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여러 장 넣고 글은 조금만 쓰면 쉽게 한 주 분량이 나오겠다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죠. 2천여 장이 넘는 사진 속에서 쓸만한 사진을 골라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흐린 날씨가 많았던 탓에 사진의 밝기나 피사체의 선명도가 좋지 않아 익숙지 않은 사진 편집 앱을 사용해 조금씩 손보는 작업은 한마디로 눈이 빠지고 머리털이 빠지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SNS에 여행기 쓰시는 다른 분들을 보면 사진도 글도 술술 잘 만들어 올리시던데 나는 왜 그런 흔해빠진 능력조차 없는 것인가 매번 스스로가 부끄럽고 슬펐죠. 3주 차부터는 사진 편집을 위해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이 두려워서 사나흘은 그냥 외면하다가 이삼일 속으로 울면서 편집하는 일정이 반복됐어요. 사진을 빼고 그냥 글만 짧게 쓸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렇게 하기에 제 글솜씨는 사진 편집 실력보다 더 미천해서 그럴 수도 없었지요. 급기야 알함브라 궁전 편에 이르러서는 미로에 빠진 사람처럼 궁전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일주일을 그냥 날려버렸어요. 연재를 포기해버릴 생각까지 했더랍니다. 누가 강제로 시키는 것도 아닌데 굳이 능력도 안되는 일을 이렇게 질질 끌고 가는 제 자신이 싫었어요.
다 큰 아들과 단둘이 아마도 앞으로 다시는 오지 않을 특별했던 여행의 추억을 의미 있게 남겨보자는 맘으로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스트레스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포기하고 싶은 맘을 꾹꾹 누르며 '에라잇! 모르겠다. 누가 본다고 이렇게 진을 빼는 거냐? 그냥 내 능력만큼만 하면 되는 거지'라고 스스로 다독여가며 겨우겨우 여기까지 왔네요.
이번 스페인 여행은 생각해 보면 전반적으로 운이 참 좋았던 여행이에요. 우기치고는 날씨 운도 좋았고, 식당 운도 숙소 운도 좋은 편이었고, 파업 등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불편을 겪은 적도 없고, 소매치기를 당한 적도 없고,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둘 다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여행을 마쳤으니까요. 비수기에 가다 보니 굳이 궁상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비도 많이 들지 않았더라구요.
그리고 성격이 무척 급한 저와 성격이 매우 느긋한 막내가 10박 12일이라는 짧지않은 여행 기간 동안 큰 싸움 없이 여행을 무사히 마친 것도 정말 큰 행운이었구요. 친한 사이일수록 여행 가서 싸우는 일이 많다는데 우리가 안 친해서 그런 불상사가 없었던 건 아니겠죠? 물론,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세비야에서 잠깐의 감정싸움이 있긴 했어요.
사건의 발단은 이랬답니다. 제가 맛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식당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져서 막내에게 그동안 여행하면서 좋았던 일들을 시시콜콜 얘기하던 도중 '너는 스페인으로 여행 와보니 어땠어? 어떤 게 제일 좋았니?'라고 질문을 한 거죠. 그런데 막내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핸드폰만 쳐다보는 거예요. 식당 안이 소란해서 잘 안 들렸나 싶어 다시 물어봤는데도 역시나 못 들은 척을 하며 대답을 하지 않더군요. 그 순간 제 얼굴이 확 굳어져 버렸답니다. 분위기를 감지한 아들이 고개를 들어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길래 제가 목소리를 깔고 '왜 그러는 건데?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사람 말을 무시하는 건 좀 아니잖아?'라고 하니 막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더군요. '엄마의 질문이 봐라, 엄마 말이 맞지? 오길 잘했지? 인정해!라는 말로 들려서 기분이 나빠져서 그랬어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막히더군요. 아들이 나를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는 건가 싶어서 기분이 엄청 상하더라구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제 원래 성격과는 다르게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게 목소리를 깔고 얘기했나 모르겠어요.
'내 질문 어디에서 그런 의도가 느껴졌다는 거야? 엄마가 여기 오기 바로 두 달 전에 베트남으로 여행도 다녀왔고 코로나도 걸렸었고 제사도 지냈고. 덕분에 엄마 몸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았는지 너 잘 알지?' 그랬더니 막내가 조용히 끄덕끄덕하더군요.
'널 위해서는 여행을 한 번 보내보는 게 좋을 것 같고, 혼자 가기는 싫다고 하고, 그래서 엄마가 무리해서 따라오다 보니 솔직히 여행 내내 체력이 바닥나서 힘든 적 많아. 너 마음 편하게 하나라도 더 보라고 힘들어도 짜증 내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지만 너도 눈치는 챘겠지. 그게 오히려 너한테 부담을 준 거니? 그래서 예민해진 건가? 몸이 많이 힘들었어도 난 이번 여행이 정말 좋았어. 스페인에 볼 것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네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꼼꼼하게 여행 준비도 잘했고 군대 가기 전보다 생활습관이 좋아졌다는 것도 이번 여행을 통해 알게 됐고, 엄마를 배려하느라 애쓰는 모습에 감동받은 순간이 많았거든. 너를 좀 더 많이 신뢰하게 됐지. 그러니 내가 굳이 너를 어린애 취급해서 내 판단이 옳지 않았냐, 네 판단이 틀렸다는 걸 인정해라는 식으로 내 권위를 세우겠다고 네 기분을 짓밟을 이유가 전혀 없었단 말이야. 우리가 같이 여행은 했지만 여행에서 느꼈던 부분이 서로 다를 수 있으니까 단순히 너의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왜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모르겠네.'라고 말을 맺었죠.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말하려다 보니 오히려 말이 길어지더라구요.
그랬더니 막내의 눈빛이 많이 흔들리더라군요. 그리고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아까 성당에서 엄마가 자꾸 유튜브 끄고 그냥 보자고 말씀하실 때 제 생각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려서 짜증이 났던 것도 있고 몸도 피곤하고 하니까 컨디션이 좀 안 좋은데 그런 질문을 하셔서 괜히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나 봐요. 죄송해요, 엄마' 라고 하더라구요. 자기도 이번 여행이 다 좋았는데 '스페인 오기 전에 여행하기 싫다고 버티면서 불편했던 감정이 아직까지 맘 속에 남아 있어서 선뜻 솔직하게 말하기 싫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고도 하고요. 의외로 아들이 그렇게 어른스럽게 나오니 제 마음도 금방 풀어지대요.
그래서 '아까 유튜브 끄자고 얘기한 건 네가 영상 찾느라 보고 가야 할 걸 못 보는 게 안타까워서 그런 건데 앞뒤 다 자르고 말해서 네 기분이 상했나 보다. 엄마도 미안해. 엄마가 평소에 잔소리나 듣기 싫은 지적을 많이 했던 것도 네가 내 말을 꼬아 듣는 원인이 됐을 테니 앞으로는 잔소리 줄이도록 더 노력해 볼게. 어쨌든 우리 앞으로는 서로 감정을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솔직하게 대화해서 풀도록 노력하자. 쌓아두면 오해가 깊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더라.'라고 말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또 막내도 제 말이 맞는 거 같다, 노력하겠다고 하구요.
서로 크게 언성 높이지 않고 대화를 잘 마무리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던지요. 빠에야 조리 시간이 길어서 더 다행이었구요. 아무튼 그때 막내의 마음에 남아있던 작은 앙금을 털어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이번 스페인 여행이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요.
나중에 막내가 그러더군요. 스페인으로 여행 가기 전에는 유럽 여행은 준비하기 복잡하고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생각해서 거부감이 있었다구요(막내는 가성비를 무척 따지는 타입이랍니다). 그 돈이면 일본이나 싱가포르로 편하게 갔다 오는게 낫지 않나라고 생각했었대요. 그런데 갔다 오고 나니 기대보다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서 좋았고 특히 종교에서 시작해서 종교로 끝나는 유럽 역사와 문화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어서 재미있었대요. 돈도 계획만 잘하면 걱정했던 것보다 많이 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구요. 구글맵만 가지고도 먼 나라 여행을 쉽게 할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나니 이젠 어디로든 여행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엄마가 여행 경험자라서 함께 여행하기 좋았다는 얘기도 하더군요. 자기 성격에 혼자 여행했다면 아마 호텔에 틀어박혀 많이 돌아다니지 않았을 거래요. 엄마 덕분에 알차게 여행해서 좋았다고 하는데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저도 사람인지라 그런 얘기를 들으니 뿌듯하더라구요.
여행기 초반에 아들이 둥지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이번 여행을 계획했다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런데 여행을 함께 다녀보니, 막내라고 마냥 어리게만 보았던 아들은 이미 낯선 환경 속에서도 차분하고 꼼꼼하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이었더라구요. 참 대견하게도 말이에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아직 아들을 둥지 밖으로 내보낼 마음의 준비가 덜되어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되더군요. 늘 친구들에게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들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놓고 정작 저는 심리적 탯줄을 붙잡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나 봐요.
여행을 다녀온 지 벌써 4개월이 다 되어 가네요. 그 사이 막내는 서울 하숙집으로 짐을 옮겼고 남편은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지방으로 발령이 나서 저는 예기치 않게 홀로 우리 집을 지키고 있답니다. 가족들로부터 독립해 어른스럽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인생 참 재미있죠?
요즘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보다 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요. 어떻게 하면 혼자서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뭘까 하는 것들 말이에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족들에게 질척대지 않고 저에게 주어진 자유를 충분히 즐기면서 살아보려고 해요. 그래서 오늘도 저는 또 다른 여행을 꿈꾸고 있답니다. 저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요?
여러분 다음 주엔 공연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수요일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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