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스페인은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여러 이유도 있지만 가우디의 걸작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죠. 가끔 TV 프로그램을 통해 바르셀로나 시내 곳곳에 있다는 한편으로는 기괴하고 한편으로는 경의로운 건축물들을 볼 때마다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정말 궁금했거든요.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마일리지 표가 남아있는 대로 여행 일정을 짜다 보니 우리의 첫 방문지는 바르셀로나가 되었는데 덕분에 저는 가우디를 만난다는 기대감으로 14시간 반이라는 긴 비행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아시죠? 좁은 비행기 안에서 14시간을 보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ㅠ
비행기에서 아들과 저는 일부러 복도를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앉았답니다. 경험상 어차피 거의 잠을 자거나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갈 텐데 붙어앉아봤자 누구 하나는 답답하게 안쪽 자리에 갇혀 화장실을 갈 때마다 미안해하며 다녀야 하고 별로 좋을 게 없더라구요. 둘 다 복도 쪽 좌석에 앉으면 밥 먹거나 잘 때도 편하고 화장실도 눈치 볼 필요 없이 자주 갈 수 있는데 말이에요. 어차피 비행기에서 내리면 하루 종일 붙어 다닐 거 가는 동안만이라도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 부딪힐 일도 줄어든답니다. 막내가 덩치가 좀 있는 편이라서 그 작전은 우리에게 더욱 유용했어요.
출발 전 비행기가 40분 정도 지연되는 바람에 바르셀로나에는 저녁 7시가 넘어서 도착했어요. 도착한 날이 11월 25일이라 해가 일찍 져서 바깥이 깜깜하니까 마음이 무척 급해지더군요. 그래서 아들과 저는 짐을 찾자마자 후다닥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어요. 미리 예약하지 않아도 공항에 빈 택시들이 많아서 금방 탈 수 있었어요. 토요일 저녁이다 보니 차가 많이 밀렸는데 처음엔 택시비 걱정에 택시 탄 걸 살짝 후회했다가 곧 돈 걱정은 잊어버렸어요. 때마침 크리스마스 기념 조명이 시내 곳곳에 켜져 있어 가는 내내 눈이 즐거웠거든요.
스페인을 여행하는 동안 택시를 자주 이용했는데 바가지도 없고 일반 택시도 그렇지만 우버나 볼트 같은 차량 공유 앱을 이용해서 탈 때도 기사분들이 직접 트렁크를 실어주고 내려주시니까 정말 편하더라구요. 이탈리아는 트렁크 한 개당 1유로의 서비스 비용이 붙는데 스페인은 그런 게 없어서 더 좋았구요. 혹시 영어가 잘 안되는 기사님을 만나도 구글맵으로 목적지를 보여주면 다 알아서 데려다주시니까 스페인으로 자유여행 가시는 분들은 택시 이용하는 것 겁내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바르셀로나에서 총 4박을 했는데 우리가 머물렀던 콘데스 데 바르셀로나 호텔은 크진 않지만 위치나 시설 서비스 모두 기대 이상이어서 만족도가 높았어요. 처음 배정받은 방은 룸 컨디션은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창문이 호텔 로비 쪽으로 나 있어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처음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에게 가서 미안하지만 방을 좀 바꿔줄 수 있겠느냐고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우리가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옵션이 뭐가 있는지 찾아보겠다'하더니 금방 시티뷰 방으로 바꿔주더군요. 하루 이틀 잘 거라면 그냥 있겠는데 4박 5일 동안 있을 생각을 하니 도저히 안되겠더라구요. 컵라면 먹을 때 환기가 잘 안될까 걱정도 되구요.
사실 아들은 처음에 제가 방을 바꿔달라 해야겠다고 하니 난감해하더라구요. 자기는 이 방도 좋은데 꼭 방을 바꿔야겠느냐는 거예요. 뭔가 마음이 불편했나 봐요. 그 마음을 제가 이해 못 한 건 아니에요. 저도 어릴 땐 그랬거든요.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냥 참고 넘어가기보다 이해당사자인 상대방과 불쾌해하지 않은 선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제가 '물어보고 안된다 하면 돈을 더 지불하면 어떻겠느냐 물어보고 그것도 안된다고 하면 알겠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마라. 엄마가 그렇게 억지를 부리고 하는 사람은 아니잖느냐' 했더니 수긍하더라구요. 그런데 너무나 친절하게 바로 방을 바꿔주니 좀 놀라는 눈치였어요. 아마 막내는 그날 삶에 필요한 작은 요령 하나를 배웠겠죠?
아들과 저는 짐을 옮기면서 호텔 너무 잘 잡은 것 같다 자화자찬하며 새로 받은 방 구경에 잠시 즐거워하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어요. 공항에서부터 서둘렀던 덕분인지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미리 찾아놓은 맛집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죠. 스페인은 저녁 10시가 피크타임이고 특히 그날은 토요일이라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들이 많아서 그런지 길거리가 북적북적했고 거리엔 온통 예쁜 크리스마스 조명들이 반짝거리고 있어서 호텔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도 덩달아 기분이 들떴어요. 그래서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맥주도 시키고 '조금만 늦었어도 제시간에 밥 먹기 힘들었겠다' 하면서 신나게 수다도 떨고 머나먼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을 자축하며 맛있게 첫 끼니를 해결했죠. 사실 여행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늘 긴장한 듯이 보였던 막내도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드는지 살짝 흥분한 것 같았어요.
한국식 치킨을 판다며 한글로 된 네온사인 판도 걸어놓은 그 식당은 분위기도 좋았고 음식 맛도 좋았어요. 직원들도 모두 친절해서 기분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뻔 했죠. 그런데 귀국한 다음날 여행경비를 정산하다가 그날 밥값을 두 번 결제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기내식을 먹은 지 얼마 안 돼 음식을 조금만 시켰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더라구요.
떠나기 3주 전 막내와 저는 둘 다 트래블 월렛 카드를 만들었습니다. 환전수수료가 붙지 않는 체크카드라 현금은 조금만 가져가고 이 카드를 가져가는 게 훨씬 편리하고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리뷰 중에 가끔 이 카드가 안되는 데가 있으니 비상용으로 카드를 하나 더 가져가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서 식당 직원이 카드가 에러가 나서 잘 안된다고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다른 신용카드로 한 번 더 결제를 해버렸지 뭐예요. 그 직원이 일부러 바가지를 씌우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카드 리더기에 뭔가 에러 사인이 뜨긴 했거든요.
트래블 월렛 앱을 열고 결제가 됐는지 먼저 확인을 해봤어야 했는데 첫날이고 피곤해서 그 생각을 미쳐 못 한 게 화근이었죠. 그 이후 트래블 월렛 카드로 결제하는 데 문제가 된 곳은 한 군데도 없었어요. 그래서 여행이 끝날 때까지 중복 결제한 사실을 몰랐던 거고요.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다 끝난 다음에 알게된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 여행 중간에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내내 찝찝한 마음으로 여행을 다녔을 테니까요. 그냥 액땜한 셈 쳐야지 어쩌겠어요.
우리 숙소가 까사 바트요와 까사밀라 사이에 있어서 바르셀로나에 머무는 동안 매일 한 두 번씩 그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까사바트요를 한 번 보고 가려고 들렀는데 그 앞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는 거예요. 건물에 푸른 조명이 비치고 있어서 정말 멋졌는데 그것 때문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저녁 6시 반부터 30분 간격으로 3분짜리 짧은 크리스마스 라이트닝 쇼를 하고 있었더라구요. 그날은 그걸 모르고 가우디의 대표작 하나를 만났다는 기쁨에 감격하며 조명 비친 건물 사진을 몇 장 찍고 빨리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그다음날 7시부터 움직여야 해서 마음이 바빴거든요. 밤에 본 까사 바트요는 생각보다 작고 기대보다 더 기괴했는데 범상치 않은 건물이 주는 감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에게 '저 건물을 낮에 다시 보면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라고 말했는데 그다음날 잡혀있었던 투어 집결지가 까사 바트요 근처여서 그 궁금증은 바로 풀렸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밤보다는 낮에 본 까사 바트요가 더 좋았습니다. 아들도 낮에 보는 게 더 좋대요. 햇빛을 받으니 건물의 놀라운 디테일들이 하나하나 다 살아나서 감탄이 절로 나왔거든요.
그날 밤은 시차 적응이 덜된 탓에 잠을 설치고 오래 자지 못했어요. 뒤척이다가 새벽 3시쯤 눈이 떠졌는데 아들은 다행히 잘 자고 있더군요. 옆에 곤히 잠든 아들의 얼굴을 보니 문득 우리가 이렇게 한방에서 같이 자본 게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뭉클해지대요. 덩치는 산 만한데 자는 모습은 아직 아기 때 모습이 남아있어서 재미있기도 했구요. 한참 바라보다 보니 스페인까지 오는 동안 저도 많이 피곤할 텐데 엄마 힘들까 봐 무거운 짐은 다 지가 들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각나서 고마운 맘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괜히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집에 있을 때 늘 새벽까지 게임하느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막내는 시차 적응을 하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첫날부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더라구요. 원래 자던 습관 그대로 잔 것뿐인데 그게 스페인 시간으로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패턴이었던 거죠. 그래서 여행하는 동안 최소한 아침에 깨우느라 잔소리 할 일은 없었답니다. 푹 자고 많이 걷고 햇빛도 많이 보니 낯빛도 엄청 밝아졌구요. 매일 남편과 통화할 때마다 '쟤는 스페인에서 살아야 건강하게 오래 살 것 같아'라고 말할 정도였답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엔 바로 원래대로 새벽에 자고 점심때쯤 일어나네요. 에휴~ 여행 다닐 땐 참 듬직한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얘기할까요? 다음 주 수요일엔 몬세라트와 시체스 방문기로 돌아오려구요.
여러분 한 주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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