d. 냉장고의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신다.‘
씁쓸하고 젖은 신문지 냄새 가득한, 시원함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맥주를 왜 샤워를 마치고 마셔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나의 풋풋한 10대여. 그러나 강산이 몇 번이고 변한 지금, 그 설문지를 다시 가져다 놓고 테스트를 한다면 씩 웃으며 d. 맥주 한 캔을 선택하리.
맥주가 처음부터 맛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커피도 처음에는 우유, 설탕, 시럽, 크림의 혼합 음료(?) 시작해서 커피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에스프레소까지 가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맥주도 그랬던 것 같다. 그 쌉쌀함이 맛있어 질려면 아무래도 인생의 쓴맛은 몇 번 경험을 해야 되는 거였을까. 뭣도 모르고 그저 값싼 맛에, 배고픈 시절 배부르려고 마셨던 맥주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샤워 후 청량감의 맥주와는 사뭇 다르다.
술자리 도구로만 마셨던 그 수많은 맥주들 속에 Ottakringer 오타크링어가 있었다.
하이네켄이나 버드와이저 보다 싸서 사다 마셨지, 이름만 들어도 촌스러운 오타크링어는 주로 애용(?) 하던 주류는 아니었다. 초록색에 별 하나 박혀있던 세련된 하이네켄의 색감과 로고에 비하면, 손에 잡힐 것 같지도 않은 누런색에 쓱쓱 성의 없이 그리다 만 것만 같은 로고는 아무리 봐도 아저씨 맥주 같았단 말이지. 맥주 맛도 모르지만, 그 촌스런 노란 캔을 들고 있으면 더욱더 초라해지는 것만 같아, 여름날 밖에서 맥주 한 캔 들고 노는 날엔 오타크링어는 손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나의 (주당)아빠는 비엔나에 오실 때마다 오타크링어를 찾으셨다. 마셔보신 맥주 중에 제일 맛있으시다고.
‘역시, 오타크링어는 아저씨들의 맥주였어!’
아빠를 위해, 슈퍼마켓 냉장 칸의 빛나는 하이네켄을 뒤로하고 아저씨 맥주를 집을 때면, ’뭐, 내가 마실 건 아니니까. 이거 내가 마시는 거 아니라구요.’ 하는 내면의 외침과 함께 급히 계산을 하고 나오곤 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그 노란 캔이 어쩌다 내 마음속에 들어왔을까나.
기억을 더듬더듬 찾아 헤매어 보니, 어렴풋이 와인 코스가 떠오른다.
당시 아이를 낳고 더욱더 ‘나 찾기‘에 전념했던 나는,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늘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와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시는 것 좋아하고 지리와 역사를 좋아하는 내게 세계 주류 공부는 신세계였다. 훌러덩 빠져들었다. 아마도 그 즈음부터 평소에 마시던 술을 조금은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 잔 한 잔,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하고, 향과 맛에 집중하며 페어링을 생각하고.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마시는 모든 음료를 더욱 살피고 음미하게 되었고, 그 수많은 음료 중에 당연히 맥주도 내 실험대에 올랐을 것이다.
실은, 육아 해방의 시간을 더욱 만끽하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요놈의 술들에 흥이나 맥주도 얼싸안고 더 좋아하게 된 건지도...?
흠...아니다…달고 짜고 쓴맛들이 어느새 시시해져서, 씁쓸한 맥주가 한없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나이가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복합적인 맛을 찾아내야 하는 와인에 비해, 맥주는 그냥 심플해서 정이 갔을 지도.
차가운 잔에 보골보골 살아있는 기포를 보고 있자면 벌써부터 목이 시원해지는 이 기분. 그 시원한 청량감과 그 뒤에 여지없이 기다리고 있는 쌉쌀함이란! 포도 종류에 따라, 포도가 자라온 환경에 따라 그리고 양조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맛이 달라지는 심오한 와인은 외울 것도 많아 (그래서 재밌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탐구와 연구를 해야 하는 거대한 산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나의 맥주는 단출하다. 보리를 넣으면 여지없이 보리술이 나오는 맥주는 단순해서 좋다. (물론, 쓰이는 곡류 배합에 따라 넣는 홉에 따라 그리고 상면, 하면 발효에 따라, 맥주도 와인 못지않게 화려하기도 하지요.) '와인 한잔할까? 화이트? 레드?, 어떤 종류? 어디 나라?' 생각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 와인보다는 '맥주 한잔하자!'에서 오는 시원함이 좋다. 어느 나라를 가도 변하지 않는 첫 모금 꿀꺽의 짜릿함이 설렘이 되어, 주문할 때부터 시작되는 맥주의 갈증은 늘 즐겁다.
이 시원 털털함이 어느 때보다 고플 때는 반드시, 다른 맥주보다 훨씬 낭창한 오타크링어를 마셔야 한다. 오타크링어는, 짤츠 부르크의 (비엔나 동쪽 연방주) 명물, 세련된 Stiegl 슈티글 보다 연하고 슈타이어마크의 (비엔나 남쪽 연방주) 걸쭉한 Goesser 괴써보다 사뿐하다. 하이네켄의 맹맹한 맛보다 고수하고, 떫디 떫은 체코 부드바르 보다 기분 좋은 쌉쌀함을 머금고 있다. 한낮의 출출함을 잠재우기에도, 한 겨울 낮에 쨍한 화끈함을 느끼기에도 오타크링어만한 것이 없다. 다른 맥주에 비해 훨씬 더 청아한 골드색은 식탁 위에서부터 우아함을 뽐내며 가벼운 식전 주로도, 오스트리아 고기와 밀가루 요리에도 참 잘 어울린다.
아빠 못지않게 나도 이제 오타크링어가 좋다.
촌스럽던 노란 캔도 병아리같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매직.
그간 오타크링어도 참 많은 발전을 해 왔다. 마케팅 전략을 바꿨는지, 연구 개발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 이 모든 게 새로운 경영 바람이 불어 바뀐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 의젓해졌다.
오직 라거 맥주 하나만 알려졌던 오타크링어가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면서 어느새 슈퍼마켓에는 여러 종류의 맥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공항에서는 ‘오타크링어 비어바’가 생기면서, 탑승을 지루하게 기다리는 동안 신선한 맥주를 종류별로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몇 개의 슈퍼마켓에 신선한 맥주를 직접 따라서 올 수 있는 신선 코너도 생겼다! (마치 목장에 우유를 기르러 가는 것처럼!)
게다가 오타크링어는 단순한 맥주 공장으로만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속에 새로운 장이 되었다. 매해 열리는 오타크링어 맥주 축제는 비엔나의 명물 축제가 되었고, ‘맥주 요가’, ‘맥주 노래 대회’, ‘맥주와 라이브 콘서트’, ‘맥주 하이킹’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사고팔고 마시기에서 그치지 않고 발효하며 생생히 살아있다.
그렇게 눈길도 받지 못했던 것만 같던 오타크링어가 천천히 변신을 거듭하면서 이제 제법 오스트리아를 나름 대표하는 맥주들 틈에 스며든 것을 보니 뿌듯해진다. 구석에 엉성하게 있던 노란 캔이 이렇게 도시 곳곳에서 멋지게 성장하고 있는 걸 보면, 오스트리아에서 노란 병아리 시절의 그 누군가가 생각이 나는 게 우연일까. 쭈뼛쭈뼛 발붙이지 못한 채로 어정쩡 하게 살다가, 이곳이 싫다고 징징대며 살아내고, 짐 쌌다가 다시 살아가고. 엉금 성큼 이렇게도 바꿔보고, 저렇게도 맞춰가 보고. 절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비엔나에 마음 한 켠을 내어주고, 언제나 소주만 마실 것 같더니 시원한 오타크링어 한 잔을 즐기고 있고.
맥주 한 잔에 생각해 본다. 우리 인생에 '절대로'는 없고, '언제나'도 없다고. 로고가 바뀌고, 종류가 바뀌면서 살아가지만 근본적인 '맥주'는 변하지 않는다고.
맥주는 원래부터 매력적이었다. 내가 못 알아본 것이지. 그리고, 2월 나의 생일날 신나는 생일 선물을 받게 되었다.
오타크링어 맥주 공장 투어!
평소라면 정원 10명의 투어자들이 북적댈 텐데, 눈비 내리는 오후 네시에 남편과 나는 단독 투어를 하게 되는 행운도 누리게 되었다. 공장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히스토리를 듣고, 그리고 대망의 시음도 마음껏 하게 되고.
비엔나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대게 오페라 하우스, 슈테판 성당, 쇤부른 궁전, 벨데데레 궁전, 클림트 그림, 모차르트…
그러나 나는 비엔나를 이야기할 때, 오타크링어를 빼놓지 않을 것이다. 치열한 변신 끝에 곡물의 시원한 여정을 담아낸 오타크링어를 나의 비엔나에 늘 담아둘 것이다.
오늘도 16구에서 열심히 발효 중일 맥아들처럼, 나도 내 삶을 천천히 발효시키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노란 캔, 칭칭!
P.S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나와의 약속으로 금주를 통해 사순시기를 경건하고 무척이나 마르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다듬으며 몇 번이고 입맛을 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맥주 회고록 덕에 이번 부활이 그 어느 때보다 기다려집니다. 마침 오타크링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맥주 하이킹 홍보를 하고 있네요. 비엔나 각 구마다 오타크링어를 취급하는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생맥주를 먹는 하이킹이래요. 4월 30일까지 한다고 하니, 20일 부활절을 잘 맞이하고 거뜬히 하이킹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후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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